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300화>
* * *
상림은 자신이 아멜라 메건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고 생각했다.
놈의 손을 피할 길이 없었으니, 머리가 산산조각 날 수밖에 없다.
찰나의 순간에, 꿈을 꾸었다.
신주청이 등장하는 꿈이었다.
“정말 그걸로 끝내실 겁니까?”
“그럼 어떻게 하라고?”
“뭘 어떡해요? 일단 가주 놈의 팔을 하나 자르고, 이복형들의 단전을 부숴 버려야죠. 당연한 거 아닙니까?”
“뭐가 당연해?”
“은혜도 복수도 열 배로 갚는 거요.”
이게 언제였더라.
아마 천마신교가 정도맹과의 첫 번째 전면전을 승리로 거둔 뒤였던 것 같다.
진유성은 정도맹의 패잔병들이 보는 앞에서 천마신교 개교(開敎)를 선포하며 잔치를 벌였다.
거기서 술을 거나하게 마신 상림과 신주청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복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신주청은 하남의 명문세가인 하남신가의 사생아였다.
어릴 적부터 계모와 배다른 형제들의 모멸과 멸시는 기본이고, 때때론 폭력에 노출되며 자랐다.
신주청이 멸마대에 자원한 것도 살기 위해서였고.
그러니 상림은 이해할 수 없었다.
신주청이, 정도맹과의 전쟁을 이기면 하남신가로 진군해서 복수하자는 자신의 말에 고개를 젓는 이유를.
신주청은 복수 대신 하남신가의 율법(律法) 수정을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생아들이 차별받지 않도록.
“아니, 형님. 그딴 율법 나부랭이 사람들이 안 보는 데서 개무시하지 않겠어요?”
“명문세가들은 자존심이 어마어마해서 율법을 그리 쉽게 어기지 않아. 율법을 어기면 가문의 역사를 부정하는 셈이거든.”
“가주와 형제들이 증오스럽지 않습니까?”
“증오스럽다.”
“아오, 답답하네. 그럼 제가 대신 신가 놈들 팔이라도 자를까요?”
“됐다.”
“아니, 그럼 이유라도 들읍시다. 왜 그래요?”
“우리는 은인의 시신 앞에서 다짐하지 않았더냐. 사람이 적어도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자고.”
“그거랑 복수랑 무슨 상관인데요.”
“내가 하남신가에 복수를 하면 세상의 무수한 사생아들은 알게 모르게 박해를 받을 거다. 더 심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고. 나 같은 이가 다시는 탄생하지 않도록.”
“…….”
상림은 놀랐다.
그 역시 화전민 모녀의 시신 앞에서 굳은 다짐을 했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 다짐을 나 자신의 영달보다 우선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신주청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에이, 씨바. 몰라. 술이나 마십시다.”
상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술병을 들이미는 순간.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LF 사옥의 지하 주차장이었다.
묘하게 이목구비가 달라진 신주청이 서 있었다.
입이 저절로 열린다.
“정말 전 인류를 죽여서라도 취해야 할 것이 있습니까?”
신주청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묘한 표정으로 상림을 쳐다보다가 엉뚱한 말을 꺼냈을 뿐이었다.
“난 왕후가 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저도 마찬가집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의 이전 세계에서 인간들의 황제와도 같았고, 그 황제는 이제 지구로 넘어왔다.”
신주청이 선언했다.
“난 그 황제를 폐위시키고, 내가 그 자리에 오를 것이다.”
“…….”
상림은 궁금했다.
신주청이 정말 진유성을 뛰어넘는다면.
그가 인간들의 황제가 된다면.
그는 성군(聖君)인가?
아니면 폭군(暴君)인가?
그의 의도는 무엇인가.
“흐억!”
그때, 다시 꿈이 바뀌며 상림은 거친 호흡과 함께 눈을 떴다.
“잘 버텼다. 상림.”
아니, 꿈이 아니었다.
여긴 현실이었다.
아멜라 메건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려는 순간, 신주청이 나타나 그를 구해 준 것이었다.
말로 설명할 순 없지만, 상림은 일순간 신주청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가 진유성에 대한 존경 대신 증오를 품었다고 하더라도.
진유성의 자리를 탐내서 인간들의 황제가 된다고 하더라도.
신주청은 신주청이다.
사생아들을 위해서 자신의 증오를 묵묵히 삭이던 신주청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진유성을 증오한다.
그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화전민 모녀의 시신 앞에서 품었던 다짐을 가지고 있다.
“형님!”
“뒤로 물러나서 행공해라.”
행공이란 천천히 움직이면서 운기조식을 하는 행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지만 안전하지 않을 때 하는 행위였다.
상림은 그제야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아멜라 메건의 경력이 머리를 부수기 직전까지 와서 그런지, 기경팔맥이 가닥가닥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상림은 가족들을 데리고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아멜라 메건은 신주청을 경계하는지, 혹은 어차피 다 잡은 사냥감이라고 생각하는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그녀가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넌 누구지?”
“글쎄? 내가 누군지 모르나?”
“아니, 알고 있다. 로스차일드와 손을 잡았던 중원의 무인. 월성.”
그릇은 신주청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마도사들의 둘째와 셋째는 첫째의 피조물에 불과하다.
그리고 마도사들의 첫째는 자신이 빚어낸 피조물에 불과하다.
그러니 로스차일드가 첫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중원의 무인과 격을 섞었다고 한들, 그릇에게 의미 있는 일은 아니었다.
과정은 조금 달랐지만, 로스차일드는 그녀의 계획대로 소멸했다.
어차피 마도사들은 애초부터 아카식 레코드를 떠받칠 수 없었다.
그저 그런 욕망을 품도록 조종당했을 뿐이다.
그러니 로스차일드의 옆에 붙어 있던 ‘조금 강한’ 인간이 나타나든 말든 그릇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문제는, 월성이 순간적으로 자신의 포식을 막아 냈다는 것이었다.
그릇은 상림을 죽임과 동시에 상소윤과 유혜연에게서 인(因)을 집어삼키려고 했었다.
그릇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릇은 인과율의 제약을 제외하면 그 어떤 제약에서도 자유롭다.
그러니 진유성을 제외하면 자신을 위협할 존재는 없어야 함이 마땅하다.
그릇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넘실거리는 기운 때문에 뒤늦게 알아차렸다.
놈에게서 아카샤의 냄새가 난다.
“네놈, 아카샤의 사도로구나.”
“난 아카샤의 명령을 받지 않는다. 아카샤가 나에게 협조를 구한 것이지.”
“물러나라, 인간이여. 너는 본디 마도사들과 함께 세상을 몰락시키려던 쪽이 아니었던가? 내 세상의 종말 이후 너에게 유일한 삶을 허락하겠노라.”
“협상은 힘을 겨뤄 본 뒤 하는 것이다. 보통 겨루기도 전에 협상안을 내미는 쪽은 겁먹은 쪽이지.”
신주청의 말이 끝나는 순간, 먼저 움직인 쪽은 아멜라 메건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노리는 것은 신주청이 아니었다.
상림의 뒤에서 잔뜩 겁을 먹은 유혜연과 상소윤을 노렸다.
그릇은 모든 것을 담을 수 있기에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릇에게 호승심이나 비겁함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 굳이 월성과 싸울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프스스스스-
아멜라 메건의 손에서 회색의 실이 흘러나오더니 유혜연과 상소윤을 향해 쏘아졌다.
그러나 이 실은 피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추상의 세계에서 원인을 흡수해 결과를 집어삼키는 포식 능력이다.
이 실을 볼 수 있는 존재는 그릇이 집어삼키려는 인과율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존재뿐이었다.
진유성은 이곳에 없고, 두 여인은 힘을 갖지 못한 양민일 뿐이다.
자신을 막을 존재는 없다.
마침내 회색의 실이 상소윤과 유혜연의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
놀라운 일이 펼쳐졌다.
파르르르륵!
강한 바람에 연줄이 풀리는 소리가 나더니, 아멜라 메건의 손에서 흘러나온 실이 사라진 것이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농락하는 그릇조차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아무리 월성이 아카샤의 가호를 두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과의 개념에는 간섭할 수가 없다.
간섭할 수 있는 경우는 딱 하나뿐.
“네놈! 매체였구나!”
불교에서는 인과를 업인업과(業因業果)라고 부른다.
업으로 인해 시작되어, 업으로 인해 결과를 맺는다는 뜻이다.
사실 원인이 있다고 바로 결과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 안에는 과정이 있고, 불교에서 말하는 업이란 인과 과를 결속시키는 매체를 의미했다.
진유성이라고 어찌 매 순간 굳은 의지를 품었겠는가.
그 역시 희로애락을 느끼는 인간인데.
그때마다.
“주청아. 나 너무 힘들다.”
“교주님이 견디지 못하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때론 위로했고.
“씨발, 그 개새끼들! 다 죽여 버릴 거야!”
“진 대주!”
때론 일갈했으며.
“중원을 경영하려는 내 의지가 영원히 이어질 수 있을까?”
“영원이란 순간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때론 조언했다.
화전민 모녀의 죽음으로 시작해 진유성의 의지가 이룩한 신성.
그 모든 순간에 신주청이 있었다.
그 과정에 신주청이 없었다면 원인과 결과의 모습은 분명 달랐을 것이었다.
“네놈은 진유성을 죽이고 싶어 하지 않았나?”
“난 미혹된 것을 좇느라 대의를 놓치는 사람이 아니다.”
신주청은 여전히 진유성을 증오한다.
하지만 그는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존재를 막기 위해 진유성과 손을 잡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일부러 진유성을 적대했다.
세상 그 누구도 모르게 종말을 준비하는 이가 있다면, 그 존재조차 모르는 존재도 있어야 한다.
나무는 숲에 숨겨야 한다.
신주청이 세쌍둥이 마도사라는 거악의 뒤에 숨어 있었던 이유였다.
“가짜 깃발……!”
상림의 목소리에 신주청이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맞다.”
멸마대의 훈련 과제.
깃발 뺏기 경쟁.
멸마대원들을 갑, 을, 병으로 나누고 가장 많은 깃발을 빼앗는 쪽이 승리하는 규칙.
갑의 조장은 신주청이었고, 을의 조장은 상림이었고, 병의 조장은 진유성이었다.
진유성을 이기고 싶었던 상림과 신주청은 은근한 동맹을 맺었다.
한데, 그들은 졌다.
진유성은 임무가 시작되는 순간 진짜 깃발을 모조리 땅에 묻어 버린 다음 가짜 깃발을 만들었다.
진유성의 전략은 멸마대의 교육관들 사이에서도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본인 변론을 위해 불려간 진유성은 교육관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그럼 적이 가짜 정보를 흘렸을 때, 규칙에 어긋난다고 따져야 합니까?”
진유성이 만들었던 가짜 깃발.
지금 신주청은 그것을 흔들고 있었다.
상림은 펄럭이는 깃발을 곧게 세운 신주청이 아멜라 메건을 겨누는 것을 느꼈다.
신주청은 신성을 품지 못했지만, 벽을 넘은 무인이었다.
“너를 이길 수 없더라도. 왕후가 돌아올 때까지는 버틸 수 있겠지.”
아마 저 깃발을 힘차게 펄럭이는 바람은 신주청의 정의(情義)일 것이었다.
꽈앙!
바닥을 부술 듯이 박찬 신주청의 뛰쳐나가며 싸움이 시작되었다.
온 세상을 속이고 종말을 준비한 존재와 그 존재를 속이고 구원을 준비한 존재의 싸움이.
* * *
쐐애애애액!
세상을 양분할 듯한 성좌의 일검이 진유성의 몸을 반으로 갈라 버리는 순간.
불현듯 성좌가 검의 방향을 틀었다.
까앙!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를 쳐낸 그가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성좌는 난데없이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수억 개의 책장을 보았다.
책장에는 책이 빼곡히 들어있었는데, 일순간 책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성좌는 이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일순간 수천억 개의 책이 자신을 짓누르는 중압감을 느꼈다.
중압감을 해소하고 보니, 진유성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