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301화>
* * *
진유성은 꿈속에 있었다.
상단전이 개방된 그는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었지만, 평소 꾸던 자각몽과는 미묘하게 다른 것 같았다.
내 꿈속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타인의 꿈속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 위상의 수호자가 나타났다.
진유성은 그 존재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위상의 수호자는 뭘까?
그동안 전지전능한 존재가 두 차원 위상의 다름을 지키기 위해 만든 문지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정말로 전지전능한 존재가 위상의 다름을 지키기 위해 만든 존재라면 훨씬 강해야 하지 않을까?
전능의 존재가 상실의 공간을 넘어설 것을 대비해서 말이었다.
게다가.
[통과하라.]
[그대는 자신을 온전히 보존한 최초의 통과자이다.]
어째서 자신이 최초의 통과자가 되는 것일까.
분명 전능의 존재가 진유성 이전에 위상의 수호자를 이겨 내고 통과했는데 말이었다.
진유성의 의문과 별개로 위상의 수호자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대가 품은 삼라만상(參羅萬像)은 너무나 거대하고 깊어 나조차 뚫어 볼 수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언젠간 그대의 앞에 전지와 전능을 동시에 품은 존재가 나타날 것이라는 점이다.]
수호자의 말이 맞다.
진유성 앞에 그릇이 나타났다.
그릇은 해남의 이름 모를 섬에서 진유성이 두고 간 전능의 힘을 흡수했고, 오랜 시간 쳐 놓은 덫으로 전지의 힘을 품은 타트바를 흡수했다.
진유성이 알아차리고 막아 내긴 했지만, 타트바의 절반을 흡수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진유성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그릇이 아니었다.
그릇 이전에 성좌가 문제가 된다.
[그대는 잊지 말아라. 무의 9할을 포기하고 ‘--’의 9할을 지킨 그대의 마음을.]
[그 마음에 답이 있을 것이니.]
[그대는 신성을 잃었지만, 신성은 잃는 것이 아니니.]
성좌는 ‘--’를 없애기 위해서 꾸준히 상실의 공간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의 힘은 줄지 않았다.
계속해서 무의 1할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계속해서 힘을 키워 온 탓이었다.
이는 전능의 존재가 자아의 9할과 전능의 1할만을 품고 지구로 건너왔지만, 힘을 회복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진유성도 마찬가지였다.
진유성은 자신에게 시간이 주어진다면 성좌를 이겨 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잃어버린 것에 대해 너무 늦게 알았다.
모든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어 시간이 촉박했다.
이윽고, 진유성이 기억하고 있던 마지막 말이 들려왔다.
[그럼, 그대가 문을 닫을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
문이란 뭘까.
처음엔 게이트를 의미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젠 게이트를 닫는다고 해도 큰 의미가 없다.
압구정을 제외한 온 세상이 게이트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진유성이 눈을 크게 떴다.
기억하지 못했던, 위상의 수호자가 남겼던 마지막 말을 들으면서.
[집의 완성은 문을 닫으며 끝나는 법이니.]
흔히 한 분야의 정점에 오른 사람을 두고 일가(一家)를 이뤘다고 말한다.
그리고 진유성은 그 누구보다 크고 거대한 집을 지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집이 정말 집으로써 완성되기 위해서는 문이 닫혀야 한다.
그렇다면 위상의 수호자가 언급했던 ‘문’은 게이트가 아니었던 걸까?
어쩌면 그건…….
그 순간, 진유성은 꿈에서 깨어났다.
* * *
진유성은 익숙한 풍경 속에서 눈을 떴다.
“객잔이 참으로 화려하고 넓구나.”
처음 지구에 건너와 마주했던 곳.
서울역이었다.
지구 전체가 게이트로 바뀌었으니, 서울역도 회백색의 뿌연 기운에 뒤덮여 있었다.
한데, 진유성의 몸에 맴도는 푸른색의 기운이 회백색을 밀어낸다.
즉, 세상 전체는 게이트로 바뀌었음에도 진유성은 게이트 안이 아닌 밖에 있었다.
아무래도 성좌에게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자신을 구해 준 이의 가호인 것 같았다.
아마 타트바겠지.
‘타트바는 어디 있지?’
진유성은 그런 생각을 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단 한 명의 사람도 보이지 않는 서울역이 묘한 감상을 주었다.
서울역은 그와 인연이 깊다.
지구에 와서 처음 도착한 곳이며, 처음으로 게이트에 들어간 곳이다.
여기서 마도사와 처음으로 조우했으며, 이제는 성좌가 뿌리내리고 있다.
성좌의 첫 등장이 서울역 게이트였으니 말이었다.
그때, 진유성은 강렬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기시감 속에서 기운을 느꼈다.
진유성이 기운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기운은 서울역 곳곳에 배치된 사물함 속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사물함은 사람이 들어가기엔 너무 좁은 곳이지만, 그 안에서는 정말이지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다.
진유성은 돌발 사태에 대비하며 사물함을 열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특별한 무언가가 들어 있지도 않았다.
그 안에는 한 장의 종이가 들어 있었다.
종이를 집어 드는 순간,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진유성은 이해할 수 없는 일 속에서 천천히 종이에 적힌 글을 읽었다.
[낮은 곳에서 낮은 곳을 보면 연명(延命)이지만,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을 보면 생존(生存)이다.]
“…….”
진유성은 이 말을 알고 있었다.
이건 자신이 멸마대에서 도망친 생존대원들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근근이 목숨을 이어 가는 연명에 뜻을 두지 말고, 삶을 자존하자는 말.
진유성은 스스로의 뜻을 지켰다.
단지 살아가는 데서 끝내는 게 아니라, 정도맹을 이겨 내고 마침내 중원을 일통했으니까.
하지만 대체 이 말을 누가 적어 놓았단 말인가?
지구에서 이 말을 아는 사람은 두 명.
성좌와 상림.
그러나 성좌가 적어 놓을 이유는 없고, 상림 역시 아니다.
상림은 이 글을 쓸 수가 없다.
워낙 오랜 시간이 지나서 중원어를 대부분 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서울역 사물함 안에 들어 있던 종이에 적힌 글귀는 중원어로 적혀 있었다.
필적을 확인할 수 없게 왼손으로 쓴 것처럼 어딘지 삐뚤삐뚤하지만.
“…….”
진유성이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피시시시싯-
풍선이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회백색의 공간이 뒤틀리며 한 명의 여자가 튀어나왔다.
품고 있는 기운을 보건대, 타트바였다.
하지만 진유성은 당황했다.
“그 몸에 왜?”
타트바가 강신한 이가, 대정고의 역도 선수였다가 지금은 53KG급 국가 대표가 된 최유리였기 때문이다.
진유성은 얼마 전 영월 인터내셔널에서 최유리를 만났었다.
거기서 압구정으로 부모님과 함께 오라고 했지만, 압구정에서는 그녀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종종 걱정을 했었는데, 왜 타트바가 최유리의 몸에 들어가 있단 말인가?
최유리의 몸을 뒤집어쓴 타트바가 답했다.
“역시 이 인간과 인연이 있나요?”
“역시?”
“아주 느린 방법이지만, 정직하게 기운을 다루는 훈련을 한 흔적이 있더군요. 당신이 가르쳐 준 건가요?”
* * *
“한 번 더.”
진유성의 요구에 최유리가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호흡이 남는군.’
인간의 호흡에는 기운이 있다.
기운이란 단어에는 많은 뜻이 있지만, 상승 무리에서는 호흡을 운행함을 뜻했다.
말은 복잡하게 했지만 최유리에게 무공을 전수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무공을 전수하는 순간 최유리가 그동안 갈고닦아 온 꿈과 목표는 허망한 것이 된다.
진유성이 알려 줄 것은 호흡을 쓰는 방법이었다.
“숨을 반만 쉬고 들어봐.”
“반만 쉬라는 게 무슨 말이야?”
“호흡의 양을 줄여 보라고.”
“음…….”
잠시 고민하던 최유리가 숨을 짧게 들이키고는 역기를 들으려 하자, 진유성이 만류했다.
“숨을 쉬다 마는 게 아니라, 절반의 숨을 깊게 들이키는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들이키는 양에 집중해 봐. 할 수 있어.”
* * *
진유성이 최유리에게 가르쳐 준 것은 무공은 아니다.
하지만 올바르게 호흡을 운행하는 법이고, 이 같은 일을 백 년 정도 반복한다면 무공에 대해 깨우칠 수도 있긴 하다.
하지만 사람이 백 년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저 도인들의 건강 호흡법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최유리는 진유성의 생각보다 훨씬 열심히 호흡을 했고,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군. 그 몸에 들어갔군.”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아멜라 메건보다 맑은 선천진기를 가지고 있으며, 미미하지만 기운을 다룬 흔적까지 있으니.
“그 몸에서 빠져나올 때, 원주인은 어떻게 되지?”
“……알 수 없습니다.”
타트바는 명확히 대답하지 않았지만, 진유성은 더는 추궁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온몸의 상처가 아물어 있고, 기력이 돌아와 있다.
시계를 보니 압구정에 있던 자신이 게이트로 들어온 지 3시간이 지났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집에 남았던 그릇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 확인해야 한다.
“압구정으로 가야겠다.”
“마스터 플레이어의 자격으로 이동하는 건 위험합니다. 아카샤께서 안정시켜 놓은 영역이 침범당할 수도 있어요.”
타트바의 조언을 수용한 진유성은 즉시 진기를 일으켜 경공으로 내달렸다.
뒤를 힐끔 돌아보니 타트바는 공간을 접는 기이한 방법으로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축지법이란 게 실존한다면 아마 저런 느낌일 것 같다.
타트바가 잘 따라온다는 것을 확인한 진유성은 속력을 냈다.
이윽고 그가 빛살처럼 빨라져서 압구정으로 내달렸다.
타트바가 점점 뒤처지지만, 어차피 목적지를 알고 있으니 상관없었다.
마음이 초조하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없는 서울을 내달려 압구정에 도착하는 데는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압구정에서 진유성은 반파된 자신의 집을 마주했다.
2층짜리 전원주택이 절반 정도 무너져 있었고, 무너진 집의 잔해가 정원에 널려 있었다.
‘설마…….’
하지만 다행히 불안한 예감은 틀렸다.
속도를 줄인 진유성은 기감을 확장하는 순간 익숙한 다섯 명의 기감을 느낄 수 있었다.
상림, 유혜연, 상소윤, 상도윤.
그리고 한 명은.
‘신주청!’
잠깐 놀랐지만, 뭔가 이상하다.
신주청은 죽어 가고 있었다.
진유성은 다시 속력을 내서 집에 도착했다.
“교주님!”
“진유성!”
상림과 상소윤이 진유성을 발견하자마자 뛰쳐나왔다.
그러다가 상소윤이 흠칫 놀랐다.
“너, 가슴에…….”
성좌의 검에 베여 걸레짝이 된 진유성의 옷 사이로 거대한 상흔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심장 바로 아래에서 옆구리까지 찢고 나온 흉터는 얼핏 보기에도 끔찍해 보였다.
“괜찮다. 다 나은 것이다.”
“나은 게 문제가 아니라!”
“시끄럽다. 말만 한 계집아이가 세상이 요란해도 방정맞구나.”
“야!”
진유성이 상림에게 물었다.
“신주청이 왜 여기 있느냐?”
신주청은 정신을 잃은 상태로 곱게 눕혀져 있었는데, 딱 봐도 기식이 엄엄했다.
호흡과 기운이 끊어지기 직전이다.
대답은 뒤늦게 도착한 최유리에게서 나왔다.
“그는 아카샤와 접촉해 모든 진실을 알고 있었어요.”
“주청이 형님은 가짜 깃발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땅에 묻어 둔 진짜 깃발을 꺼내 들었습니다.”
진유성은 단박에 상림의 말을 이해했다.
자신에 대한 신주청의 살의와 분노는 진심이었으나, 그는 대의를 택한 것이었다.
“그랬군…….”
“아멜라 메건과 수천 초를 겨루었습니다. 그러다가 놈이 물러나더군요. 주청이 형님은 놈이 확실히 물러난 뒤 이 상태가 됐고요.”
“제가 강림한 시점에서 물러난 것 같군요.”
“아놀드 벡은?”
“심장이 멈췄었는데, 놈이 사라지자 호흡을 되찾았습니다. 한데 너무 오랫동안 심장이 멈춰 있어서…….”
“그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최유리가 나서자, 상소윤이 진유성에게 한 걸음 다가와 속삭였다.
“최유리 아니야?”
“최유리의 몸속에 화신이 강림했다.”
“그, 아까 아멜라 메건의 몸으로 들어가려던?”
“그래.”
호기심을 푼 상소윤이 묘한 눈으로 최유리를 쳐다보더니 뒤로 물러났다.
최유리가 아놀드 벡의 호흡을 진정시키고 돌아오자, 상림이 물었다.
“교주님, 게이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진유성은 짤막하게 게이트 안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이제 모두의 시선이 진유성에게 쏠렸다.
압구정을 제외한 세계가 멸망했다.
신주청은 아멜라 메건을 막아 냈으나 상태가 좋지 않고, 진유성은 성좌에게 패배했다.
그릇은 잠시 후퇴하였으나, 시간은 놈의 편이다.
대체 이 상황에서 진유성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때, 진유성이 입을 열었다.
“타트바.”
“네.”
“압구정을 지켜라. 그릇에게서.”
“당신이 성좌를 이겨 낼 힘을 키울 시간 동안 말인가요? 힘을 키울 방법은 있나요?”
진유성이 고개를 젓는다.
“난 게이트에 들어갈 것이다.”
“설마 지금 말인가요?”
“그래, 지금 당장.”
“말도 안 돼요!”
기겁한 타트바가 만류했다.
“당신은 불과 몇 분 전에 죽음을 맞이할 뻔했어요. 아무런 준비도 없이 다시 들어갔다가는 똑같은 결과를 맞이할 뿐이라고요.”
“내가 하이난에서 말했지? 하수가 고수한테 까불지 말라고.”
진유성이 세상을 뒤덮은 회백색의 반구체를 쳐다보며 말했다.
“문을 열어라, 타트바. 게이트에 들어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