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297화 (297/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97화>

* * *

아카샤의 화신, 타트바는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그녀는 아주 오래 전부터 아멜라 메건의 몸으로 현신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그릇의 함정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준비했는지 알 수 없는, 아카샤의 눈조차 속이는 함정에 타트바는 속수무책이었다.

아아…….

타트바는 애상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그릇에게 전지의 힘과 화신의 자아를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계는 끝이다.

아카샤도, 진유성도, 그릇을 감당할 수가 없다.

그릇이 끝없는 탐욕을 드러내 세상의 모든 것을 삼킬 것이다.

그 존재가 삼킬 수 없는 것은 없으니까.

아아…….

자신이 소멸됨은 아쉽지 않으나, 세계가 멸망하는 시작점에 선 것은 비탄한 일이었다.

그렇게 타트바가 그릇에게 빨려 들어가는 순간.

쿠웅!

변화가 일어났다.

거대한 외부의 충격이 그릇의 포식을 막아 냈다.

진유성이었다.

놀랍게도 아카샤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그릇의 함정을 그가 알아차린 것이었다.

쿠웅!

타트바는 온 정신을 집중했다.

진유성이 기회를 줬으니 함정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하지만 또한 빠르게 다른 육신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세계 전체를 뒤덮고 격동하는 기류에 맞춰 의식을 잃고 소멸되어 버린다.

지구 전체를 뒤덮고 있는 회백색의 구체에서 소멸된다는 것은 결국 그릇에 흡수된다는 것과도 같다.

타트바는 자신이 현신할 수 있는 그릇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첫 번째로 아카샤의 힘을 받아들일 깨끗하고 맑은 선천진기를 타고나야 한다.

두 번째로 조금이라도 기운을 쓸 줄 알아야 한다.

세 번째로 지금 세상에 벌어지고 있는 진실을 조금이라도 알아야 한다.

이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현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저 아무 몸으로나 들어가서 죽임을 당한 뒤, 그릇에게 흡수될 것이다.

제발, 제발.

타트바는 초조함을 느꼈다.

아멜라 메건 이외에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는 이가 없을 것 같다는 절망감이…….

그 순간이었다.

타트바는 기적적으로 자신을 온전히 담을 수 있는 육신을 찾아냈다.

너무나 완벽한 육신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멜라 메건보다 더욱 훌륭했다.

그녀보다 맑은 선천진기를 가지고 있으며, 기운을 다룰 줄 알고, 세상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진실을 조금은 알고 있었다.

준비라도 된 듯한 육신에 타트바는 의심을 품었다.

혹시 여기까지도 그릇의 함정이 아닐까.

타트바는 고민했다.

격랑의 시류에 휩쓸려 소멸하는가.

아니면 그릇의 함정일 수도 있지만 도박을 하는가.

결국 그녀의 선택은 후자였다.

그렇게 타트바는 애초에 계획되지 않은 육신에서 눈을 떴다.

그렇게.

강원도 영월의 피난소에서 아카샤의 화신이 눈을 떴다.

* * *

진유성이 놀라 눈을 치켜떴다.

분명 심장을 찔렀다.

손끝에 정확한 감촉이 있었다.

한국에 와서 읽었던 무협 소설들 속에서는 심장이 뚫리고도 유언을 남기고 가는 인물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봐 왔지만, 심장이 꿰뚫리면 그냥 죽는다.

그래, 어쩌면 초인적인 의지력을 지닌 사람은 몇 마디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진유성은 단지 꿰뚫기만 한 게 아니다.

심장을 찌른 뒤, 내가중수법을 통해 터트려 버렸다.

그 여파로 오장육부의 대부분이 녹아내렸을 것이고.

즉사해야 한다.

저토록 광소를 터트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크크크.”

가짜 진유성이 낮은 웃음을 흘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베어진 옷 사이로 상처가 꿀렁꿀렁 아물어 가는 것이 보였다.

진유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놈, 설마 마도사들처럼 된 거냐?”

가짜 진유성이 세쌍둥이 마도사들처럼 육신을 벗어던진 게 아닐까?

하지만 진유성은 이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마도사의 마도 비의(秘儀)는 영과 혼에 기인한 힘이지만, 무공은 다르다.

백과 육을 단련하는 게 무(武)이고, 영과 혼을 단련하는 게 공(功)이다.

둘을 합쳐야 무공(武功)이다.

하나라도 버리면 본인이 이룩한 경지가 무너져 버린다.

입신의 경지에 올라 마도사들조차 초월한 무인이 그것을 버릴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저것은 무엇일까?

진유성의 신체 재생력은 엄청나지만 빨리 낫는 정도지, 잘렸던 팔이 자라나고 심장이 재생될 수는 없다.

하지만 가짜 진유성은 심장을 재구성하고, 상처를 재생시키고 있었다.

마침내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온 가짜 진유성이 허리를 폈다.

“기쁘구나, 진짜 진유성이여.”

진짜 진유성.

끝임 없이 자신이 가짜라는 걸 부정하던 중원의 진유성이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본좌는 그동안 수도 없이 상실의 공간에 들어섰다. 그때마다 너에게 가장 소중한 무언가의 9할을 잃었도다.”

가짜 진유성은 ‘--’를 끝까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과감하고 단호했다.

자신의 몸에 남은 ‘--’를 버리고 버려, 진유성이란 객체와 완전히 달라질 때까지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도사들의 첫째가 소멸할 때쯤 들어간 상실의 공간.

위상의 수호자를 패퇴시키고 들었던 심상.

[이곳은 상실의 공간.]

[그대를 구성하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야만 통과할 수 있다.]

[하지만 그대의 무(武)는 규칙을 뛰어넘었기에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대는 ‘자존’의 9할을 잃고, ‘무’의 1할을 잃겠는가.]

[아니면 ‘무’의 9할을 잃고, ‘자존’의 1할을 잃겠는가?]

중원의 진유성은 상실의 공간을 넘지 않았다.

차원 위상의 다름을 수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상실의 공간은 쉽게 물러날 수 있는 곳이기에, 그대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깨달았다.

더 이상 자신에게 남은 ‘--’는 없다는 걸.

또한 알게 되었다.

자신에게 한 톨의 ‘--’도 남지 않았을 때, 스스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네놈은 상실의 공간에서 스스로가 무엇을 잃었는지 모르는구나. 네가 잃은 무(武)는 단순한 무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가짜 진유성의 손에서 푸른 불꽃이 일렁이며 파즈즈즈 하는 소리를 토해 냈다.

“생사입멸을 관장하는 이 힘이 그저 무공이라고 생각했느냐? 아니면 전능의 힘을 계승했다고 생각했느냐?”

“나도 알고 있다. 입멸공을 내가 빚어냈다는 걸.”

“아니, 너는 모른다. 네가 어찌하여 해남에서 전능의 힘을 계승하지 않았는지.”

“…….”

진유성이 의아하게 생각하던 부분이긴 했다.

그는 해남의 이름 모를 섬에 어떻게 도달했고, 어떤 시험을 치렀고,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를 모두 기억했다.

하지만 입멸공을 빚어내는 그 시점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입멸공의 또 다른 최종오의 연(然)을 만들어 냈을 때, 지독한 기시감을 느꼈을 뿐이다.

아무래도 자신이 입멸공을 빚어낸 것이 처음이 아닌 것 같다는.

“나는 더 이상 너의 ‘--’에 대해 궁금하지 않노라. 하지만 너에게는 네가 잃어버린 것에 대해 알려 주겠노라.”

가짜 진유성이 선언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네 목숨을 거둬 가겠노라.”

그 순간.

가짜 진유성의 몸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득함이 피어올랐다.

“……!”

진유성은 이것과 비슷한 느낌을 알고 있다.

이건, 아카샤에게서나 느낄 수 있었던 아득함이었다.

“너는 전능의 힘을 계승할 수 없었다.”

안 한 것과 못한 것은 다르다.

진유성은 전능의 힘을 계승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해남의 섬에 들어가기 전, 이미 신성을 완성한 존재였으니까 말이다.”

“…….”

“물론 그 힘은 아주 작고 보잘것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이었다. 그러니 또 다른 신성을 계승할 수 없었다.”

어찌하여 입멸공인가.

“화전민 모녀 시신 앞에서의 다짐. 거기서 너의 신성은 시작되었다.”

공(功)이라 함은 노력과 정성을 뜻이다.

“이제 알겠느냐? 네가 잃어버린 9할은 무공이 아니라, 네가 빚어낸 신성이라는 걸.”

“……!”

“그동안 본좌는 네가 빚어낸 신성에 묶여 있었노라. 하지만 이제는 자존(自存)하리라.”

그는 진유성이 만들어 낸 신성의 9할을 품었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에게 가짜란 인식을 주었다.

하지만 지금.

가짜임을 인정하고, 품고 있는 신성의 9할을 자신의 방식으로 풀어내…….

전혀 다른 존재가 되고 있었다.

“빛나는 신성을 품었으나 인간을 사랑하여 지상으로 추락한 유성(流星)이여.”

사람들은 별똥별을 보고 소원을 빌고 즐거워하지만, 결국 추락하는 별일 뿐이다.

“본좌는 인간들을 경멸하여 내려다보고, 인간들이 경외하여 올려다보는 신이 되겠노라!”

가짜 진유성의 존재감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고 있었다.

아니, 그는 더 이상 가짜 진유성이 아니었다.

새롭게 탄생한 신(神)이었다.

“나의 신성을 완성시킬 신명(神名)은 성좌(星座)이니라.”

신이 전 세계를 향해 선포했다.

그 순간, 지구 전체를 뒤덮은 게이트 내부가 요동쳤다.

[대명제국 영생의 황제(皇帝), 진유성(振流星).]

시스템 메시지가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더니, 흩어졌다.

이윽고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무(武)의 성좌(星座)]

진유성으로부터 범람했지만 신이 된 성좌가 게이트 안을 굽어보았다.

성좌와 진유성이 싸우는 공간은 게이트 안에서도 유리되어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성좌가 쳐다보는 순간.

전 지구를 뒤덮은 인간들 중 상당수가 죽음을 맞이했다.

[몹시 즐겁군.]

그 순간, 참지 못한 진유성이 뛰어들었다.

진유성은 느끼고 있었다.

놈의 말과 행동은 허장성세가 아니다.

놈은 정말로 신이 되었다.

마도사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것을 이룩한 것이었다.

하지만 진유성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파라라라라락!

진유성의 공격과 함께 공간이 요동쳤다.

그 속에서 세상도 갈라 버릴 일검이 날아들었지만.

[소용없도다.]

성좌의 손짓에 수세와 공세가 전환되었다.

무공 자체는 진유성이 성좌보다 뛰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첫 생사투에서 그의 심장을 찌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9할의 신성으로 신이 된 존재와 1할의 신성을 품은 인간의 대결이다.

힘의 총량에서 아득히 밀리고 있었다.

꽈앙!

성좌의 검을 막아 낸 진유성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퉷.”

금방 균형을 회복해 일어나며 핏물 섞인 침을 뱉었다.

무공으로는 안 된다.

그러나 진유성은 절망하지 않았다.

고오오오오오오오-

진유성의 온몸으로 입멸공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인과율을 관장하는 힘.

입멸공에 한계는 없다.

생사입멸의 최종오의라는 단어조차 한계를 만들어 내는 틀일 뿐이다.

아무것에도 갇히지 마라.

그저 결과로 똑바로 나아가라.

상대가 신이라면 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

“벤다.”

신살(神殺).

진유성이 바닥을 박찼다.

삼적천능보의 보법.

세 걸음이 쌓이면 능히 하늘도 내려다보리라.

일보에 자신을 담고.

이보에 신념을 담고.

삼보에 죽음을 담았다.

[어림없다!]

그와 동시에 성좌도 똑같은 삼적천능보로 진유성을 향해 짓쳐 들었다.

까드드드드득-!

지구를 뒤덮은 게이트 전체가 들썩임과 동시에.

---!

한 명의 신과 한 명의 인간이 서로를 베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