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306화>
* * *
문을 닫는 순간.
진유성은 고요함 속에서 그릇이 품고 있는 모든 것을 느꼈다.
야망과 분노.
탐욕과 악의.
거대한 도량과 그동안 포식한 힘의 원천까지.
진유성은 그 모든 것을 천천히 자신의 우주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을 품어 내는 순간, 그릇의 존재조차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손쉽게 진유성은 그릇을 흡수했다.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은 진유성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이었을지도 몰랐다.
진유성이라고 미욱한 인간들을 증오한 적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뜻을 몰라 주고 자신을 매도하는 이들에게 살의를 느낀 적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진유성은 연민이란 땅 위에 세워진 존재라서, 그 모든 것을 묵묵히 감내한 것뿐이었다.
그렇게…….
그릇이 소멸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삼키려던 존재의 결말이라기에는 너무나 허망했지만, 또한 잘 어울리는 결말이기도 했다.
삼키지 못한 단 하나의 것이 불러일으킨 균열에서 소멸했으니.
‘끝났군.’
형용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아득한 고요함 속에서 진유성은 생각했다.
‘이제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아카샤는 모든 것을 정상으로 되돌릴 방법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마 그 ‘모든 것’에서 자신은 제외될 것이었다.
진유성은 성좌와 그릇을 흡수하며 아카샤의 격을 넘어섰다.
설령 아카샤가 선의로 자신을 도와주려고 해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진유성의 존재가 인간을 뛰어넘어 인과율에 영향을 받는 신에 가까운 존재가 됐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진유성의 온몸에서 힘이 넘실거린다.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 신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그러니 아카샤가 어떤 방법을 쓴다고 하더라도 진유성은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었다.
역설적이다.
인간으로서 인간을 구원한 진유성이지만, 모든 사명을 완수했을 때는 신이 되어 간다는 건.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정해진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전지전능한 존재는 차원을 분리하고 위상의 수호자를 만들 때부터 여기까지 봤던 것 같다.
[통과하라.]
[그대는 자신을 온전히 보존한 최초의 통과자이다.]
[그럼, 그대가 문을 닫을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
온전히, 보존한.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위상의 수호자가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보존한’이 아니라 ‘온전히’였다.
진유성은 세상의 그 무엇도 품을 수 있는 온전한 존재였으니까.
그릇은 스스로가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진유성이 가진 연민만큼은 품어 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진유성은 정해진 운명 따위는 믿지 않는다.
그런 걸 믿기에는 그가 살아온 삶이 너무나 험난하고 지난했다.
설령 운명이 모든 것을 정해 놓았다고 하더라도 그 위를 걸어간 것은 온전한 자신의 의지이다.
그러니 진유성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자신을 움직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움직일 방향에 맞춰서 전지전능한 존재가 움직였다면 몰라도.
그때였다.
고요한 무상(無想)의 공간 속으로 아카샤가 나타났다.
일전에 아카샤와 조우했을 때는 그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 버거웠다.
하지만 지금의 진유성은 아카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카샤는 슬픈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게 모든 이야기의 결론이었구나. 아이야.]
[안배는 잘 써먹었다.]
어느새 진유성의 음성은 신언이 되었다.
진유성이 아카샤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겠군. 너도 고생하고 있었다는걸.]
아카샤는 작금의 사태와 싸움에 깊이 개입하지 않았었다.
주시자라는 특성 때문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아카샤가 자신의 역량을 총 동원해서 온 지구의 아카식 레코드를 백업해 놓은 상태라는 것이었다.
바이러스가 침투했고, 바이러스를 제거했으니, 이제 다시 기록을 원상태로 복구시킬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기하급수의 기록을 전부 짊어지느라 아카샤가 싸움에 개입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유일하게 백업되지 않은 존재가 있다면 아카샤 본인과 진유성이었고.
[이제 넌 어떻게 되는 거지?]
[사명을 다했으니, 온 세상에 축복을 내리고 소멸할 것이란다.]
아카샤는 자신을 무한히 쪼개서 모든 인류의 영성에 스며들 생각이었다.
그 결과 인류의 영성은 더욱 번영하고, 그들의 지성은 눈부신 꽃을 피울 것이었다.
또한, 이제는 <아카식 레코드의 관리자>라는 힘을 수탈하려는 존재가 나타날 수 없다.
아카식 레코드의 관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온 인류의 영성에 녹아든 아카샤를 흡수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인간을 한 명, 한 명 잡아다가 그들의 영성에서 아카샤를 축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 과정에서 인류가 멸망하고, 아카식 레코드의 기록은 중지된다.
기록이 중지되면 아카식 레코드의 관리자라는 자리가 가진 힘 또한 사라진다.
이는 아카샤의 힘을 탐내는 이들에게 모순의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이었다.
아카식 레코드의 힘을 얻기 위해서는 인류를 죽여야 하고, 인류를 죽이면 아카식 레코드의 힘이 없어지니까.
결과적으로 더는 이 힘을 탐내는 인외의 존재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었다.
아카샤는 그렇게 자신의 죽음으로 세상을 가장 안전하게 만들 예정인 것이었다.
진유성은 그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널 백업시킨 세상에 끼워 넣을 수 있단다.]
[그게 가능한가?]
[내 존재를 소멸시키면서 하는 일이다. 그 정도 편법까지는 가능하단다. 너는 평온한 삶을 누릴 수 있고, 사람들은 그저 너를 고강한 각성자로 기억할 것이란다.]
성좌와 그릇의 존재가 인식되기 이전의 시점으로 백업을 하기 때문에, 진유성이 세상을 구한 기록은 사라지게 된다.
아마 아포칼립스가 시작되기 이전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너는 지금처럼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평범한 시간들을 보낼 수 있단다. 네 주변인들 몇몇만 진실을 기억하겠지.]
[……내가 바라는 삶이군.]
하지만 진유성은 개운한 얼굴이 아니었다.
바라마지 않는 일이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가 빠져 있었다.
[그럼 중원은 어떻게 되지?]
[…….]
중원은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되지 않은 차원이다.
모든 일이 그렇게 마무리된다면, 지구가 평온해지는 것과 별개로 중원은 멸망한 차원이 된다.
그곳에 살았던 수억의 인구는 윤회조차 하지 못하고 여전히 그 안에서 고통받는다.
진유성의 질문을 받은 아카샤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그들은 답을 알고 있었다.
[정녕 그것을 원하느냐?]
[그래.]
[그렇게 되면 너는 사라질 수도 있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너는 나아가겠지. 그것이 진유성이란 존재이니까.]
[잘 알면서 왜 그래?]
아카식 레코드를 기준으로 차원을 되돌리면 중원은 멸망한 상태이다.
하지만 인과율을 기준으로 두 차원을 되돌리면 어떻게 될까?
결과를 기준으로 원인이 재편성된다.
이제 마도사들도, 그릇도, 성좌도 없다.
이러한 과(果)에 맞춰서 인(因)이 재편성될 것이었다.
존재하는 것들이 합당하다면 새롭게 재정비된 차원에서도 존재할 것이고, 존재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면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진유성은 사라진다.
새롭게 정립되는 인과율은 진유성의 존재를 허락해 주지 않을 것이니까.
진유성이 신이 된 것은 그릇과 성좌를 이겨 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릇과 성좌가 없어진 과(果)에서, 진유성의 탄생이란 인(因)이 성립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진유성이 일개 인간이었다면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는 이제 인간의 영역을 아득히 벗어났다.
재정비될 시간 축에 진유성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유성은 선택했다.
그리고 그는 결정을 내린 순간부터 주저하지 않는다.
[바로 하자. 아카샤. 원래 반죽은 말랑말랑할 때 빚는 법이잖아.]
[지구는 행성의 명을 다할 때마다 윤회했다. 그때마다 무수한 인류가 피어났고, 무수한 영웅들이 탄생했다. 전지전능한 존재는 그것을 수도 없이 보았고, 그 기억은 내 안에도 있다.]
[…….]
[하지만 아이야. 그 어떤 영웅을 떠올려도 네 앞에서는 어린아이에 불과하구나.]
아카샤가 손을 휘두르자, 차원에 혼재된 인과율이 용암처럼 들끓는다.
[그간의 나는 기록을 적는 자였을 뿐, 단 한 번도 읽는 자였던 적이 없다. 하지만 처음으로 기대하노라. 또한 희망하노라.]
인과율이 결과에 영향을 받아 재정립되기 시작한다.
[내가 읽을 수 없는 페이지 너머. 거기에 그대의 행복이 기록되기를…….]
아카샤와 진유성의 신체가 희미해진다.
진유성은 그 힘에 대항할 수 있었지만, 순응했다.
[그렇게, 한 명의 독자로서 기대하겠노라.]
이윽고 인과율의 폭풍이 두 사람을 휩쓸었다.
* * *
“대주, 아니 교주님!”
상림이 헐레벌떡 달려온다.
그러자 천마신교주가 인상을 찌푸린다.
“상림아. 체면을 좀 지켜라.”
“에이,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죠.”
“이제 솔잎 먹지 마라. 네가 천마신교의 이인자라는 자각을 좀 가지고.”
그 순간, 상림이 고개를 갸웃했다.
“네? 제가 왜 이인자에요?”
“그럼?”
“삼인……. 아, 이인자 맞네. 주청 형님 다음이 저니까.”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표정을 지었던 ‘천마신교주 신주청’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상림은 그 뒤를 따랐고, 두 사람은 천신궁에 들어섰다.
천신궁에는 의도적으로 황제의 옥좌보다 높게 만들어진 의자가 있었다.
신주청은 자연스럽게 의자의 뒤에 섰다.
그러자 상림이 고개를 갸웃한다.
“뭐 하십니까?”
“응?”
“제가 앉아요? 아니 뭐, 저야 상관없긴 한데…….”
“야욕을 드러내는구나.”
“흐흐.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일인자보다 이인자가 좋습니다. 만인지상 일인지하. 멋있잖아요?”
피식 웃은 신주청은 천마신교주의 교좌에 앉으며 생각했다.
‘내가 왜 뒤에 기립했지?’
뭔가 이상했지만, 그 이상함은 곧 사라졌다.
“근데 왜 온 것이냐?”
“그, 일전에 교주님이 해남의 이상한 섬에서 가져온 보석 있잖아요? 입멸공을 얻었던.”
“어.”
“그 보석을 사용하고 싶다는 마도사가 나타났습니다.”
“마도사?”
“서반아에서 건너왔는데, 이름이 뭐라더라? 멀더? 그런 거였는데.”
“그걸 어디다가 쓴대?”
“무슨 연금술로 문을 만든다고 했는데…… 자세한 건 직접 들어 보시죠.”
“너, 이해 못했지.”
“그건 모르겠고, 문 같은 거 만들면 제가 한번 들어가 보려고요.”
“네가? 왜?”
“그냥요.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데.”
상림이 어깨를 으쓱했다.
* * *
“야, 상소윤!”
정새롬의 부름에 상소윤이 고개를 돌렸다.
“어, 새롬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그냥. 이제 드디어 3학년이 됐구나. 그런 생각.”
“근데 뭘 그렇게 창밖만 보고 있어.”
“이 자식이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지.”
“이 자식? 누구?”
“어? 뭐가?”
“누구 기다렸다며.”
“……내가?”
“너 어제 잠 안 잤어? 왜 이렇게 헛소리를 자주 해?”
그때, 상소윤은 누군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 같아서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아이스크림이 내밀어진다.
“너 어디 갔…….”
상소윤이 말을 멈췄다.
“응? 혹시 나 찾았어?”
그녀에게 아이스크림을 내민 사람은 지종수였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상소윤은 멍하니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돌아오지 않는다.
대체 언제 오는 걸까.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근데…….
누가?
누가 언제 온다는 거지?
나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