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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302화 (302/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302화>

진유성의 말에 시종일관 조용하던 유혜연이 입을 열었다.

“유성아. 내가 물어봐도 될까?”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기도 힘든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유혜연은 의외로 굉장히 침착해 보였다.

진유성은 이제 유혜연이 화전민에서 만났던 여인의 환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저 침착함이 묘하게 과거의 기억을 자극했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칼 든 무사 수십 명이 하룻밤만 숨겨 달라고 부탁한다면, 아마 평범한 아낙네들의 반응은 보통 겁에 질리는 것일 터였다.

그러나 화전민의 여인은 달랐다.

그녀는 어린 여아의 손을 꼭 쥔 채로 물었었다.

“당신들은 왜 쫓기고 있나요?”

진유성은 피곤해서 죽어 버릴 것 같은 와중에도 그녀에게 자신들의 사연을 설명했다.

멸마대에 팔려 온 이들 중에는 사연이 없는 이들이 없었다.

마교주를 죽이기 위해 목숨도 도외시할 사생결단의 무인 집단인데 오죽할까.

진유성의 모든 이야기를 들은 여인은 말했었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적어도 오늘 하루는 안전하게 만들어드릴 수 있으니.”

그녀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하루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대신 여인과 그녀의 딸은 목숨을 잃었지만.

“유성아?”

과거의 상념에서 깨어난 진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세요.”

“다시 들어가겠다고 했는데, 대책은 있는 거니?”

“아뇨.”

“없다고?”

“네.”

“그럼 왜……?”

몇 가지 생각해 둔 것은 있다.

하지만 그것이 통할지, 통하지 않을지는 알 수 없다.

설령 통한다고 하더라도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진유성은 지금 게이트에 들어가야 한다고 판단했다.

“결심이란 마모되는 것이니까요.”

결심(決心)의 결(決)은 본디 제방이 무너져 물이 터져 흐르는 것을 의미한다.

쌓였던 둑이 터지면 처음의 물줄기는 노도와 같이 거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많은 지형들을 지나치면 결국 그 강렬했던 물줄기도 외딴 시골의 시냇물로 변하기 마련이다.

결심 역시 그러하다.

진유성은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인간의 감정 대부분은 쉽게 마모되는데, 그중 유독 쉽게 마모되는 것이 결심과 용기니까.

진유성은 세상의 멸망이 유예되는 시간 동안 힘을 회복할 수 있다.

어쩌면 그 회복량은 진유성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클 수도 있고.

하지만 그러한 힘의 회복보다 마모된 결심과 용기가 더욱 뼈아프다.

그러니 지금 당장.

게이트에 들어가야 한다.

온 육신과 영혼으로 상대에게 부딪칠 수 있을 때.

패배를 곱씹으며 열패감을 느끼기 전에.

진유성의 설명을 들은 유혜연이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진유성에게 다가와서 그를 꼭 껴안아 주었다.

“어렵거나 힘든 거 있으면 꼭 얘기하고. 알겠지?”

진유성이 피식 웃었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두 사람은 이와 똑같은 대화를 했었다.

“유성아.”

“네.”

“너무 늦게 온 거 아니니? 외숙모가 내내 걱정했잖아.”

“서울의 밤은 환하고 안전하니까요.”

“어렵거나 힘든 거 있으면 외숙모한테 얘기하고. 알겠지?”

“음, 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상림의 가족이란 인식이 강했던 이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이 되기 시작한 건.

진유성은 고개만 끄덕일 뿐, 더 이상 별다른 이야기를 하진 않았다.

앞으로도 그들이 대화할 시간은 많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단호한 결의로 게이트에 들어가는 것이니.

진유성이 상림에게 고개를 돌렸다.

“주청이가 일어나면 전해라.”

“뭐라고요?”

“모든 일이 다 끝나면 한판 뜨자고. 그때까지 여길 지키고 있으라고.”

진유성과 신주청이 진심으로 우정을 다지게 된 것은 해남의 이름 모를 섬에서 싸움을 벌인 뒤였다.

그러니 모든 일이 끝나면 다시 한번 싸우고 싶었다.

상림의 가슴 속에 다시 한번 뜨거운 불꽃이 생긴 것처럼.

어쩌면 진유성과 신주청 사이에도 다시 싹이 자라날 수도 있으니.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끝낸 진유성이 타트바를 쳐다보자, 최유리의 몸속에 있는 타트바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갈 건가요? 당신이 이 세상의 마지막 희망인데도?”

“궁금한 게 있다. 주청이가 놔뒀던 검은 구슬은 무엇이냐?”

신주청을 찾아갔던 CSG에서 그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시신들을 보았다.

그 시신을 태우는 순간 검은색 사리들이 나왔고, 그것을 쥐자 화전민 모녀의 시신 앞에서 다짐한 것이 떠올랐었다.

“당신의 신성에는 신주청의 지분도 있으니까요. 그게 변화에 할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가 알 수 있도록 파동을 조정한 것뿐입니다.”

“아카샤의 도움으로?”

“네.”

“그럼 주청이가 아카샤의 사도인 것이냐?”

“비슷해요. 그는 오래 전부터 마도사가 이 모든 사태의 끝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 이유는…….”

“그리 대단하지 없으니까.”

“……맞아요.”

타트바는 수백 년 동안 세상 뒤에서 암약해 온 마도사들을 대단치 않다고 표현하는 진유성에게 감탄했다.

진유성뿐만이 아니다.

중원의 무를 갈고닦아 ‘벽’이라 부르는 인외의 경지에 넘어선 신주청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우스운 일이다.

지구의 희망을 중원의 무인들이 만들어 냈다는 것을.

하지만 아카샤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릇을 추적하며 아카식 레코드의 압박을 가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벽을 넘었다고 한들, 신주청이 버텨 낸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는 마도사들보다 큰 존재를 찾아 나섰고, 아카샤와 접촉하게 된 것이죠.”

“그랬군. 신주청다운 일이다.”

“그는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어요. 차라리 그가 힘을 회복한 뒤 함께 싸우는 건 어떤가요?”

“지금 이 순간은 변수가 없는 전장이다. 모든 악의가 드러났으며, 모든 계획이 드러났다.”

전장에서 패배하는 요인은 무력보다는 변수일 때가 더 많다.

“지금 이 순간이 최고이자 최선의 전장이다.”

“…….”

“날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카샤의 무능을 인정하는 것이냐?”

“그건……!”

“화신이라면서 나보다 아카샤를 더 모르는군.”

“네?”

“어쩌면 아카샤는 여기까지 봤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무슨 뜻이죠?”

“네 입으로 말한 적이 있지 않았느냐. 안배라고.”

* * *

[그리고…… 몇 가지 안배를 했습니다. 저조차 읽을 수 없는 미래이긴 하지만요.]

“안배? 무슨 안배?”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안배란 의식하는 순간, 제 자리에서 이탈하는 놈이니까요.]

“뭐, 그래라.”

진유성이 어깨를 으쓱하자 타트바가 말했다.

[한 가지 힌트를 드리자면, 당신이 게이트에서 얻은 걸 너무 무시하지 마세요.]

* * *

“안배…….”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타트바는 단순한 메신저였을 뿐, 그 내용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야, 그럼 너 아는 척한 거냐? 내용도 모르는데?”

“그 시점의 저는 알고 있었을 겁니다. 아카식 레코드 안에서는 아카샤와의 동조율의 최고조에 이르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반쪽짜리 화신일 뿐이죠.”

“흠.”

“사실 제가 화신으로 나타난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뭔데?”

“저를 죽이고 인과율을 획득하는 것.”

“뭐?”

“저를 죽여서 신을 죽였다는 인과율을 획득하면 조금이라도…….”

가당치도 않은 소리다.

설령 그렇게 해서 이득을 본다고 해도, 진유성의 소우주가 어긋날 것이다.

그의 소우주는 아주 오랫동안 축적된 것이며, 단 한 번도 신념에 반하는 일을 한 적이 없다.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날 감싸고 있는 기운이나 치워라.”

진유성의 몸에는 여전히 푸른색의 기운이 미미하게 맴돌고 있었다.

이는 그가 게이트 밖을 돌아다닐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안전장치다.

타트바는 한참 주저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힘을 제거하려는데, 상소윤이 빽 소리를 질렀다.

“야!”

“왜 그러느냐?”

“갈 거면 옷이라도 갈아입고 가!”

상소윤의 외침에 진유성이 너덜너덜해진 자신의 옷을 보다가 실소했다.

그래, 상소윤의 말이 맞다.

기왕 모든 것의 끝을 보려고 한다면 깨끗하게 입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

“따라와.”

상소윤이 먼저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올라서자, 진유성이 뒤를 따랐다.

그들의 집은 반파가 됐지만, 엉망이 된 것은 1층의 현관 쪽이었고 2층은 의외로 대부분 멀쩡했다.

1층이 저 정도로 무너졌는데 2층이 이 정도로 멀쩡한 것도 신기하다.

아무래도 상림이 직접 살 곳이라고 열심히 지어 놓은 것 같았다.

상소윤은 계단을 오르며 아무 말도 없었다.

진유성은 그런 상소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 자신의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상소윤이 그때의 그 꼬맹이라니.

생각해 보면 단서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놀이공원에서 상소윤은 화전민 소녀와 똑같이 말했었다.

“내가 기억해 줄게. 죽기 전까지는.”

또한 자신이 짊어진 업을 보았으며.

“상소윤.”

“어? 어, 어. 왜?”

“뭘 보고 공감한 것이냐?”

“어, 그냥 광신도 같은 사람들이 널 둘러싼…….”

“환상?”

“비슷했던 거 같은데…….”

유혜연과 함께 벌모세수를 해 줄 때도 아무런 반발력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이 품고 있는 소우주가 상소윤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늦게 알아차려서 아쉽진 않았다.

진유성은 믿고 있었다.

분명 이 모든 일이 끝나면 지금까지 겪은 것보다 더 긴 시간이 그들 앞에 놓일 것이라는 걸.

그때 진유성의 방에 도착한 상소윤이 뒤를 돌아보았다.

“야.”

“왜 그러느냐?”

“너 그거 할 수 있다고 했지. 기운으로 소리 막는 거.”

“가능하다.”

“해 봐.”

진유성이 어깨를 으쓱하며 내공을 운용했다.

이제 상림은 물론이고 타트바도 아무런 소리를 들을 수 없다.

“했어?”

“했다.”

“그, 무슨 옷 입고 갈래?”

“글쎄. 무슨 옷이 좋을 것 같으냐?”

“교복 어때?”

“나쁘지 않군.”

“……난 농담으로 말한 건데.”

“아니, 마음에 든다.”

학교를 다니며 참 즐거웠었다.

어쩌면 성좌와 자신을 구분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경험은 대정고일지도 모른다.

원래는 지금쯤 수능을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대정고 친구들이 떠올랐다.

“대정고의 친구들은 다들 압구정에 있는 게 맞느냐?”

“몰라.”

“뭘 모르느냐. 어제도…….”

진유성이 말을 멈췄다.

상소윤이, 자신의 손을 잡은 채 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물을 흘리진 않았으나, 그 떨림 속에서는 불안함과 두려움이 느껴졌다.

“진짜…… 갈 거야?”

“가야 한다.”

“죽으면, 어떡해.”

“그럴 일 없다. 난 절대 죽지 않는다.”

“한 번 졌다며…….”

“멸마대에 있을 때, 거기 있던 모든 교관들은 훈련 때 날 이겼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날 죽이지 못했었다.”

“진짜?”

“그러하다. 상림에게 물어봐도 좋다.”

“죽으면…… 어떡할 건데.”

“내가 죽는다면 네가 하는 말은 전부 들어주마.”

죽으면 당연히 상소윤의 말을 들어줄 수 없다.

그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논리의 시간이 아니었다.

감정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 속에서 상소윤이 진유성의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놀이공원에서 말했었지. 내가 기억해 준다고. 죽기 전까지.”

“그래.”

“거짓말이었어.”

“진실을 말해 보거라.”

“네가 날 기억해야해. 죽기 전까지, 영원히.”

“영원이란 모든 순간이 합쳐져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기억해.”

진유성은 지금껏 타인에게 자신의 간격을 침범당한 적이 없었다.

성좌에게 패배할 때조차 간격은 침범당하지 않았다.

무공은 앞섰으나, 힘이 부족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지금.

진유성은 자신의 간격을 내주었고, 그것을 침범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자신의 볼을 매만지는 상소윤의 손이 부드러웠으며, 입술에 닿은 것이 너무나 부드러웠다.

짧은 입맞춤 뒤로 부끄러워하는 상소윤을 본 진유성이 말했다.

“나는 본디 마음 수양이 깊어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지 않는다.”

“뭐?”

“박색한 얼굴이나, 마음씨가 고우니 윤허해 주마.”

“뭐, 뭐라는 거야, 이 미친놈이? 이건 그냥, 그, 행운을 빌어 주는 거거든? 행운의 여신!”

“행운의 여신이 지나치게 박색하구나.”

“야!”

진유성은 상소윤과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대화를 나누고는 교복을 입었다.

그리고는 1층으로 내려왔다.

세상이 멸망하는데도 아버지는 아버지인가 보다.

“음파 차단하신 겁니까? 뭐 하셨어요?”

상림이 눈을 가늘게 뜨고 진유성과 상소윤을 쳐다본다.

“아, 뭐 할 얘기가 있어서.”

상소윤이 당황한 티를 안 내려 노력하며 말을 둘러댔다.

하지만, 진유성은 거짓말을 싫어한다.

“아무래도 상소윤이 날 사모하는 것 같다.”

“야!”

“아무래도 나도 그런 것 같다.”

“……!”

“……!”

상림과 유혜연이 서로 다른 감정으로 놀랐고, 상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 눈에 흙이……!”

허공섭물의 수법으로 날아온 흙이 상림의 눈에 들어갔다.

“아, 따가!

역시 내 눈에 뭘 넣을 수 있는 교주님이었다.

간단히 상림을 제압한 진유성이 타트바를 돌아보았다.

“열어라.”

타트바가 한숨과 함께 손을 휘두르자, 진유성의 몸을 은은히 뒤덮고 있던 푸른색의 기운이 사라졌다.

진유성이 고개를 돌려 상소윤과 유혜연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시선이 스쳐 지나가자, 진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설마 제 발로 돌아온 것이냐?]

진유성과 성좌가 다시 한번 서로를 마주했다.

보다 진득한 살의(殺意)를 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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