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91화>
* * *
진유성이 아카샤에게 반문했다.
-주청이가, 월성이 마도사들의 둘째를 죽였다고?
[죽였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구나. 마도사는 스스로가 만든 시스템에 흡수당했다.]
-흡수?
[아카식 레코드를 만든 나는 아카식 레코드가 품은 의지 그 자체이다. 나라고 선과 악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죄인을 벌하고, 선인을 도울 수 없는 것은 아카식 레코드의 규칙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인류 무의식의 영성이 기록된 아카식 레코드에는 기록자의 사견이 반영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무의식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카샤는 죄인을 벌할 수 없다.
죄인과 선인을 아카식 레코드 안에서는 동등한 영성을 품은 인류로 보기 때문이었다.
아카식 레코드를 만든 장본인이 아카식 레코드의 규칙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마도사는 아카식 레코드의 무게를 감당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는 무게에 짓눌려 자아가 소멸당했다. 하지만 그자의 의지는 남아 있지.]
-의지라는 게, 게이트의 의지냐?
[그렇단다, 아이야. 마도사는 게이트의 의지 그 자체가 되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본래 게이트를 비롯한 이종의 힘은 아카식 레코드에서 거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도사들은 그것을 아카식 레코드에 편입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결국은 성공했고.
그러나 마도사는 자아가 소멸당했고, 이제는 게이트의 의지가 되었다.
쉽게 말하자면, 도서관을 넘봤던 도둑이 <도둑>이란 카테고리의 장서를 관리하게 된 셈이었다.
우스운 일이지만, 웃기진 않았다.
마도사의 최후는 어쩌면 또 다른 멸망의 시작일지도 모르니까.
진유성이 신중하게 물었다.
-게이트의 의지란 무엇이냐?
[게이트의 끊임없는 확장과 유지이다.]
-설마, 인간의 영성을 에너지 삼아서 말이냐?
[그러하다.]
-이런 씨발!
쿠르르르릉-!
진유성이 분노하는 순간, 공간이 흔들렸다.
진유성의 분노에 공간이 반응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일순간이지만 공간의 주도권을 진유성이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니까.
그러나 아카샤의 놀람과 관계없이 진유성은 분노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게이트는 마도사들의 도구였다.
도구의 쓰임새는 인간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 아카식 레코드를 오염시키고, 인간의 영성을 흡수하기 위함이고.
사실 게이트는 지금보다 훨씬 위험한 놈으로 변모할 수도 있었다.
아포칼립스가 시작되며 위험이 찾아왔다지만, 아직 세상이 종말할 수준은 아니다.
세상이 종말해 버리면 인류의 영성을 기록한 아카식 레코드 역시 사라지니, 이는 마도사들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
즉, 마도사들은 언젠간 세상을 멸망시킬 것이지만 아직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도구가 의지를 품었다면, 이는 다르다.
게이트의 무한한 확장과 유지.
이는 필연적으로 인간종의 무한한 죽음과 무한한 고통을 의미한다.
그래서 진유성이 분노한 것이었다.
-다시 묻겠다. 이제 게이트는 인간의 영성을 모아서 무한히 확장하고, 무한히 인간들을 끌어 모으는 거냐?
[또한 타 차원을 공격하겠지. 애초에 게이트의 많은 부분들은 차원을 멸망시키고 그 잔해를 끌어 모은 것이니.]
-그럼 넌 이렇게 될 결과를 알면서도 날 막았다는 것이냐?
[그러하구나, 아이야.]
-난 자유 의지를 존중한다. 그러니 네 의지도 존중하겠다. 하지만 결과에 대한 책임은 겸허하게 받아들여라.
진유성이 공간의 틈새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지금, 그는 아카샤에게 선전 포고를 한 것이었다.
아카샤는 마도사들과 다르다.
마도사들도 전능의 힘을 얻었지만, 일부일 뿐이며, 신의 자아가 품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낭인의 손에 들린 보검은 그저 조금 날카로운 검일뿐이지만, 경천동지할 무공을 지닌 이에게는 신검이 된다.
아카샤와 마도사의 차이는 그만큼이나 크다.
그러니 진유성이 아카샤에게 검을 빼 든 것은 그야말로 광오한 일이었다.
하지만, 진유성은 그런 존재였다.
상대가 누가 됐든 자신이 세운 신념을 지키는 인물이다.
그도 알고 있다.
설령 이 자리에서 아카샤를 소멸시킨다고 벌어진 일이 수습되지는 않는다는걸.
하지만…….
아카샤로 인해 고통받고 죽을 수많은 이들을 위한 흔적을 남겨야겠다.
아카샤의 존재에다가.
[아이야, 넌 무슨 자격으로 날 공격하겠다는 것이냐?]
-네가 신이라면, 난 인간들의 황제가 되겠다.
진유성은 신이 되고 싶지 않지만, 인간들을 위한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러니, 그는 황제였다.
그그그그그-!
진유성이 빼 든 입멸검에서 인과율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생, 사, 입, 멸.
네 가지의 힘이 서로를 할퀴고 어루만지며 영세토록 신의 형태를 유지한 아카샤의 소멸을 원한다.
이윽고, 진유성의 검이 아카샤를 타격했다.
꾸르르르릉!
천둥이 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아카샤의 신성이 흩날린다.
처음에는 속임수인 줄 알았다.
신화적인 존재가 이리도 쉽게 공격을 허용할 리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아니다.
정말로 진유성의 일검이 아카샤의 본체에 거대한 상흔을 남긴 것이었다.
진유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의 공격이 아카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고작해야 한 명의 인간이 신화적인 존재에게 닿는다는 것도 놀라운데, 소멸을 논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아카샤가 대응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충분히 진유성의 공격을 무력화시키거나, 반격할 수 있었다.
무(武)에 관한한 입신의 경지에 든 그의 감각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 왜 방어하지 않았지?
[내가 읽지 못한 다음 페이지를 감히 예측해 보려고 하기 때문이란다.]
-알아듣게 말해라.
[아이야. 이제 너에게는 ‘경험’이 생겼단다. 신의 육체를 직접 손상시킨 경험이.]
-……!
[경험은 언제나 인과율을 꽃피우는 씨앗이란다.]
진유성은 문득 마도사들의 첫째를 소멸시킨 뒤, 꿨던 꿈을 떠올렸다.
[그대가 품은 삼라만상(參羅萬像)은 너무나 거대하고 깊어 나조차 뚫어볼 수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언젠간 그대의 앞에 전지와 전능을 동시에 품은 존재가 나타날 것이라는 점이다.]
[그대는 잊지 말아라. 무의 9할을 포기하고 ‘--’의 9할을 지킨 그대의 마음을.]
[그 마음에 답이 있을 것이니.]
[그대는 신성을 잃었지만, 신성은 잃는 것이 아니니.]
[그럼, 그대가 문을 닫을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
마도사들 중 두 명은 진유성의 손에 의해 소멸됐지만, 마지막 마도사는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위상의 수호자가 언급했던 전지와 전능을 품은 존재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
한데, 아카샤는 진유성에게 ‘신을 베어 넘겼다’라는 인과율의 씨앗을 심었다.
이러한 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아직 적이 남은 거냐?
[적이 남은 게 아니다. 그 존재가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다.]
-그럼 마도사들은?
[그 존재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준 거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방치했고.]
아카샤의 말에 진유성이 눈을 가늘게 떴다.
-마도사들은 미끼였던 것이냐? 넌 그놈들이 그렇게 움직이길 바랐기에 날 붙잡아 둔 거고?
[정말이지 놀랍도록 영민한 아이로구나. 그 말이 맞다.]
-하지만 네 선택이 옳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죽을 것이다.
그러나 곧바로 부정의 심상이 날아왔다.
[내가 원하고, 네가 완성할 수 있는 길의 끝에는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단다.]
-평화를 되돌린다고 해도, 죽은 이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게 아니다, 아이야. 상실된 모든 것들을 되돌릴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생명이라고 할지라도.]
어떤 존재가 마도사들을 이용했고, 아카샤는 그것을 묵인했다.
마도사를 미끼로 삼아서 어떤 존재가 나타나게 하려고.
그리고 아카샤는 어떤 존재를 처단을 자신에게 맡기려는 모양이었다.
신을 베어 넘겼다는 씨앗을 심어 주면서까지.
진유성은 뛰어난 오성으로도 ‘어떤 존재’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나의 의도를 이해했구나.]
-대체 놈은 누구냐?
[그는 무대에 올라왔음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이야기 속에 나타남에도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선문답은 됐다.
[아마 너는 그의 존재를 알고 있으나, 인식한 적은 없을 것이다. 너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내게 필요한 건 선문답이 아니라, 정체다.
[아이야. 나는 이미 너무 많은 규칙을 어겼구나. 본디 내가 읽은 것은 너를 붙잡아 두는 곳까지였다.]
[하지만 나는 너에게 정보를 주었고, 씨앗을 심어 주었다.]
[그 존재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그리 되면 나는 너무 큰 규칙을 어긴 대가를 치러야 한다.]
[깊은 잠에 빠져, 제대로 된 결말을 맺을 수가 없느니라.]
-네가 말하는 결말이, 모든 것을 되돌리는 것이냐?
[그러하단다.]
-그렇다면 말하지 마라.
그 순간, 아카샤가 진유성을 향해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규칙을 더 어겨 보자꾸나.]
아카샤가 뭔가를 했다.
하지만 진유성은 그녀가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뭘 한 거냐?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압구정에는 게이트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니라.]
-…….
[뒤를 돌아보지 말고 나아가거라. 오직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고맙군.
아카샤의 모든 행동을 이해한 진유성의 말투는 꽤 누그러져 있었다.
-그, 혹시 검 같은 건 없냐? 좀 좋은 놈으로.
[너에게는 이미 입멸검이라고 부르는 엑스칼리버가 있지 않느냐?]
-복제품이잖아.
[후후. 아직도 네가 들고 있는 검이 가짜라고 생각하느냐?]
-이게 진짜 입멸검이라고? 설마 바뀐 거야?
[아니다. 그 검은 복제품이 맞다. 하지만 아이야. 네가 신을 베어 넘긴 검은 중원의 입멸검이더냐? 아니면 지구의 입멸검이더냐?]
-…….
[네게 가짜와 진짜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
-알고 있지. 고맙다. 많은 도움이 됐다.
진유성이 감사를 표하는 순간, 공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시간이 끝이 난 것이었다.
[나는 규칙을 어긴 대가로 깊은 잠에 빠질 것이다. 그 사이 내 딸이 너를 찾아갈 터이니, 그 아이의 말을 잘 들어주길 바라마.]
-무조건 들어줄 순 없지만, 가급적 고려해 보지.
아카샤가 심유한 마음으로 진유성을 쳐다보았다.
[아이야. 넌 언젠간 반드시 상실의 공간에서 잃어버린 ‘--’를 기억해 내어야 한다.]
[그게 이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는…….]
아카샤의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한 채, 진유성은 눈을 떴다.
휘이이잉-
차가운 눈보라가 온몸을 할퀴고 지나간다.
북극이었다.
진유성은 중국 국기가 걸린 북극 탐사 기지로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느낄 수 있었다.
이곳에서 막대한 영성이 흡수되었던 흔적을.
하지만 그보다 강렬한 흔적이 있었다.
이곳에서, 한 명의 무인이 ‘끝’에 근접했다.
진유성은 자신이 무공 경지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닫고는 곧장 끝을 봤다.
경지를 회복한 것이었다.
그때처럼 여기서 누군가 끝을 봤다.
자신이 품고 있는 소우주를 극한으로 팽창시켰다.
그럴 만한 사람은 한 명뿐.
‘신주청…….’
진유성의 끝과 신주청의 끝.
둘 중 누구의 끝이 더 먼지는 직접 견주어 보기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진유성은 그보다 다른 것이 궁금했다.
마도사들의 편에 붙었다고만 생각한 신주청이 어찌하여 로스차일드를 죽였을까.
그의 진짜 목적은 무엇일까.
그게 궁금했다.
* * *
그렇게 무대 위로 막이 내렸다.
퇴장할 인물들은 무대 위에서 퇴장하고, 새로운 인물들이 무대 위로 등장하며…….
이야기는.
최종장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