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94화>
“뭔 소리야? 너랑 같은 얼굴과 이름이라니?”
옆에서 통화를 듣고 있던 상소윤이 질문을 던질 때였다.
진유성은 뒤늦게 집을 향해 헐레벌떡 달려오는 두 사람의 기감을 읽었다.
상림과 아놀드 벡이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상도윤을 품에 안은 유혜연이 따라오는 것도 느꼈다.
“이 자식이.”
거리가 멀지 않다고는 하나 50m 정도는 떨어져 있다.
진유성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압구정을 호시탐탐 노리는 미인가 각성자들 중에는 상림의 가족을 인질로 잡으려는 놈들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진유성이 언노운 엠페러라는 걸 모르고, 어려 보이니까 달려드는 이들도 있었다.
상소윤이 하루 종일 집에만 있는 것도, 유혜연과 상도윤의 짤막한 산책에 상림이 따라간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고.
그러니 상림이 유혜연과 저토록 거리를 벌리는 건 위험한 행위였다.
물론 상림의 무공을 생각해 보면 50m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게…….
“아……!”
진유성은 스스로에게 놀랐다.
조금 전까지 강대하고 명백한 적의 등장에 모든 세포가 무공을 일깨우고 있었다.
동시에 그의 우주에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새겨졌다.
그게 나에게 찾아오든, 상대에게 찾아가든 말이었다.
한데, 유혜연의 안전에 불만이 생긴 순간 모든 것이 깨끗이 사라졌다.
그래서.
“뭐냐니까?”
“잠깐, 잠깐만 가만히 있어라.”
머리가 맑아졌다.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할 수 있을 만큼.
‘현상에는 이유가 있고, 행위에는 의도가 있다. 어디까지가 현상이고, 어디까지가 행위인가.’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상림과 아놀드 벡이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교주님! 큰일 났습니다!”
“나가.”
“장난칠 때가 아닙니다!”
“무슨 일이 있는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나가서 아내와 함께 들어와라. 아무리 급해도.”
“아…….”
상림이 흠칫 놀라더니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갔다.
상림이 나가자 아놀드 벡이 말했다.
“보고를 받으셨습니까?”
“한지후한테 연락받았다. 너희는 어디서 들었느냐?”
“아멜라 메건에게서 급히 연락이 왔습니다.”
“메건? 걔가 왜?”
아멜라 메건은 정신계 각성자들을 교육을 위해 타 지역에 가 있는 상황이었다.
“타트바가 강림할 준비를 끝냈답니다.”
“지금?”
“예. 당장도 강림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안전한 곳에서 의식을 치르려 서울로 오다가, 마스터와 똑같이 생긴 몬스터가 게이트 밖으로 각성자 몇 명을 내보내는 걸 봤다고 합니다.”
“그럼 게이트를 찢었겠군.”
“맞습니다. 이는 마스터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각성 과학자들의 간절한 소망 중 하나가 게이트의 자유로운 출입이었다.
하지만 20년이 넘도록 성과는커녕 단서조차 잡지 못했다.
클로징 되지 않은 게이트에서 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입멸공뿐이었다.
“생존자들의 상태는?”
“게이트를 찢고 나오면서 발생한 압력 때문에 끔찍한 상태입니다. 간신히 증언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군…….”
“대체 놈은 누굽니까?”
“예전에 학이 그런 말을 했었지. 나로부터 범람한 것이 나와 같을 것 같냐고. 그놈이 제법 똑똑했던 모양이다.”
“예?”
진유성은 아놀드 벡을 비롯한 우산도 멤버들에게 대부분의 이야기를 해 줬지만, 짭유성에 대한 부분은 아니었다.
존재한다고 생각할 뿐, 실체를 목격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짭유성은 분명 마도사들과 손을 잡았었다.
모든 마도사를 소멸시켰음에도 놈이 지구에 나타났다는 것은.
‘아카샤가 말했던 존재.’
그놈과 손을 잡았을 확률이 높다.
“아니, 호기심은 나중에 풀겠습니다. 지금 당장 서울역으로 가셔야 합니다. 일분일초가 급합니다.”
“놈이 민간인들을 죽이고 있나?”
“비슷합니다. 서울역에 자리한 게이트 영역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대피하지 못한 민간인들이 계속해서 게이트로 끌려가고 있고요.”
“얼마나 커졌는데?”
“서울역 부지를 넘어섰습니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빨리 가 보셔야 합니다. 놈이 마스터를 부르고 있습니다.”
아놀드 벡은 다급해 보였다.
하지만 진유성의 얼굴에는 다급함이 보이지 않았다.
아놀드 벡은 그게 이상했다.
언제나 대중의 안위를 걱정하던 진유성의 평소 모습을 생각하면 더더욱.
“놈이 나한테 전하라던 말부터 듣자.”
“마스터!”
“뭐냐니까?”
대답은 유혜연, 상소윤과 함께 집으로 들어온 상림의 입에서 나왔다.
상림은 유혜연을 데려오면서도 기감을 확장시킨 탓에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장백산(長白山 : 백두산)에서의 각오를 기억하라고 말했습니다.”
“놈이…… 그렇게 말했다고?”
“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상림은 진유성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했지만, 장백산을 방문한 적은 없었다.
진유성이 잠시 침묵하다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놈은 정말 나로부터 범람한 존재로군.”
세상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야기다.
오직 스스로만 알고 있는 순간이었으니까.
무신들의 반란으로 개경에서 도망친 진유성은 어린 나이에 명나라로 향하는 국경을 넘으려 했다.
하지만 이미 국경에는 막대한 현상금과 함께 수배가 걸린 상태였다.
포도아문(捕盜衙門 : 포졸들의 관아)만 진유성을 찾는 것이 아니었다.
치외법권인 국경 지역에 거주하는 범죄자들부터 현상금 사냥꾼까지.
거짓말 조금 더해서 국경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이 진유성을 찾고 있었다.
방법이 없었다.
진유성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백두산을 넘는 것이었다.
살 확률보다 죽을 확률이 훨씬 높은 길이었다.
그러나 결국 진유성은 백두산을 넘었고, 정상 언저리에서 고려 쪽을 쳐다보며 다짐했다.
“뭐라고 다짐하셨습니까?”
“내가 나로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베겠다.”
당연한 분노였다.
진유성의 잘못이라면 왕자로 태어난 것밖에 없으니까.
그러자 상림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답니까?”
“이게 전부다.”
“그럼 놈이 왜 그런 말을 전달하라고 한 걸까요?”
“내가 살아 있는 한, 놈은 영원히 가짜니까.”
“그럼…….”
“그래. 나를 죽이고 진짜가 되고 싶은 거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가짜라는 증거를 없애고 싶은 것이겠지.”
백두산에서 내가 나로 살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고려의 역도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중원의 진유성이 베어야 할 존재는 지구의 진유성이다.
그래야만 스스로가 스스로로 살아갈 수 있다.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상소윤이 입을 열었다.
상소윤도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 보니, 진유성의 복제인간 같은 것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다.
“너, 다짐을 실행했어? 네가 해 준 이야기에는 그런 게 없었잖아?”
“실행하지 않았다.”
“왜?”
“내가 복수를 하는 순간, 명나라가 고려를 짓밟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고려의 위정자들은 죽이고 싶었으나 백성들을 생각해서 참았다.”
“역시.”
“역시라고?”
“아니, 왠지 넌 그럴 거 같았어.”
그 순간, 진유성은 깨닫게 되었다.
[그대는 ‘--’의 9할을 잃고, ‘무’의 1할을 잃겠는가.]
[아니면 ‘무’의 9할을 잃고, ‘--’의 1할을 잃겠는가?]
위상의 수호자가 제시했던 두 개의 선택지 중 하나.
‘--’가 무엇인지.
과거에도 ‘--’가 무엇인지에 대해 추측한 적은 있었다.
사실 내심 ‘감정’이나 ‘신념’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정말 사소한 것이었군…….”
진유성을 진유성답게 만드는 것은 정말 사소한 것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아이야. 넌 언젠간 반드시 상실의 공간에서 잃어버린 ‘--’를 기억해 내어야 한다.]
[그게 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으리라고 믿는…….]
아카샤는 자신의 ‘--’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거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럴 것 같진 않다.
이건 그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수만 가지 중 한 가지일 뿐이 아닌가?
자신만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을 것이었다.
그때 아놀드 벡이 애원에 가까운 어투로 말했다.
“제발, 지금 가셔야 합니다.”
상림도 보탰다.
“교주님 빨리 가 보시죠.”
유혜연과 상소윤은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으나, 진유성이 서울역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진유성은 고개를 저었다.
“가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 수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나도 마음이 아프지만…….”
진유성은 자신이 품은 생각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럼 이제 뭘 하실 겁니까?”
아놀드 벡과 달리 상림은 진유성의 결정에 딱히 반발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지금껏 진유성과 무수한 수라장을 헤쳐 왔기에, 진유성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일의 우선순위를 파악하는 능력.
모두가 다른 일을 먼저 하자고 해도, 진유성이 하자는 일이 결과적으로는 더 중요한 일이 되었다.
진유성이 말했다.
“드벡아.”
“……예.”
“아멜라 메건을 불러라.”
“예?”
“강신하는 걸 봐야겠다.”
“그건 어차피 메건이 혼자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도 봐야겠다. 서울역을 지났었다고? 그럼 당장 이곳으로 오라고 해.”
아놀드 벡이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상림이 고개를 저었다.
“교주님이 시키는 대로 합시다.”
아놀드 벡은 이어서 유혜연과 상소윤의 눈빛도 바뀐 것을 느꼈다.
결국 그는 위성 전화를 들었다.
잠시 뒤, 제대로 씻지 못해 추레한 아멜라 메건이 도착했다.
아멜라 메건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간절한 눈빛으로 아놀드 벡과 똑같은 말을 했다.
“상황이 몹시 급합니다. 게이트 범위가 폭발적으로 증식하고 있어요. 이제 서울역의 몇 배나 되는 지역입니다.”
아멜라 메건의 정순한 선천진기와 간절한 눈빛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실로 원하고 있었다.
진유성이 서울역으로 달려가 사람들을 구해 내기를.
그러나 진유성은 단호했다.
“지금 타트바가 현신할 수 있다고?”
“예. 어떤 도움도 필요 없습니다.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났어요.”
“그럼 해라.”
“얼마가 걸릴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처음으로 시도해 보는 거라서.”
“상관없다.”
결국 체념한 듯한 메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온몸의 기운들을 불사르기 시작했다.
1초라도 빨리 타트바를 현신시켜서 진유성을 보내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츠츠츠츠츠츠-
동시에 라디오의 헤르츠가 조정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비우는군.’
진유성은 아멜라 메건이 온몸의 기운을 비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저것은 기운을 배출하는 것이 아니다.
버리는 것이다.
일련의 과정이 끝나면, 아멜라 메건은 더 이상 각성자가 아니다.
어쩌면 일반인보다도 못한 육체 능력을 지니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멜라 메건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의 온몸에 있는 기운을 버리고, 또 버리고 있었다.
진유성도 감탄할 만큼 강한 희생정신이었다.
츠츠츠츠측-
소리가 점점 거세진다.
그 순간, 깜짝 놀란 상소윤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분명 거대한 무언가가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뭔가가 나타났다.
무슨 표현이 어울릴까.
평생 동안 살아 왔던 섬이 거대한 거북이의 등껍질의 일부분이었다는 걸 알게 된 기분일까?
아니, 그보다 훨씬 거대하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이 크지만, 따뜻한 무언가.
그것이 아멜라 메건을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메건의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상소윤의 감상은 이 정도였으나, 상림과 아놀드 벡은 아니었다.
진유성의 이야기 속에서 듣던 신의 화신은 그리 큰 존재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공간을 가득 채운 위압감은 뭐란 말인가?
그들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스스로가 아주 작은 존재가 된 느낌.
그것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와 동시에 의문을 품었다.
‘진유성은 이 존재조차 크게 느끼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그가 정말로 한 명의 인간일 수 있을까?
츠츠츠츠츠측-!
귀가 멀어 버릴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 거대한 소리와 기운 때문에 주변이 일순간 진공 상태로 변하는 순간.
상소윤과 유혜연이 숨이 막혀 깜짝 놀라는 순간.
아놀드 벡과 상림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무릎을 꿇는 순간.
타트바가 아멜라 메건의 몸속으로 들어왔다.
동시에.
진유성이 움직였다.
입멸공.
최종오의(最終奧義).
멸(滅).
진유성의 검이 아멜라 메건을 베고 지나가자, 대경실색한 아놀드 벡이 진유성에게 달려들었다.
진유성은 아놀드 벡에게 역공을 가하지 않았다.
그저 안전하게 제압해서 바닥에 눕혔을 뿐이었다.
아놀드 벡이 선량한 마음으로 행동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사이 타트바의 기운이 흩어지며, 진공 상태도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멜라 메건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펄럭이고 있었다.
검에 베였음에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아카샤도 알아차리지 못한 걸, 어떻게 알았지?”
진유성과 아멜라 메건의 시선이 교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