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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292화 (292/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92화>

Quest 46. 베어 낸 천마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색도 없고, 소리도 없다.

무(無)의 공간.

하지만 그곳을 정말 무(無)라고 칭할 수 있냐면, 그건 아니었다.

공간 전체가 한 사람의 존재감으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가부좌를 틀고 가만히 앉아 있는 남자.

중원의 진유성이었다.

스으으으읍.

중원의 진유성이 긴 호흡을 내뱉으며 눈을 뜨는 순간, 공간 전체에 색과 소리가 번졌다.

그 속에서 마도사들의 첫째가 나타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첫째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는 ‘무언가’가.

첫째가 말했다.

[대단하군.]

“뭐가 말이냐?”

[본디 이곳은 허무의 공간이다. 하지만 네가 공간의 생사여탈권을 거머쥔 순간 색과 소리가 생겼군.]

“그게 신기한가?”

[신기하다기보단 놀랐다고 표현하는 게 옳겠군.]

중원의 진유성이 픽 비웃음을 흘렸다.

[왜 웃는 거지?]

“고작 공간을 거머쥐었다고 놀라는 게 가당찮구나.”

[하긴. 그대는 더욱 거대한 것도 거머쥘 수 있겠지. 이를테면, 지구의 진유성 같은.]

중원의 진유성이 다시 한번 비웃음을 흘렸다.

“본좌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네놈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군.]

“모르겠다고? 네놈은 마도사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지 않느냐?”

[……!]

그 순간, 공간의 색이 바뀌었다.

동시에 진유성의 힘에 반응해 푸른색을 띠던 공간이 회색으로 바뀌었다.

첫째의 표정이 달라진다.

그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완벽한 무표정.

놀랍게도, 같은 얼굴임에도 표정이 없어지는 것만으로 완벽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어떻게 알았지?]

“그건 질문이 되지 않는다. 그냥 알 수 있었으니까.”

[언제 알았지?]

“그것 역시 질문이 되지 않는다. 네가 처음 본좌의 눈앞에 나타났을 때 알았으니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진유성이란 존재는.]

진유성의 말에 첫째의 껍질을 뒤집어쓴 무언가가 침묵했다.

모든 것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도사는 마침내 게이트의 의지가 되었고, 아카샤는 자신을 무대 위로 끌어올리기 위해 모든 걸 알면서도 방치하고 있다.

아마 지금쯤 화신을 현신시키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 한 명.

진유성이란 존재는 가늠하거나 이해할 수가 없다.

지구의 진유성과 중원의 진유성.

둘 모두.

그때, 중원의 진유성이 말했다.

“자, 이제 호기심이 풀렸으면 제대로 된 질문을 해라.”

[왜 네가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꺼냈지?]

“완벽히 제대로 된 질문은 아니군. 하나 낙제도 아니니 답을 주마.”

중원의 진유성이 심유한 눈으로 첫째를 쳐다보며 말했다.

“본좌가 원하는 바가 있어서 네놈의 계획에 들어왔지만, 꼭두각시는 사양이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 같은 길로 가더라도, 너의 발로 걷겠다는 거냐?]

“그 말이 몹시 옳다.”

[네 존재가 지구와 동기화가 완료되었기 때문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으니?]

“그 말 역시 옳다.”

[무엇을 원하는가?]

“우선 묻겠느니, 내게 정체를 고하라.”

[내가 누군지 궁금한가? 그렇다면 스무고개라도 해 보는 건 어떤가?]

중원의 진유성은 스무고개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심상으로 전달되고 있기에, 그 뜻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질문이 스무 개까지나 필요한 놀이라니. 그야말로 아둔한 자들을 위한 것이군.”

[너는 몇 개의 질문으로 날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지?]

“그 어떤 문답도 세 개면 족하다.”

첫째의 껍질을 뒤집어쓴 무언가의 무표정에 흥미로움이 번졌다.

[좋다. 내 세 가지 질문에 대해서는 존재를 걸고 즉답하마.]

“이름이 무엇이냐?”

[없다. 나의 이름은 수시로 바뀌었으며, 원하는 순간 바꿀 수 있었다. 굳이 답하자면 현재 나의 이름은 마도사들의 첫째인 LRORD라고 할 수 있겠군.]

어떻게 보면 논지를 회피하는 듯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중원의 진유성은 개의치 않았다.

“나이를 고하라.”

[없다. 나이란 태어난 시점을 기준으로 삼으나, 나에게는 기준이란 없다. 굳이 말하자면 LRORD와 같은 나이겠군.]

“성별을 고하라.”

[실망스럽군. 이번에도 같은 대답을 지지부진 길게 늘어놓아야 하나? 나에게 성별은 의미가 없다.]

이름, 나이, 성별.

마치 대명제국에서 고을의 호구를 조사하기 위해 촌장에게 내미는 문답지와 같은 질문이었다.

첫째를 뒤집어쓴 존재는 진유성이 무슨 의도로 이런 질문을 던지는지 알 수 없었다.

정말로 정체를 맞추려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렇군. 너는 [자아]였군.”

[---!]

공간에 광풍이 휘몰아쳤다.

하지만 이것은 첫째를 뒤집어쓴 존재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본인의 진실된 존재를 발각당한 순간, 너무나 경악하며 공간의 주도권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다시 공간의 색이 푸른색으로 번진다.

진유성이 공간의 색 변화를 둘러보며 여상하게 물었다.

“너의 무채색이 의미하는 건, 모든 색을 포용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인가?”

[…….]

“자아보다는 그릇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겠군.”

[어찌…… 알았는가.]

“너의 세 가지 대답에서 유추한 것이다. 이름이 없는 존재는 많으나, 나이까지 없는 존재는 희미하고, 성별이 없는 존재는 유일하다.”

[……그건 답이 안 된다.]

“너만 한 존재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저,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 서 있었던 것이겠지.”

[…….]

진유성의 말에 침묵하던 [그릇]이 손을 휘둘렀다.

다시 한번 공간 전체가 무채색으로 번지더니…….

중원의 진유성 앞에 환상이 떠올랐다.

* * *

전지전능한 이는 두 차원의 위상을 바꾸어 세계를 지키고자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두 차원이 간섭 현상을 일으켜 멸망할 것을 예측한 것이었다.

그렇게 중원에 전능(全能)의 존재가 생겨났고, 지구에 전지(全知)의 존재가 생겨났다.

그러나 전능함은 모순을 느꼈다.

전능하다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자신은 전지전능해질 수도 있어야 한다.

전능의 존재는 상실의 공간을 뛰어넘어 전지함을 포식하기로 결정했다.

[이곳은 상실의 공간.]

[그대를 구성하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야만 통과할 수 있다.]

그는 상실의 공간에서 전능(全能)의 9할을 중원에 놔두고 떠났다.

그것이 입멸공(入滅功)이었다.

전능의 존재가 전능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것은 [자아]였다.

신의 힘을 온전히 품을 수 있는 자아를 잃는다는 건, 그릇 자체를 잃는다는 것과도 같다.

힘은 다시 키울 수 있지만, 그릇은 키울 수 없다.

전능의 존재는 지구에 숨어 오랜 시간 동안 힘을 회복하고, 아카식 레코드를 침탈해 전지함을 흡수하려고 했다.

두 존재는 격렬히 싸웠다.

승자는 아카샤였다.

전능의 존재는 아카샤에 의해 이 세계에서 추방당했다.

그는 차원의 미아가 되지 않기 위해 다시 상실의 공간에 들어갔다.

그러나 지닌 바 힘의 대부분을 잃어버린 그는 위상의 수호자를 이기지 못했다.

그리고는 상실의 공간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

바로, 자아였다.

자아를 잃어버린 채 중원으로 돌아온 전능함은 더 이상 신이 아니었다.

신성을 품을 그릇은 사라지고, 막대한 힘만 남았다.

그 힘은 릴리스란 마녀에 의해 괴물을 빚어내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마도사의 첫째였다.

하지만…….

중원에 남은 [전능]이 빚어낸 입멸공.

돌아온 [전능]이 탄생시킨 인류 최악의 마도사들.

다시 한번 아카식 레코드를 침탈해 신이 되길 원하는 [전능]의 조각을 품은 마도사들의 계획.

[전능]에서 깨달음을 얻어 인외의 존재가 된 진유성까지.

역사를 알고 있는 이들은 언제나 [전능]의 힘에만 집중했다.

그 누구도 지구에 남은 [자아]에는 집중하지 않았다.

신의 반쪽이었던 전능의 존재가 전능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었다.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었다.

전능을 품을 수 있는 그릇이 남았다고는 하나, 모든 전능의 힘이 중원 차원으로 넘어가 버렸으니.

그렇게 [자아]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지구에 과학이 발달하고, 괴력난신이 모두 미신으로 취급당하는 세상에 도달하면서는 완전히 자취를 감춰 버렸고.

하지만, [자아]는 아주 오랫동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텅 비어 버린 그릇에 전지와 전능을 채워서 신으로 나아가는 길을.

아카샤는 [자아]의 존재를 눈치챘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다.

[자아]는 결코 전면에 나서는 법이 없었다.

그는 세상을 움직여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모든 것을 움직일 뿐이었다.

* * *

환상이 끝나고, 중원의 진유성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신화적인 영역에서 아득히 이어져온 싸움의 끝에 자신이 서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릴리스란 마녀가 마도사를 빚어낸 것도 네 의지냐?”

[정확히 말하자면, 릴리스는 자아의 1할이었다.]

상실의 공간에서 전능의 존재가 잃어버린 것.

전능의 9할과 자아의 1할.

“그렇군.”

[내가 마도사만 빚어냈다고 생각하나? 중원의 진유성?]

“그게 무슨 말이지?”

[어둠이 있으면 빛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마도사를 빚어냄과 동시에 나는 언제나 세상을 혼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난세에서 전능을 품은 영웅이 탄생하길 기다렸지.]

“…….”

[하지만 세상에 영웅은 없었다. 인간들이 신화로 기억한 무수히 많은 영웅들은 결국 타락했다.]

“…….”

[결국 포기할 때쯤 길고 긴 나의 역사 속에서 처음으로 보는 영웅이 탄생했지. 그는 전능의 힘을 품을 수 있었으나, 품지 아니했다. 그는 타락할 수 있었으나, 타락하지 아니했다. 그는 신이 될 수 있었으나, 아니했다.]

“…….”

[나는 때론 그의 앞에 방해물을 두었고, 때론 그의 옆에 죽음을 두었다. 그가 천신궁 뒤뜰에 게이트를 열기 위해 묻어 둔 보석은 나의 진체(眞體)의 일부이다.]

“……!”

[그렇다. 지구의 진유성은 결국 내가 빚어낸 존재이다.]

신을 담을 수 있는 거대한 그릇이 미소를 지었다.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우선은 타트바를 집어삼켜야겠지. 타트바가 강신할 인간은 나의 것이지만, 아카샤는 결코 알지 못한다.]

“그런 걸 묻는 게 아니다. 너의 궁극적인 목표를 묻는 것이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군? 나는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다. 궁극이라 함은 사명의 끝을 의미한다. 나에게 끝은 없다. 그저 계속해서 담아낼 뿐이다.]

“그렇군. 이해했다.”

[중원의 절대자여. 이제 호기심이 풀렸느냐?]

“그러하다.”

[그대는 정말 담대하군.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나의 진체에 대해 아는 순간 백치가 되었을 것인데.]

“본인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군.”

[하하하하. 그릇 안에 즐거움이 가득 차도다. 묻겠노라, 중원의 절대자여!]

그릇이 물었다.

[지구에 현현할 준비가 되었는가?]

“준비는 진작 끝났다. 이 거지 같은 공간에서 오랜 시간을 기다리며.”

[어쩔 수 없었다. 너의 거대한 인과율을 풀어내며 지구에 현현시키기 위해서는.]

“변명은 됐다.”

[나는 네가 마음에 든다. 언젠간 집어삼키고 싶을 만큼.]

“문이나 열어라.”

[좋다.]

거대한 굉음과 함께 공간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침 떨림 속에서도 중원의 진유성은 가만히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공간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진유성이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다시 감았고.

다시 떴을 때.

[보스 몬스터가 출현했습니다.]

“씨, 씨발! 이거 뭐야?”

“보스 몬스터라고?!”

“공격해!”

“메시지창 왜 이래!”

[주의, 보스 몬스터가 몹시 강합니다.]

[주의, 보스 몬스터가 몹시 강합니다.]

[주의, 보스 몬스터가 몹시 강합니다.]

미친 듯이 떠오르는 메시지창을 본 각성자들이 기겁하며 진유성을 향해 각종 스킬을 내뿜었다.

하지만 공격은 닿지 않았다.

“불손하구나.”

진유성의 손짓에 모두가 목숨을 잃었을 뿐.

[대명제국 영생의 황제(皇帝), 진유성(振流星).]

중원의 진유성이 지구에 현현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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