소설리스트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310화 (310/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310화>

* * *

상소윤은 이제 세상 그 누구보다 진유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원래도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앎의 정도가 차원이 다르다.

진유성이 잊힌 인과율의 세계에서 진유성을 처음으로 관측한 것도 상소윤이고, 세상이 개편될 때 인과율의 중심에 서 있던 것도 상소윤이다.

그녀는 진유성의 삶에 대해서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진유성이 말하지 않은 부분들까지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진유성이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사실 상소윤은 요즘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온몸에 활력이 넘치고, 뭐든지 할 수가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단지 느낌뿐만 아니라, 힘도 강해지고 달리기도 빨라졌다.

맨 처음에는 진유성이 돌아와서 기분이 좋은 건가 싶었는데 그런 정도가 아닌 것 같았다.

“야, 진유성.”

“왜 그러느냐?”

“혹시 내 몸에 무슨 신체적인 변화가 일어난 거야?”

“키라도 큰 게냐?”

“그런 소리가 아니라.”

“상도윤은 어디 갔느냐?”

“엄마랑 산책 갔을걸?”

“그렇군.”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뭔가 좀 이상하다니까?”

“너의 박색함은 이상함을 넘어선 지 오래니 신경 쓰지 마라.”

“아, 진짜 죽을래?”

“날 죽이려면 백 년은 이르다.”

헛소리를 내뱉은 진유성이 2층으로 올라가자, 상소윤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진유성이 자신의 질문을 회피하는 것 같다.

보통의 진유성은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저렇게 말을 빙빙 돌리는 걸 보면 분명 뭔가 있는 거다.

‘근데 왜 말을 안 해 주는 거야?’

상소윤의 불만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진유성과 그녀의 관계는 분명 예전과 달라졌다.

아니, 달라져야 마땅했다.

“아무래도 상소윤이 날 사모하는 것 같다.”

“야!”

“아무래도 나도 그런 것 같다.”

“……!”

“……!”

그럴 만한 일이 있었으니까.

입으로만 떠들어 댄 것도 아니다.

입으로 다른 것도…….

“미쳤어, 미쳤어.”

순간적으로 떠올린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분명 있었던 일이다.

사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자신이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진유성이 죽을까 봐 걱정돼서 심신 미약 상태였던 것 같다.

아무튼 상소윤은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진유성이 돌아온 시점부터 뭔가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변한 것이 없다.

아빠가 꾸준히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게 무색할 정도다.

상소윤은 그게 불만이었다.

그때 2층으로 올라갔던 진유성이 계단의 절반쯤 내려오더니 입을 열었다.

“상소윤.”

“어?”

“내일 올 것이냐? 심도훈이 티켓이 필요하면 지금 말하라는 구나.”

“자선 경기 말하는 거지?”

“그래.”

“새롬이는 안 간다던데…….”

“혼자라도 와라. 어차피 주말에 할 것도 없지 않느냐?”

“뭔 소리야. 나 바쁘거든?”

“간다고 말해 놓으마.”

진유성이 2층으로 올라가자 상소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확답을 준 것도 아닌데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나랑 같이 가고 싶은 거 맞지? 그치?’

상소윤은 불쌍한 진유성을 위해 착한 자신이 기꺼이 시간을 내주기로 결정했다.

그리고는 정새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새롬아. 뭐 해?”

내일 입을 옷을 쇼핑하기 위해서.

* * *

소아암 환자들을 위한 기금 마련 행사의 대기실에 들어온 진유성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몇몇 남자들이 쭈뼛거리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오늘 자선 행사는 다양한 이벤트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중 진유성이 참여하는 것은 ST-1 구단 선수들과의 5 대 5 게임.

그러니까 대기실에서 쭈뼛거리고 있는 이놈들이 진유성의 팀이었다.

프로게이머와 설렙들 간의 매치업인 만큼 프로게이머들은 페널티를 받는다지만, 다들 영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이래서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음이 좀 바뀐다.

생각해 보니까 오늘 경기에서 꼭 이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요즘 진유성은 자신이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는 걸 세상에 어필 중에 있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오늘 그의 팀이 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정확히 진유성이 원하는 그림은 라인전은 압살하지만, 나머지 팀원들의 기량이 형편없어서 지는 그림이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도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라, 시류에 따라서 패배할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걸.

‘좋군.’

갑자기 어리벙벙한 팀원들의 면면이 마음에 든다.

“아, 안녕하십니까!”

그때 가장 많이 쭈뼛거리던 20대 초반의 남자가 진유성에게 허리를 냅다 숙였다.

모르는 얼굴이지만 옷차림이나 메이크업을 보아하니 아이돌처럼 보였다.

“죄송합니다!”

“다짜고짜 뭐가 죄송하단 말이냐?”

“오늘 같은 팀이 됐는데 제가 잘 못해서 미리…….”

“게임을 잘 못하느냐?”

“예? 예. 죄송합니다…….”

“대체 왜 죄송하다는 것이냐?”

“네?”

“너의 삶에서 게임은 작은 부분에 불과하니 승패에 연연할 필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 진유성 선배님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래서 내가 패배하면 어떻게 되느냐?”

“어, 실망을 하겠죠……?”

진유성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이야, 듣거라. 타인의 의견은 너의 삶이 아니다. 타인의 실망이 너의 실망이 되거나, 타인의 기쁨이 너의 기쁨이 돼서는 안 된다.”

“……!”

“너의 마음 안에서 실망과 기쁨을 느끼거라. 그러니 오늘 게임의 승패에 연연할 필요는 전혀 없다.”

난 열심히 할 테니, 너희는 적당히 해서 패배하자는 말을 빙빙 돌려 말한 진유성이었다.

하지만, 진유성의 사심이 담긴 말은 오늘 모인 아이돌 가수들에게 엄청난 울림을 주었다.

그들은 타인의 기쁨과 실망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삶을 사는 이들이었다.

때로는 ‘나’라는 존재가 없다고 생각할 때도 있을 정도로.

그런데, 자신을 불태워 세상을 구한 영웅적 행적을 보인 이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오늘의 경기는 이벤트지만 공중파에서 송출하며, 심지어 해외에서 판권을 따 가기도 했다고 했다.

모두가 진유성에 대해 궁금해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큰 부담감에 휩싸여 있었는데, 갑자기 온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게임을 망쳐서 사람들에게 조롱당할 수도 있다는 부담감이 사라진 것이었다.

‘역시……!’

‘어느 정도로 마음이 단단해야 저런 생각을…….’

아이돌 가수들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진유성을 쳐다보는 순간이었다.

대기실의 문이 열리며 상소윤이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 아이돌들은 동종 업계 종사자가 온 줄 알았다.

일반인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뛰어난 외모 때문이었다.

“왔느냐?”

“왔도다.”

하지만 그녀는 진유성의 지인이었다.

TV에서나 보던 아이돌을 처음 본 상소윤이 신기함에 다가가려는 찰나.

“쓸데없는 짓 말고 따라와라.”

“어디 가게?”

“심도훈을 구경하러.”

“걔를 봐서 뭐해? 어차피 맨날 보는 거.”

“어허, 그래도 친구가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하는데 어찌 그리 야박하단 말이냐?”

상소윤은 진유성의 손에 이끌려서 대기실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막상 밖으로 나오니 너무 많은 사람들이 진유성과 사진을 찍으려고 해서 심도훈을 만날 수는 없었다.

많이 바쁜 듯 전화도 받지 않고.

“아, 씨. 그냥 대기실에 있을걸.”

“방정맞게 굴지 말아라.”

결국 상소윤은 아이돌들과의 인사 기회도 갖지 못한 채 VIP 전용석으로 돌아가야 했다.

곧 경기가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 * *

오늘 경기에서 페널티는 간단했다.

셀럽으로 구성된 팀(진유성을 빼면 전부 아이돌이지만)의 플레이어들은 처음 시작할 때 소량의 재화를 가진 채로 시작한다.

소량이라고는 하지만, 꽤 의미 있는 페널티였다.

롤이란 게임은 그 설정상 초반 단계의 재화가 아주 큰 가치를 가지기 때문이었다.

물론 진유성은 이러한 규칙에서 제외되었다.

원래부터 세계 최고의 미드 라이너조차 압살하는 실력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경기 시작 전, 선수들과 악수를 나누는데 미드라이너 포지션에 처음 보는 얼굴이 있었다.

진유성과 자웅을 겨뤘던 샤이나크가 보이지 않는다.

“본래 미드라이너는 어디 갔느냐?”

“아, 그 형 손가락 부러져서 시즌 아웃됐어요.”

“허어, 어쩌다가?”

“화장실에서 넘어졌대요.”

“…….”

진유성은 바보 같은 놈이라고 말할 뻔했지만 참아 냈다.

솔직한 마음은 그렇지만, 생업을 방해당할 정도로 다친 이에게 그런 표현은 실례인 것 같아서.

그렇게 경기가 시작되었다.

처음에 경기는 딱 진유성의 예상대로 진행되었다.

-아! 아! 아!!! 엄청납니다!

-솔로랭크에서 엄청난 퍼포먼스를 뽐냈다고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진유성이 해설자들도, 방송을 보고 있던 게임 팬들도, 아무 것도 모르는 시청자들도 깜짝 놀랄 만한 경기력을 선보인 것이었다.

세계 최고였던 샤이나크에 비해 한 수 아래인 새로운 미드라이너는 진유성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미드 이외의 아이돌들은 전부 프로게이머들에게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그나마 이벤트성인 것을 감안해서 프로들이 장난을 좀 가미했기 때문에 최소한의 균형이 유지되는 상황이었다.

‘흡족하군.’

모든 것이 진유성의 뜻대로다.

하지만 그때.

“씨발! 할 수 있어!”

인게임 보이스가 공개될 거라는 사실조차 잊은 누군가의 외침에 아이돌들이 이를 악물었다.

본래의 그들이었다면 입에서 욕이 나올 정도로 집중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여러 개의 마이크가 그들의 목소리를 담고, 수십 대의 카메라가 그들을 찍고, 수천 명의 관객들이 그들을 보고 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뭔가에 홀린 것처럼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실망도 기쁨도 내 안에서 완성되어야 한다는 진유성의 말 때문이었다.

“어, 어…….”

그리고.

진유성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멋진 한타가 벌어졌다.

프로게이머들이 본능적으로 진유성만을 경계하는 틈을 타서 초심자들의 궁극기 스킬이 제대로 적중한 것이었다.

“우와아아아아!”

“씨바아알!”

아이돌들이 환호한다.

그리고는 노래를 부른다.

오오오오오오

너무 좋아요

오오오오오오

진유성의 찬송가를 부르며 진격한 셀럽 팀이 경기를 끝내는 순간이었다.

“…….”

진유성이 똥 씹은 표정을 짓는 사이, 예상치 못한 승리에 놀란 카메라맨들이 부스로 들이닥쳤다.

아나운서가 묻는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승리를 거두셨는데요! 기분이 어떻습니까!”

그러나 흥분 상태의 이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진유성이 가장 싫어하는 노래를 전 세계인이 보는 앞에서 열심히 부를 뿐이었다.

오오오오오오

오오오오오오

심지어 저 미친놈들은 직업병이 있는지 화음도 넣고 있다.

진유성은 그 끔찍한 광경을 보면서 문득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진유성이 집착했던 고인수의 단추가 후드득 떨어진 것은 인과율의 탓이다.

그렇다면 혹시 이 관심들도 인과율의 영향이 아닐까?

“……업보로다.”

벌써 똑같은 생각을 여러 번 하고 있는 진유성이었다.

* * *

“야, 진유성. 너무 모순적인 거 아니냐?”

“네가 모순이라는 단어도 아느냐?”

“뒤질래?”

상소윤이 주먹을 말아 쥐더니 말했다.

“아니 왜 아무도 너한테 관심 없을 때는 관심받고 싶어 하고, 관심을 주니까 싫어하냐?”

“시끄럽다.”

“할 말 없으니까 구박하는 거 봐.”

“시끄럽다고 하지 않았느냐.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진유성의 말에 상소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뭘 집중해?”

안 그래도 이상하던 참이었다.

자선 경기가 끝나고, 진유성이 그녀를 근처의 공원에 데려왔기 때문이었다.

“함께 갈 곳이 있다.”

“어디?”

“중원.”

그 순간, 진유성이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공간이 일렁거리며, 이윽고 지구와 중원을 잇는 공간의 틈새가 벌어졌다.

“같이 가겠느냐?”

“가서 뭐 하는데?”

“글쎄. 와 보면 안다.”

상소윤은 고민하지 않았다.

어차피 진유성과 같이 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모험이라기보다는 여행일 것이니까.

그렇게 두 사람은 잠시 지구에서 자취를 감췄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