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96화>
Quest 47. ‘--’의 천마님
중원의 진유성.
지구의 진유성.
같지만, 다른.
다르지만, 같은.
두 존재가 애검(愛劍)을 들어 서로의 심장을 겨냥했다.
본디 두 사람은 나눠야 할 대화가 아주 많았다.
진짜 진유성은 자신이 떠난 이후 명나라가 어찌 되었는지 궁금했다.
가짜 진유성은 아직도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가 궁금했다.
하지만…….
진유성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머뭇거리지 않는다.
결단의 순간이 오면 호기심을 우선하지 않고, 가능성을 재단하지 않으며, 뒤를 생각하지 않는다.
마음을 품은 즉시 행동한다.
그리고 지금.
아니 어쩌면 존재했을 때부터.
그들은 서로를 죽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프스스스스스!
명백한 심동에 맞춰, 둘 사이의 공기가 찢어발겨진다.
가짜 진유성이 만들어 놓은 시체의 산과 피의 강이 기운의 충돌을 이기지 못하고 밀려난다.
그렇게 두 사람을 중심으로 50장(150m) 이내의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고요한 적막 속에서 살기가 들끓는다.
진유성은 분노한 상태였다.
지천에 널려 있던 참혹한 시신들 때문이었다.
자신으로부터 범람한 가짜 진유성이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진짜를 죽여서 스스로가 가짜라는 증거를 없애고 싶은 것이니까.
물론 죽어 줄 생각 따위 없지만, 행동의 당위성까지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수단과 행동이 너무나 사악하다.
마도사들과 손을 잡고, 그릇과 손을 잡고, 사람들을 학살한다.
제 아무리 선한 목적도 악으로서 이룩한다면, 그것은 위선이다.
선은 선으로 이룩해야 한다.
이게 진유성이란 존재다.
그러니 저놈은 내가 아니다.
나로부터 범람한 가짜일 뿐이다.
진유성이 그런 생각을 품음과 동시에.
두 자루의 검이 서로의 요혈을 노리며 공간을 격했다.
---!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음에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간격 사이의 농밀한 기운들이 공기와 소리를 모조리 밀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꾸르르르릉!
폭음은 그들이 부딪쳤다가, 떨어진 다음에 들려왔다.
하지만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두 사람은 다시 한번 격돌하며, 간격을 좁혔다 떨어트리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두 사람의 모습은 흡사 오류가 발생한 영상과도 같았다.
충돌 이후에 소리가 들리고, 때로는 몇 번씩 발생한 충돌의 소리가 한꺼번에 들려왔다.
이는 두 사람의 음파 사이에 기파를 숨겨 날렸기 때문이었다.
충돌로 인한 소리조차도 공격으로 이용하는 무인들.
벽을 넘은 자들의 전투였다.
둘의 전투는 누구도 초수의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이어졌다.
그사이, 진유성은 놀라움을 느끼고 있었다.
가짜 진유성의 무공이 생각보다 강해서 놀란 게 아니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느낌이 너무나 이상했다.
두 사람이 충돌할 때마다 물속에서 아주 질긴 미역을 후려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 충격이 온몸을 타고 찌르르 전해진다.
‘그렇군.’
진유성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어 보는 이상한 감각의 정체를 파악했다.
이는 두 사람이 완전히 동일한 힘으로 운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론상 완벽히 같은 힘이 부딪치면 에너지는 상쇄된다.
하지만 사람 간의 충돌에서 이 같은 일이 실현되는 건 불가능하다.
설령 똑같은 두 명이 싸운다고 해도 모든 순간에 같은 힘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진유성이란 존재는 그게 가능했다.
그의 무공과 체술은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고, 완벽한 형과 식을 완성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이상적인 움직임’을 취한다.
문제는 두 사람의 이상이 같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충돌할 때마다 힘이 상쇄되고 있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동일한 신체와 동일한 무공을 지닌 무인이 동일한 전략과 동일한 운용을 쓰고 있다는 뜻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진유성은 20대 초반이고, 가짜 진유성은 30대 초반이었다.
그러나 외양만 다를 뿐이다.
두 사람은 근육을 구성하는 근섬유 단계까지 완벽히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그렇다면, 평소와 다르게.’
무공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진유성의 오성이 번뜩였다.
여기서 더 강한 힘으로 상대를 치려고 노력해선 안 된다.
오히려 약한 힘으로 공격한 다음에 그 공격을 흘려야한다.
어찌 보면 초수를 양보하는 셈이었지만, 진유성은 지난 100년간 초수의 우위를 점해 왔다.
벽을 넘은 이후로 자신과 대적할 만한 상대를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오히려 초수를 양보하는 것으로 상대를 정해진 틀 안에 가둘 수 있다.
또한 자신은 예측 외의 움직임을 보일 수 있다.
생각은 길었지만, 움직임은 찰나였다.
결정을 내린 진유성이 왼발을 왼쪽으로 디디며 나아갔고, 오른발을 오른쪽에 디디며 힘을 모았다.
검을 들고 있긴 하지만, 이는 삼적천능보의 보법이었다.
다음 걸음걸이는 왼쪽이다.
하지만 진유성은 거기서 변초를 일으켜 신체 균형이 틀어지지 않는 선에서 직선으로 나아갔다.
왼쪽, 오른쪽, 왼쪽으로 이어지는 곡선 움직임을 순식간에 직선으로 바꿨지만.
까앙!
가짜 진유성 역시 자신과 똑같은 행동을 취했다.
심지어 검에 담긴 힘까지 동일했다.
상대도 삼적천능보의 보법에 변화를 주며, 의도적으로 초수를 양보하려 한 것이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진유성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마음을 바꿔서 힘을 조금 더 뺐다.
상대도 힘을 뺄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 디딘 발의 깊이가 조금 얕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같다.
둘의 중심에 꼭짓점을 찍는다면, 그들은 영원히 대칭으로 움직일 것만 같았다.
물론 중간 중간 변칙적인 수로 행동을 달리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허초 뒤에는 실초가 있어야 하고, 변초 뒤에는 정초가 있어야 한다.
그러다보니 약간의 틀어짐이 발생해도 결국 몇 수를 겨루다 보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단기전으로 승부를 내지 못한 두 사람이 소강상태로 접어들며 뒤로 크게 물러났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가짜 진유성이었다.
“해남도가 떠오르는군.”
입멸공의 시험 중 하나가 나 자신을 이기는 것이었다.
“너도 거기서 시험을 이겨 냈고, 나 역시 이겨 냈다. 그럼 오늘은 누가 이길 것 같지?”
“어이, 짭유성.”
가짜 진유성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진유성이 사용한 호칭에 분노를 느낀 탓이었다.
가짜라는 정체성은 줄곧 그를 괴롭혀 오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진유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네가 날 죽이면 진짜가 될 거라고 생각하냐?”
“세상 어디에도 내가 가짜라는 증거는 없다.”
“없긴 왜 없어. 내가 있는데.”
“이제 없을 것이다.”
가짜 진유성의 왼손에 새하얀 검이 피어올랐다.
마음을 베는 검.
심검(心劍).
“너와 나의 힘이 동일하다면, 미세한 차이가 균열을 만들어 내겠지.”
그가 오른손으로 입멸검을 들어 올렸다.
“진짜 입멸검은 나에게 있다.”
이윽고 가짜 진유성의 왼손과 오른손이 하나로 합쳐졌다.
드드드드드-
심검과 입멸검이 진동한다.
두 검은 서로를 밀어내는 듯 으르렁거렸지만, 이내 하나가 되었다.
세상을 재단할 수 있는 거대한 힘이 자신을 겨냥하자, 진유성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웃었다.
“왜 웃지?”
“이걸 들이밀기만 해 봤지, 당해 보는 건 처음이라서.”
“그게 재밌나?”
“어이, 짭유성.”
“그렇게 부르지 마라.”
“꼰대라서 줄임말 싫어하냐? 가짜 진유성이라고 정중하게 불러 줄까?”
“그 입 닥쳐라!”
“뭐 이렇게까지 화를 내고 그래? 내가 짭유성 할까? 네가 찐유성 할래?”
쿠르르르릉-
가짜 진유성의 분노에 맞춰 공간이 떨렸다.
공간을 가르며 입멸검과 심검이 합치된 거검이 날아들었지만, 이내 똑같은 힘이 맞섰다.
진유성도 입멸검과 심검의 합치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지금까지 두 힘이 충돌하면 늘 묘한 느낌과 함께 동일하게 상쇄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가짜 진유성이 뒤로 반보 물러난 것이었다.
“어떻게…….”
가짜 진유성이 놀란 건, 진유성이 자신보다 큰 힘을 쓴 게 아니란 점이었다.
분명 두 사람은 같은 힘을 같은 방식으로 운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묘한 차이가 발생했다.
“아직도 모르겠냐? 진짜와 가짜의 차이는 무의미하다.”
“……!”
“거기에 집착하는 너의 심검이 온전하다고 생각하느냐?”
멸마대의 진유성은 죽고 싶지 않았다.
생존대의 진유성은 살고 싶었다.
천마신교주 진유성은…….
죽고 싶었다.
너무나 강대한 힘을 얻은 덕분에 긴 삶을 얻었고, 긴 삶을 얻은 덕분에 외로움을 얻었다.
외로움은 괴로움이 되었고, 괴로움은 아득함이 되었다.
아득함이 그의 감정을 갉아먹고, 그의 삶을 갉아먹었다.
그것은 살아가는 게 아니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거대한 신념만이 남은 조각상과도 같았다.
그래서 진유성은 죽고 싶었다.
그가 천신궁 뒤뜰에 열어 놓은 게이트에 들어간 것은 다른 세계로 가기 위함이 아니었다.
막연히 무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상림이 돌아오지 않은 걸 보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확률이 컸다.
그러니.
“내가 천신궁의 게이트에 들어간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죽음을 찾아간 것이었다.”
“…….”
“그 상태에서 네가 범람했다면 너 역시 마찬가지일 터.”
진유성의 심검이 더욱 새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런 너의 심검이 온전하리라고 생각하느냐?”
진유성은 지구에 와서 많은 것을 얻었다.
축구를 하며 의념과 신체에 대해 깨달음을 얻었고, 시험공부를 하며 물리학에 대한 지식을 얻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가고 싶어졌다는 것이었다.
유혜연과 상림이 백년해로하는 걸 보고 싶고, 상소윤이 어른이 되는 걸 보고 싶다.
상도윤이 자라나는 걸 보고 싶고, 대정고의 친구들이 사회인이 되는 걸 보고 싶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나 자신을 보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진유성은 다시 한번 완벽한 심검을 얻었고, 이룩할 수 있었다.
심검의 다음 단계를.
“일수(一手)에 일점(一占)이 깃드니, 일력(一力)과 일세(一勢)가 널 베어 넘기니라.”
“……!”
“내 말을 이해했나 보군.”
진유성의 손에 들려 있던 거대한 거검이 평범해졌다.
심검도 사라지고, 입멸검을 휘감고 있던 막대한 기운도 없어졌다.
그 고요함 속에서 검이 나아갔다.
표홀하지만 가볍지 않고, 은밀하지만 숨지 않았다.
가짜 진유성은 심검과 입멸검을 합치시켜 그 기운을 밀어내려 했지만, 밀어낼 수 없었다.
진유성의 검이 곧게 날아갔다.
그리고 그 직선 움직임의 끝에.
푸욱!
가짜 진유성의 심장이 있었다.
가짜 진유성은 검에 찔린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다시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그의 몸은 무릎 꿇고 있었다.
검을 찌른 채, 진유성이 말했다.
“너는 가짜가 아니다. 그저 나와 다른 존재일 뿐이다.”
“…….”
“네 수단이 악하지만 않았다면 좋았을 걸. 안타깝군.”
그렇게 말한 진유성은 심장에서 검을 뽑았다.
그리고는 목을 치기 위해 다시 검을 들었을 때.
꽈앙!
폭발적인 기운이 터져 나오며 그를 물러나게 만들었다.
“아하하하! 하하하하!”
자리에서 일어난 가짜 진유성이 광소를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