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93화>
* * *
아카샤와의 만남을 뒤로한 채, 서울로 돌아온 진유성이 한 첫 번째 일은 압구정에서 각성자들을 내보내는 것이었다.
현재 압구정은 한국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곳이었다.
진유성과 상림이 집을 잃거나, 가족을 잃은 피난민들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해 줬기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지금까지는 압구정에 상당히 많은 각성자들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진유성은 그들을 모조리 내보냈다.
당연히 각성자들은 우려를 표했고, 그들의 대표로 한지후 본부장이 찾아왔다.
“각성자들에게 들었습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더는 압구정에 게이트가 열리지 않을 거다.”
“얼마나 믿을 수 있는 정보입니까?”
“100%.”
“게이트 발생 가능성이 제로에 수렴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제로입니까?”
“제로.”
“……알겠습니다.”
한지후 본부장은 진유성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진유성은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일을 예측한 사람이며, 현 사태의 유일한 희망이니까.
“아, 맞다. 가지 말고 이리 와 봐.”
“왜 그러십니까?”
“지금부터 게이트가 바뀔 거다. 얼마나 바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어떤 형태로든.”
“그게 무슨 소립니까?”
“게이트를 도구로 이용한 이들이 죽었다.”
“그렇다면 게이트는 끝이 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의도는 없어지고, 규칙만 남았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
한지후 본부장이 잠시 생각하더니 표정을 굳혔다.
“더 위험해질 확률이 높은 겁니까?”
“그래. 하지만 많은 제한들이 풀릴 수도 있지.”
마도사들은 각성자가 탄생하길 바랐지만, 각성자가 지나치게 강해지길 원하진 않았다.
아포칼립스 때, 각성자들이 단체로 모여서 대항하게 되면 꽤나 귀찮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게이트에는 많은 제한 장치들이 있었고, 각성자들은 일정 수준 이상으로 강해질 수 없었다.
사실 진유성이 도착할 당시 세상에 3명뿐이었던 SSS급 각성자들도, 중원에서는 절대자의 반열에 속한다고 볼 수 없었다.
구대문파의 장문인이나 장로 수준과 비슷하겠지만, 문파의 최고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혹시 예상하시는 바가 있습니까?”
“글쎄. 일단 22명의 최소 입장 인원이 없어질 것 같군.”
최소 입장 인원은 인간을 위한 장치처럼 보이지만, 성장을 제한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특별한 재능을 지닌 이들의 경험치 독식을 막으니까.
물론 주변을 완전히 비워 버린 다음에 게이트에 혼자 들어갈 수는 있다.
하지만 SG는 그런 걸 용인하지 않았고, 진유성 이전에는 22명 이하로 입장한 게이트 자체가 없었다.
아무리 F급 게이트가 열린다고 하더라도 SG는 22명을 맞췄다.
“어쩌면 게이트를 들어가는 게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도 있을 것 같고. 아무튼 지켜보다가 바뀌는 거 있으면 알려줘.”
“알겠습니다.”
* * *
진유성이 예측했던 게이트의 변화는 그날 저녁부터 급격하게 시작되었다.
“이거 뭐야?”
“게이트 아니야?”
“아니야! 우리 사촌 형 각성자인데, 게이트는 이런 식으로 열리는 거 아니랬어!”
“나도 알아. 학교에서 배웠어.”
아포칼립스 시대에도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나가지 말라는 말을 무시한 채, 부모님들이 잠든 틈에 집을 빠져나온 아이들은 기묘한 것을 발견했다.
중단된 빌딩 건설 현장의 콘크리트 더미 속에서 거대한 타원형의 빛을 발견한 것이었다.
“마, 만져 볼까?”
그들 중 용감한 한 명이 손을 대는 순간.
메시지가 떠올랐다.
[E등급 수비 미션의 게이트입니다.]
[미션 : 민브랑 족의 공격으로부터 지역을 사수하십시오.]
[성공 보상 : B~F 등급의 아이템, 무기 랜덤 드롭.]
[성공 보상 : C~F 등급의 룬 가호, 스킬 랜덤 드롭.]
[실패 페널티 : 게이트 참여 인원 전원 사망.]
[실패 페널티 : 민브랑 족의 차원과 지구 차원이 연결되는 게이트가 생성됩니다.]
[연결된 게이트의 에너지가 과도하게 축적될 경우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게이트 브레이크 시, 민브랑 족의 침략이 시작됩니다.]
게임에서나 보던 것 같은 메시지와 설명이었다.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세쌍둥이 마도사들은 게이트를 모델링할 때, 인간들에게 익숙한 콘텐츠에서 형태를 따왔으니까.
게임, 영화, 만화, 소설 같은 콘텐츠들의 향기가 날 수밖에 없었다.
마도사들의 자아는 소멸했지만, 그들이 애초에 의도했던 부분들은 오히려 더욱 부각이 되고 있었다.
“드, 들어가 볼까?”
그렇게 한 아이가 게이트에 들어가고, 쭈뼛거리던 아이들도 뒤를 따랐다.
겁이 많은 소년 한 명만이 게이트에서 도망쳤을 뿐.
다음날, 이른 새벽.
어른들은 아무도 겁 많은 소년의 증언을 믿지 않았지만, 아이들의 실종의 증거를 찾기 위해 폐건물을 방문했다.
거기에는 여전히 타원형의 게이트가 빛나고 있었다.
* * *
각성자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게이트에 도전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대중들 중에는 각성자에 대한 불만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나를 먼저 지켜 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고, 대체 왜 게이트를 쉽게 클리어하지 못하는지에 대한 불만도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런 이유가 아니라 그저 야만의 시대에 힘을 쥐고 싶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게이트에 도전했고, 많은 사람들이 각성자가 되었다.
더 많은 사람들은 죽었고.
AI 시스템이 적용된(아놀드 벡이 붙인 이름이다) 게이트는 철저하고 냉혹하게 규칙에 따라 움직였다.
강자에게는 보상을 주고, 약자에게는 사형 선고를 내린다.
마도사들은 인간 이외의 몬스터들의 영성을 흡수하지 않았다.
영과 혼의 종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게이트 AI는 다르다.
놈에게는 종족의 구분이 없다.
그러니 반드시 몬스터를 인간의 영성을 살찌우는 먹잇감으로 이용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인간을 먹고 커도 된다.
그저 최대한 많은 영성을 포식하고, 타 차원을 공격해 유폐시키며, 다시 더 많은 게이트를 생성하면 그만이다.
즉, 더 이상 게이트의 재앙이 지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마도사들이 탐색해 놓은 수많은 하위 차원과 상위 차원들이 AI의 의지에 따라서 게이트의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고, 그저 몬스터가 자신을 공격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죽여 살고 싶을 뿐이었다.
그사이, 압구정에는 게이트가 열리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소문의 근원은 각성자들의 가족이었고, 확신을 준 것은 각성자들의 배치였다.
더 이상 각성자들은 압구정을 지키지 않는다.
그들의 가족이 거기에 존재하는데도.
사람들은 한국이 게이트 발생을 막는 장치를 개발했고, 그것을 압구정에 설치했을 거라고 믿었다.
압구정의 건물을 빼앗기 위해 이제 막 각성한 이들이 폭력 사태를 벌이기 시작했다.
기존의 각성자들은 언노운 엠페러의 목적을 알고 있지만, 무분별하게 등장한 미인가 각성자들은 아니었다.
언노운 엠페러는 전국의 게이트를 클리어하느라 쉴 틈 없이 바쁘다.
그가 게이트에 들어갔을 때를 노리면 그만이다.
압구정은 쉽게 정복할 수 있는 지역처럼 보였다.
하지만…….
“너, 이리 안 와?”
압구정에는 상림이 있었다.
진유성은 마음속의 칼을 잃어버린 상림을 두고 이런 평가를 내렸었다.
자신보다 고수를 상대로는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하수를 상대로는 여전히 강력할 거라고.
압구정을 노린 각성자들 중에는 무공을 회복한 상림을 이길 만한 이가 없었다.
하지만 진유성을 비롯해 진실을 알고 있는 이들은 느끼고 있었다.
진유성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다.
의로운 각성자들은 점차 죽어 가고, 야만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지금이야 미인가 각성자들이 위협적이지 않지만,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 될까?
그들의 힘은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이고, 그때는 분명한 위협이 될 것이다.
문명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 * *
“야, 진유성. 너 피곤해 보인다?”
“무슨 소리냐. 나는 피곤을 느끼지 못하는 몸이다. 금강불괴라고 하지.”
“웃기고 있네. 이리 와서 티비, 아, 맞다. 안 나오지.”
상소윤의 멋쩍은 표정에 진유성이 피식 웃었다.
3일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음에도 상소윤은 평소와 다름없이 그를 반겨 준다.
상소윤 뿐만이 아니다.
가족들이 전부 그렇다.
자신이 집 안에서 만큼은 ‘구원자’가 아니라 ‘진유성’이길 바라는 것이었다.
“요즘은 뭘 하고 지내느냐?”
“음, 옷 디자인도 공부하고, 도윤이랑 놀아 주고, 운동 하고, 텃밭에 채소 키우고 그러지.”
“답답하지 않느냐?”
“약간? 근데 괜찮아.”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느냐?”
“약간? 근데 진짜 괜찮아.”
“얼굴이 박색하지 않느냐?”
“약간? 근데 괜찮다니까.”
“괜찮다니 다행이다. 박색해도 행복하면 그만이다.”
“무슨……. 야이, 씨!”
진유성이 걱정할까 봐 반사적으로 대답하던 상소윤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이내 진유성이 웃음을 터트리자, 상소윤도 웃었다.
“어제 지종수가 너한테 화내더라.”
“뭐라고 화를 내더냐?”
“생각해 보니까 너무 억울하다고. 네가 축구를 잘했던 게 능력빨이라던데? 그냥 붙으면 자신이 이길 거라고.”
“웃기고 있구나. 난 스포츠를 즐길 때는 내공과 의념을 사용하지 않았다.”
“아닌데, 생각해 보면 진짜 아닌데. 너 낚시할 때 참다랑어 낚았잖아.”
“꽃에 벌이 꼬이는 것처럼, 물고기가 꼬였을 뿐이다.”
“아냐, 아냐. 우리 어제 모여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진지하게 토론했거든? 아귀가 딱딱 맞던데? 그동안 네가 내공을 썼다는 게?”
“…….”
“솔직히 말해 봐. 몇 번이나 썼어?”
“…….”
“내가 널 모르는 줄 알아? 거짓말하기 싫으면 대답 안하는 거 다 알거든?”
“기억이 안 난다.”
“그럼 하나씩 물어볼까? 일단 홍대 오락실의 펀칭 머신부터?”
“그때는 진짜 안 썼다.”
“그럼 다른 때는 썼다는 거네?”
“…….”
“그럼 그렇지. 네가 나보다 공부를 잘할 리가 없지. 컨닝했네.”
“그건 진짜 아니다.”
그 뒤로도 상소윤과 진유성은 한참을 투덕거렸다.
함께 대정고에 다닐 때, 늘 그랬던 것처럼.
문득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침묵 뒤로 진유성이 물었다.
“다들…… 잘 지내느냐?”
그는 대정고 게이트 이후로 친구들을 만난 적이 없었다.
물리적으로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었지만, 아마 시간이 있었어도 찾아가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들이 자신을 신으로 보는 눈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나 상소윤의 이야기 속, 친구들은 여전한 것 같았다.
“진유성.”
“왜 그러느냐?”
“네 생각보다 요즘 애들은 포용력이 넓다. 중원의 늙은이들이랑 다를걸?”
“어째서?”
“너 어벤져스 봤지? 토르도 천둥의 신인데, 지구에 와서 바보짓 많이 했잖아. 널 토르 정도로 생각하던데.”
“…….”
“어제 새롬이가 그러더라. 모든 일이 끝나면 다 함께 하이난에 가면 좋겠다고.”
정새롬은 모르고 한 말이겠지만, 해남은 진유성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중원의 해남에서 입멸공을 익혀 위대한 자가 되었으니, 모든 것을 끝내고 지구의 하이난에 가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좋다. 그때는 다들 성인이니 당당하게 술을 먹을 수 있겠군.”
진유성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그 웃음을 보던 상소윤이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야.”
“왜 그러느냐?”
“한번 안아 줄까?”
“이상하군. 내가 그렇게 힘들어 보이느냐?”
“…….”
“솔직히 육체적으로는 크게 힘들지 않다. 생존대 시절과 비교하면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
물론 사건의 스케일 자체는 지금이 훨씬 크지만, 생존대 시절의 진유성은 무공을 완성시키지 못한 이였다.
지금과는 다르다.
“누가 힘들어 보여서 안아 준대?”
“그럼 왜 그러느냐?”
“그냥 한번 안겨 보고 싶어서 그런다! 왜!”
상소윤이 빽 소리를 지르자, 진유성이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별말 없이 상소윤을 안아 주었다.
그 순간이었다.
쿵!
쿵!
진유성은 난생 처음 겪어 보는 이상한 느낌에 휩싸였다.
마치 자신의 몸이 두 개로 나뉘었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지고, 다시 두 개로 나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윽고, 그는 강렬한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존재감은…….
‘입멸공.’
틀림없었다.
중원의 진유성이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그때 진유성이 가지고 있는 위성 전화가 미친 듯이 울었다.
전화를 받자, 한지후 본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울역에 보스 몬스터가 등장했습니다! 한데…….
“나와 같은 얼굴과 이름을 쓰고 있느냐?”
-마, 맞습니다.
“몬스터의 이름은 무엇이냐?”
-대명제국 영생의 황제(皇帝), 진유성(振流星)이었다고 합니다.
영생과 황제.
그가 결코 바라지 않던 것.
“지금 가겠다.”
진유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끝을 볼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