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305화>
* * *
최후의 싸움은 얼핏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품은 힘의 총량이 하잘것없기 때문이었다.
그릇이 운용하려는 힘이 백(百)이었다면, 진유성은 그중 오(五)를 징수했다.
그리고 인류배려자라는 특성으로 오의 힘을 삼 할만큼 부풀렸고.
그러니 그들의 싸움은 F급 보스 몬스터가 품은 힘의 레벨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이었다.
서울역 전체와 동화되어 형태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집요한 진유성과, 그런 진유성의 힘을 피해 공격을 노리는 그릇.
두 존재의 싸움 속에 이용되는 기의 운용은 신역의 경지였다.
프스스스슷!
회색의 기운이 안개처럼 흩어지며 진유성의 몸을 옥죈다.
이것은 포식의 힘이다.
영과 혼을 먹어치운 다음에 백과 육을 먹어치우고, 마침내 그 존재의 의의조차 먹어치우는.
그야말로 사악한 힘이다.
하지만 진유성은 이 힘에서 버틸 수 있다.
끄그그극!
진유성이 손을 휘두르자 쇠를 긁는 듯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두 기운의 충돌 속에서 진유성의 일검이 정직하게 나아갔다.
그리곤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 허공을 대번에 베어 냈다.
분명 육안으로는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피처럼 흐르는 회색의 무언가가 주르륵 흘러나온다.
드디어 진체를 베어 낸 것이었다.
동시에 공간에 균열이 번지고, 그 틈새로 진유성의 인과율이 그릇의 죽음을 설정한다.
그릇은 그것을 막아 내려 했지만, 진유성이 품은 인과율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애당초 신의 자아를 담았던 그릇의 특성상 인과율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탓이었다.
투화아아아악!
빛이 번진다.
본래 그릇은 여기서 소멸을 맞이해야 했다.
하지만 그릇은 소멸을 피했다.
수백 년간 그릇이 만들어 온 계획.
그 계획의 시작과 끝.
그 모든 인과율을 버려 버리며 ‘진유성이 소멸시키려는 대상’에서 교묘하게 벗어난 것이었다.
파르르르르륵!
물론 이와 동시에 그릇의 힘은 현저하게 약해졌고, 공간 전체를 구속하던 힘도 약해졌다.
내공, 의념, 선천진기, 입멸공의 통제권을 되찾은 진유성이 침착한 눈으로 그릇을 쳐다보았다.
만약 한 명의 인간이 100년 동안 많은 일을 하며 살아왔다고 했을 때.
그 인간의 100년간의 기록을 완전히 없애 버리면 어떻게 될까?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고, 그 무엇도 기록에 남지 않게.
아마 그 인간은 무의미한 존재가 될 것이었다.
그저 세상에 존재할 뿐이지, 그 존재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할 것이었다.
지금 눈앞의 그릇이 그러했다.
수백 년간 쌓아 온 모든 것을 버렸기 때문인지 하잘것없는 존재감을 뿜어낸다.
단번에 소멸시킬 수 있을 만큼.
[내가 졌다. 진유성.]
“이제 알았냐?”
[이렇게…… 끝나는군.]
그릇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실제로 육신을 움직여 주저앉은 건 아니었다.
놈은 육신도 없고, 형태도 없다.
단지 존재만 하니까.
[한때 신을 담았고, 세상을 담으려 했던 존재의 끝치고는 허망하군.]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릇은 미동도 없이 진유성에게 온전한 생사여탈권을 맡겼다.
비록 세상을 악으로 물들였지만, 태생답게 긍지 있는 끝을 맞이하려는 듯한 심상으로.
진유성이 검을 들었다.
그리고 그었다.
촤악!
하지만, 진유성이 벤 것은 그릇이 아니었다.
자신의 왼손바닥이었다.
선홍빛의 피가 흐르며 그릇이 존재하는 곳에 뚝뚝 떨어진다.
그 피를 바라보며 진유성이 입을 열었다.
“내가 모를 것 같았냐? 끝이 아니라는 걸?”
[……어찌 알았지?]
“네 진체는 의지이니까.”
놈은 신의 반쪽짜리 전능의 자아에서 비롯됐고, 전능이 떠나갔음에도 의지를 가졌다.
이는 놈이 힘을 갖거나 갖지 않는 것에 소멸이 결정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놈은 소멸하지 않는다.
그저 충실히 쌓아 온 인과율에서 떠날 뿐이다.
물론 지금 진유성이 놈을 베어 버리면 다시 세상을 악으로 물들이는 데 최소한 백 년, 어쩌면 수백 년의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하지만 진유성은 그것을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잠깐의 외면이다.
마음을 먹었으면 끝을 보는 것이 진유성이란 존재니까.
[그래서 어찌하겠다는 거지? 네놈은 날 죽일 수 없고, 나 역시 널 이기지 못했다.]
그릇이 말한다.
[우리의 싸움은 수백 년 뒤로 유예되었다. 네가 그때까지 죽지 않는다면 말이지.]
“글쎄?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릇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이 싸움은 자신의 패배지만, 진유성이 자신을 소멸시킬 방법은 없다.
그 순간이었다.
진유성이 흩뿌린 피가 그릇의 존재에 스며든다.
진유성의 과감한 결단에 그릇이 경악했다.
[진실로 오만하도다!]
하지만 그 경악은 당혹스러움이라기보다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내는 소리에 가까웠다.
그만큼 진유성의 선택이 말도 안 됐기 때문이었다.
지금 진유성은…….
그릇에게 흡수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유성이 죽음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죽음을 택했다면 영과 혼, 백과 육을 나눠서 흡수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진유성은 ‘온전한 자신’으로 그릇에게 흡수당하고 있었다.
이 말은 곧, 진유성이 그릇을 내부에서 깨트리겠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진유성이 ‘그릇은 자신을 온전히 담을 수 없다’고 확신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만이다.
그릇은 괜히 그릇이 아니다.
전능의 자아에서 시작해 수만 년을 살아오면서 자신이 담지 못한 것은 없었다.
[그렇군. 인간을 잠깐 즐겁게 해 주었지만 추락하기 때문에 네놈이 유성이구나.]
“후달리냐?”
[오냐! 내 너를 흡수하고 잃어버린 인과율을 다시 쌓아 세상을 삼키리라!]
지금 세상에는 패닉과 공포가 가득하다.
진유성이란 존재만 사라진다면 십 년이면 충분하다.
마음을 정한 그릇이 자신의 모든 것을 확장시켰다.
이윽고.
그릇이 진유성을 집어삼켰다.
* * *
장백산의 꼭대기에 신음하는 진유성이 있었다.
포도아문(관청)을 피하고, 현상금 사냥꾼들을 피하고, 산군(山君 : 호랑이)을 피했으나…….
나무뿌리는 피하지 못했다.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져 한바탕 구른 진유성은 발목이 퉁퉁 부은 채로 숨어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 두둥실 밝은 보름달이 비추었다.
본래 보름달이 뜨면 어마마마와 함께 산책을 나가거나, 형님이 몰래 가져온 부럼을 나눠 먹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죽었으니까.
고려의 왕자로 살아온 진유성은 욕을 알지 못했다.
그러니 주먹을 쥐고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나로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베겠다.”
* * *
[분노와 증오라. 아주 달콤한 순간이군.]
* * *
노예상에게 팔린 진유성은 마차에 가축처럼 실려 덜컹거리며 이동했다.
진유성을 ‘구매’한 이들은 진유성만 산 것이 아니었다.
마차에는 진유성과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들이 십수 명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란히 달리는 마차의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아이들 사이에는 괴소문이 돌았다.
마교에 팔려가 인신공양을 당할 것이라느니, 인육을 좋아하는 부자들의 식탁에 올라갈 것이라느니.
그날 밤.
공포를 이기지 못한 아이들이 탈출을 시도했다.
반면 진유성은 도주를 포기했다.
아이들에게 아무런 족쇄도 채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 저들은 그럴 필요가 없는 무공의 고수일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맞았다.
촤아악-!
도주하는 아이들을 모조리 베어 버린 이들 중 한 명이 무감각한 눈동자로 진유성을 쳐다보았다.
두려웠다.
* * *
[공포와 두려움이라. 익숙하다.]
* * *
대명제국의 여황제 주혜미는 아주 박색한 얼굴이었다.
몸도 빼빼 말라서 공주 시절에는 궁인들이 목내이 공주님이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진유성은 주혜미에게 자꾸 눈길이 갔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녀가 진달래꽃을 꺾어서 줬을 때였을까?
그도 아니면 자신을 훔쳐보는 눈길이 느껴져서 괜히 신경이 쓰였을 때였을까?
그러나…….
주혜미가 죽었다.
아무런 마음도 표현하지 못했는데 말이었다.
* * *
[설마 내가 사랑이나 거기서 오는 절망을 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느냐?]
* * *
그릇은 진유성의 모든 것을 담아냈다.
희로애락부터 설렘, 만족, 성취, 행복, 후회, 그리움, 괴로움, 외로움 등등…….
진유성이 품었던 모든 감정을 아주 쉽게 집어삼켰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공, 인과율, 무공 등등.
진유성이란 소우주의 근간이 되는 모든 것들 역시 그릇의 크기를 넘지 못했다.
그렇게 진유성을 진유성으로 만드는 모든 것이 흡수되기 시작했다.
진유성은 점점 의식을 잃어 갔다.
어쩌면 진유성의 판단이 틀렸는지도 몰랐다.
신의 반쪽을 담아냈고, 세상의 모든 악을 담아냈으며, 세상의 모든 혼란을 야기했던 그릇의 도량은 너무나 거대했다.
그릇의 안쪽에서부터 깨부수기는커녕, 그릇의 벽에도 닿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스라이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그릇의 조롱이 들려왔다.
[오만과 오판이 인세의 별을 유성으로 만드는구나!]
진유성은 그릇에게 닥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의식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끝이로다.]
그릇이 마침내 진유성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
그러나.
[아, 아니?]
그릇은 진유성의 단 한 조각을 담아낼 수가 없었다.
수만 년을 살아오면서 품어 본 적 없는 ‘--’였다.
아니, 느껴 본 적은 있을 것이나 이토록 거대하고 아득한 ‘--’는 본 적이 없었다.
그릇은 뒤늦게 깨달았다.
진유성이란 존재의 모든 것은 ‘--’ 위에 쓰여졌다는 것을.
자신은 진유성이란 집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지만, 집이 지어진 땅을 집어삼킬 수는 없었다는 걸.
쩌저저저적!
금이 가기 시작했다.
진유성은 실제로 들리는 소리인지, 환상 속의 소리인지 모르는 상태로 금이 번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사이로 위상의 수호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럼, 그대가 문을 닫을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
진유성은 자신의 ‘--’에 집중했다.
이제 아카샤의 말을 알겠다.
이것이 왜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는 열쇠가 되는지.
그릇이 끝내 집어삼키지 못한 ‘--’가 부쩍부쩍 크기를 키우더니, 역으로 그릇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 * *
“대주, 아니, 교주님.”
“왜?”
“대체 왜 정도맹주의 팔만 자른 겁니까?”
상림이 건들거리며 묻자, 신주청도 이쪽을 쳐다본다.
내심 궁금했던 모양이었었다.
“솔직히 그 새끼는 죽여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기회를 한 번 주지, 뭐.”
“무슨 기회요? 잡스런 계획을 꾸밀 기회?”
“야, 어차피 무림을 일통했는데 자꾸 사소한 거에 집착하지 마.”
“아니, 교주님이야말로 뭐에 집착해서 그 자식을 살려 준 건데요!”
결국 진유성이 입을 열었다.
“놈의 아들이…… 숨어서 보고 있더구나.”
“그게 뭐요?”
“차마 아들의 앞에서 아비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기회를 주는 거다. 놈이 정말로 속죄한다면 살려 줄 것이고, 잡스러운 계획을 꾸민다면 그때는 죽겠지.”
“아니, 이게 말이야, 똥이야?”
딱!
진유성의 검지가 상림의 이마를 후려쳤지만, 상림은 물러나지 않았다.
“아, 뭐! 왜 때려! 지 혼자 착한 사람 노릇은 다 하고 와 놓고서!”
결국 진유성도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순간이었다.
천여 명의 금군들이 말을 타고 달려오더니 진유성, 상림, 신주청을 비롯한 수백 명의 천마신교를 포위했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천마신교주 진유성은 황명에 의거한 오라를 받아라!”
그 순간, 진유성이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씰룩거렸다.
“황제는 별로 안 불쌍한데.”
* * *
검이 곧게 뻗어 나갔다.
빛처럼 뻗어 나간 진유성의 검이 미증유의 존재를 찌른 순간.
[이곳은 상실의 공간.]
[그대를 구성하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야만 통과할 수 있다.]
[하지만 그대의 무(武)는 규칙을 뛰어넘었기에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대는 ‘연민’의 9할을 잃고, ‘무’의 1할을 잃겠는가.]
[아니면 ‘무’의 9할을 잃고, ‘연민’의 1할을 잃겠는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진유성은 고민 없이 선택했다.
‘연민(憐愍)’을.
* * *
[아, 안 돼! 이대로 끝낼 순 없다!]
그릇은 떠들었지만.
고요하고, 고요하다.
그 고요함 속에서.
진유성은.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