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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290화 (290/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90화>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 보는 아득함이었다.

이는 놀라운 일이었다.

진유성은 멸마대에 갓 들어왔을 때 무공의 일초반식도 몰랐던 양민이었다.

물론 고려의 왕족이었던 그를 양민이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무공은 전혀 몰랐다.

하지만 진유성은 초절정의 수위를 넘나드는 교관들을 보면서 ‘언젠간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라는 생각을 품었었다.

처음엔 망상인 줄 알았으나, 망상이 아니었다.

멸마대를 빠져나오면서 직접 증명했으니까.

그런 진유성이 지금껏 무언가를 보고 아득하다고 느낀 적은 딱 한 번뿐이었다.

해남의 이름 모를 섬.

거기에 남겨진 입멸공.

그때 받았던 것과 흡사한 느낌이었다.

‘설마, 전능을 집어삼킨 이가 있는 것인가?’

그는 동대문 DDP 게이트에서 잊고 있던 사실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바로, 자신이 해남에서 입멸공을 흡수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거기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걸 그대로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빚어냈었다.

이 말인 즉, 아직 해남에는 전능의 힘이 남아 있다는 소리다.

그러니 누군가 그걸 흡수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중원에 남은 짭유성이지만, 아마도 놈은 흡수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놈이 ‘진유성’이란 인간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말이었다.

진유성은 정신을 집중했다.

그에겐 모호한 상황에 빠질 때마다 해 오던 행동 강령이 있었다.

첫 번째, 공간을 인식한다.

이 공간의 실체와 자신의 인식 사이의 괴리감을 확인한다.

푸른색의 빛들이 번지고, 그 사이로 인과율이 떠도는 공간.

게이트에서 게이트로 이동하기 위해 늘 이용하던 곳.

‘내가 베어 낸 공간의 틈이 맞다.’

혹시 환상일까 싶었지만 아니었다.

두 번째, 스스로의 무(武)를 인식한다.

진유성이 내면에 품고 있는 소우주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소우주를 최대한 확장시켰고, 최소한으로 축소시켰다.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재단했고, 할 수 없는 불가능을 확인했다.

그렇게 진유성은 확신을 얻었다.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는 전무하다.

이제 남은 건 마지막이었다.

마지막, 상대를 인식한다.

흔히 사람들은 도량이 넓은 사람을 두고 ‘그릇이 크다.’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여기서 말하는 ‘그릇’이란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우주’이다.

무공이 소우주(小宇宙)라고 불리는 것도 결국 그것이 인간이 품은 우주 아래 포함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릇이 큰 것과 특정 분야에 통달한 것은 다른 문제이다.

제갈공명은 학문에 통달했지만, 유비현덕보다 그릇이 넓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비란 사람을 주군으로 모셔서 자신의 쓰임새를 맡긴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진유성은 눈앞의 아득한 존재를 인식하기로 마음먹었다.

정신을 집중했다.

그의 우주가 확장되며 인식하고 인지하는 범위가 점차 늘어난다.

지금의 상태에서는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중원에서는 지구의 자전에 대해 몰랐기 때문에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그렇게 진유성의 우주가 끝없이 확장되었고, 마침내.

툭.

그의 인식이 ‘무언가’에 닿았다.

그 순간, 진유성은 파르르 떨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물을 본 맹인처럼.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리를 들은 농인(聾人 : 청각장애인)처럼.

그렇게 떨었다.

그 떨림은 공포가 아니었다.

오히려 설렘이나 기쁨에 가까웠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미의 품에 안긴 아이처럼.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인을 품은 소년처럼.

그렇게 진유성은 여인을 보았다.

그 여인은 때론 어머니 같았고, 때론 주혜미 같았으며, 때론 유혜연 같았고, 때론 상소윤 같았다.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여인들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그 순간, 그녀의 놀란 듯한 심상이 들렸다.

[아이야, 어찌 날 인식한단 말이냐?]

-넌 누구냐.

[나의 딸조차 날 인식하지 못하여 그저 알고만 있을 뿐인데…….]

-누구냐고 물었다.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들린다. 너의 심상이 내게 온전히 전해지는 것이 너무나 놀랍고, 즐겁구나.]

-즐겁다고?

[아이야, 너는 정말로 위대한 존재란다. 어찌 인간이 그런 힘을 품었는지 믿을 수 없는 존재란다. 모든 걸 알고 있음에도, 도무지 너란 존재에 대해서는 읽을 수가 없구나.]

진유성은 까딱하면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아득함 속에서 심상 대화를 이어갔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실마리를 잡았다.

딸, 모든 걸 알고 있다, 읽는다.

그렇다면…….

-너, 전지의 존재냐? 타트바가 아카샤라고 부르던?

[그러하단다. 전지전능한 존재에게서 분화한 이후, 지적 생명체와 의미를 나누는 건 처음이라 몹시 즐겁구나.]

중원에 남은 입멸공은 신의 자아가 제거된 힘이었다.

그런 입멸공에서조차 진유성은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을 느꼈었다.

하지만 지금.

신의 자아가 존재하는 신의 힘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를 체감할 수 있었다.

아카샤의 존재감이 어찌나 거대하던지 집중하지 않으면 잠식당할 것만 같다.

어째서 전능의 존재가 상실의 공간을 넘으며 전능의 9할을 포기하고, 자아의 9할을 선택했는지 알 것 같다.

전능의 힘이 소우주라면, 그것을 품을 수 있는 자아는 우주이다.

마치 무공이란 소우주를 진유성이란 우주가 품은 것처럼.

‘놀랍도록 거대하군.’

진유성은 적잖이 놀랐다.

그는 신을 경애하고 신에게 굴복하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놀랐다.

하지만 진유성보다 놀란 것은 아카샤였다.

그녀의 화신인 타트바조차 자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데, 한 명의 인간이 자신을 온전히 인식하는 게 말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제 좀 낫군.

심상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진유성은 아카샤에게 조금씩 적응해 가고 있었다.

진유성이 물었다.

-날 찾아온 거냐?

[그렇단다.]

-왜?

[너를 잠시 붙잡아 둘 생각이었단다. 이렇게 대화까지 할 수 있을 줄은 몰랐지만.]

-왜 날 붙잡는다는 거지? 난 마지막 남은 마도사를 처단하러 가는 길이었다.

[알고 있단다.]

-애초에 마도사는 왜 가만히 둔 거지? 설마 마도사에 대해 모르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느냐. 나는 전지한 존재란다. 그들이 아카식 레코드로 들어온 이상 모든 것을 안단다.]

-그렇다면 왜?

물론 진유성은 타트바에게 아카샤가 움직이지 않는 것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아카샤는 주시자다.

그녀는 지켜보는 것만으로 이 세계의 영성이 기록하는 아카식 레코드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를 통해 인간의 풍요를 발전시킨다.

그런 그녀가 나서는 것 자체가 주시의 모순이 된다.

기록으로 발전한 세계의 기록자가 기록을 마음대로 수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전능이 된다.

기록을 바꾸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행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는 자신의 몸을 둘로 나눠 두 차원의 위상을 전지와 전능으로 구분하려던 신의 의도를 위반하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카샤는 지켜보고만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러한 전제 조건은 방금 틀어졌다.

아카샤는 분명 진유성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다.

그래서 묻고 있는 것이었다.

-왜냐고 물었다. 아카샤.

아카샤는 크게 놀랐다.

신의 본체를 목격하고도 그것을 이성으로 재단할 수 있다는 것은, 두 존재의 그릇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그녀지만, 진유성이란 아이에 대해서는 읽을 수가 없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이 아이는 특별하다.

[널 붙잡아 두는 곳까지가 내가 읽을 수 있는 곳이었구나. 이미 읽은 것은 벌어질 일이란다.]

-헛소리를 그럴듯하게 하는군. 미래에서 왔다는 거냐?

[그보다는 전지전능한 분이 작성한 마지막 페이지라고 해 두자꾸나.]

-나는 신의 의지에 따라 인간의 생애와 운명이 결정된다고 믿지 않는다.

[그런 뜻이 아니란다. 그저 신께서 너를 믿었다고 생각하면 된단다.]

-그렇다면 왜 내가 마도사에 가는 걸 막는다는 거지? 설마 이유도 모른 채 행동했다고 답하진 않겠지? 전지의 존재여?

이어진 아카샤의 답변에 진유성이 눈을 크게 떴다.

[마도사는…….]

* * *

로스차일드가 심상을 흩뿌렸다.

[때가 되었다. 월성.]

아포칼립스가 시작되고 열흘.

수많은 인간들이 죽으며 충분한 영성이 흩뿌려졌다.

대기 중에 혼탁하게 흩뿌려진 영성을 일순간에 흡수해서 아카식 레코드의 공동 관리자가 되겠다는 계획을 실현할 때가 된 것이었다.

로스차일드가 할 일은 간단했다.

단 한 순간,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된 모든 레코즈의 무게를 떠받들면 된다.

아카식 레코드에는 모든 인류의 색(色)이 기록되어 있고, 그걸 떠받칠 수만 있다면 그는 신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첫째와 셋째의 힘을 흡수해야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로스차일드는 형제들의 힘을 흡수하지 못했고, 그 대신 월성을 이용하기로 했다.

월성의 영혼은 중원에서 왔지만 육신은 지구에서 태어났다.

즉, 그는 아카식 레코드 안에 포함된 존재이다.

기록 밖에서 온 존재가 기록을 짊어지는 것과 기록 안에서 온 존재가 기록을 짊어지는 것은 그 부담이 다르다.

기록을 짊어지는 주체는 로스차일드지만, 그 부담을 월성과 나누려는 것이었다.

잠시 뒤, 로스차일드의 부름을 받은 월성이 두터운 코트를 입은 채 나타났다.

“생각보다 느리군.”

[추위에 영향을 받지도 않으면서 옷이 화려하군.]

“기분 탓이라고 해 두지.”

그들이 머물고 있는 것은 북극의 기지였다.

본래 중국이 과학적인 연구를 위해 마련한 곳이었는데, CSG가 이곳을 강제로 흡수했다.

이 말은 곧, 중국이 CSG의 손아귀에 넘어갔다는 것이었다.

“내가 뭘 해야 하지?”

[그저 의지를 품으면 된다. 나와 같이 아카식 레코드를 떠받들겠다는 의지.]

“시작해라.”

그들은 커다란 의식을 앞에 두고 뜸을 들이거나,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 간절히 기다린 일이었다.

스으으으으으-

거대한 풍선의 바람이 빠지는 소리가 들리며, 로스차일드의 몸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상실의 공간에서 백과 육을 잃어 영과 혼만 남은 망집의 괴물에게는 신체가 없다.

그러니 지금 부풀어 오르는 것은 로스차일드의 몸이 아니라, 의식이었다.

이윽고.

고오오오오오-

하늘을 떠돌던 잉여 영성들이 일순간에 북극의 하늘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영성이 소용돌이치며 한곳으로 내리꽂기 시작하자, 북극에 바람이 불며 눈보라가 쳤다.

소용돌이의 핵 속에 존재하던 로스차일드가 영기를 폭발시켰다.

그의 신체를 구성하던 영기가 거대한 영성의 흐름에 편승하기 시작한다.

주홍빛이었던 영성의 소용돌이가 점차 검은색으로 물들고, 원심력에 이끌린 잔여 영성들이 또다시 모여든다.

북극 전체가 소름 끼치도록 고요해졌다.

----!

너무나 거대한 소리가 세상을 잠식하면서 모든 소리를 지워 버린 것이었다.

그 순간, 신주청은 로스차일드의 심상을 들었다.

[준비해라.]

신역에 도달할 준비를 끝낸 마도사가 아카식 레코드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쿵-

수백만 년 동안 쌓인 인간종의 기록을 얻기 위한 불청객이 문을 두드린다.

쿵-!

공격은 강맹했고, 문은 허술했다.

마침내.

쿵--!

문이 열렸다.

[드디어! 드디어……!]

로스차일드의 광소와 함께 불가해한 수의 레코즈가 쏟아져 내렸다.

로스차일드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레코즈였지만, 그렇다고 감당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월성과 함께라면.

하지만…….

[월성!]

신주청은 반응하지 않았다.

로스차일드와 함께 아카식 레코즈의 무게를 감당하자던 약속을 저버린 채로.

[월성……!]

신주청이 무료한 눈으로 로스차일드를 쳐다보았다.

“시끄럽게 굴지 마라.”

[이게 무슨 미친 짓이더냐! 너와 나는 격을 섞었다!]

“…….”

[지금이라도 흐름에 합류해라! 너를 용서해 주겠다! 너에겐 불살해의 징표가 있으니 내 말을 믿지 않을 이유가…….]

“멍청한 마도사여. 난 항상 궁금한 게 있었다.”

신주청이 물었다.

“대체 왜 내가 네놈의 편에 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지?”

신주청은 상실의 공간에서 진유성에 대한 마음을 잃었다.

하지만…….

화전민 모녀의 시신 앞에서 품었던 신념까지 잃은 것은 아니었다.

중원에서의 신주청은 그 신념을 진유성에게 맡겼다.

그리고 보좌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진유성을 경외하지 않으며, 친애하지 않고, 존중하지 않는다.

그러니.

“난 인간의 왕이 될 것이다.”

월(越)은 넘는다는 뜻이다.

그러니 월성이란 이름 자체가 진유성을 넘어서겠다는 그의 포부였다.

[내가 소멸하면 너도 격이 붕괴돼서 소멸한다는 걸 모르는 것이냐!]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신주청은 로스차일드와 격을 섞었지만, 그것은 동등할 때의 이야기다.

한 존재의 격이 상대방을 압도한다면, 소멸당할 이유가 없다.

[감히! 감히……! 그게 가능할 것 같느냐! 나는 신에 도전하는 인류 역사상 유일한 마도사다!]

“시끄럽군.”

신주청이 검을 빼 들었다.

그리곤 휘둘렀다.

일검이 로스차일드의 본체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는 아카식 레코드의 무게를 간신히 견디고 있던 로스차일드에게 사형 선고와도 같았다.

와르르르르르.

기록이 쏟아져 내린다.

감히 기록을 탐냈던 마도사를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짓누른다.

[너도 소멸할 것이다! 너의 존재는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로스차일드가 소멸했다.

인류 최악의 마도사로 불렸던 존재의 마지막치고는 몹시 허무한 결말로.

신주청은 검을 납검했다.

그리고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제 스스로의 격을 올릴 시간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도 로스차일드의 뒤를 따르게 될 것이니까.

잠시 뒤, 북극에서 거대한 존재감이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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