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288화 (288/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88화>

* * *

‘나쁘지 않은 놈이군.’

진유성은 백악관을 빠져나오며 대통령에 대해 떠올렸다.

김기영이란 이름을 가진 놈은 거창한 정의나 신념 같은 걸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리려는 의지가 있었고, 일의 우선순위에 대해서 빠르게 파악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효율적이다.

대통령은 진유성의 말을 완전히 믿기 때문에 국가로부터의 초월을 약속한 것이 아니다.

믿지 않더라도 그렇게 해주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대통령은 남은 수명이 얼마 되지 않는데,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죽기 전에 한국에 일상을 되찾아 주고 싶어 했다.

이게 진유성이 1시간이란 짧은 시간 만에 대통령과 원만한 합의에 다다를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압구정으로 향하던 진유성이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슬프게도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나마 지나다니는 이들도 차를 타고 다니지, 도보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도 한국은 국가의 이성이 유지되는 거의 유일한 나라였다.

사실, 하루에 500명씩 죽는다고 쳤을 때, 한국 인구 5천만 명이 모두 죽는 데 걸리는 시간은 273년이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종말에 이를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뿐만인가?

인터넷이나 스마트폰도 멀쩡하게 사용할 수 있고, TV에서는 재방송일지언정 예능 프로그램들을 틀어 주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 전체는 패닉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실낱같이 유지되는 일상이 아니었다면 패닉이 훨씬 가속화됐을 것이었다.

미국이나 중국에서는 이미 총화기로 무장한 갱단들이 소도시를 집어삼켰다고 한다.

워낙 땅덩어리가 넓은 국가들이라 각성 역량을 주요 도시들로 집중했는데, 거기서 제외된 도시들이 무정부 상태에 빠진 것이었다.

아마 시간이 흐르면 한국도 이와 비슷해질 것이었다.

그러니 이 패닉이 극에 달하기 전에 아포칼립스 사태가 종료되어야 한다.

생각해 둔 해결책도 있었다.

하늘에 불길한 주홍빛의 기류가 천천히 선회하고 있다.

일순간 너무 많은 인간이 죽었고, 그 영성이 제대로 순환되지 못하며 생긴 부유물.

잉여 영성.

진유성은 저 부유물들을 통해 마도사의 위치를 추적할 생각이었다.

허공을 부유하는 영성들은 결국 마도사가 흡수하기 위해서 쌓고 있는 것이다.

저 많은 영성을 어찌 한 번에 흡수하려는지 모르겠지만, 뭔가 수단이 있을 것이다.

그때가 진유성이 마도사를 찾아내는 순간이다.

물이 빨려 들어가는 곳에는 수챗구멍이 있듯이, 영성의 빨려 들어가는 곳에는 마도사가 있다.

게다가…….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그가 보기에 잉여 영성은 거의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기류의 회전이 점차 느려지고, 부유물들이 지상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어제, 상소윤이 마당에 나무를 두 그루를 심었다.

묘목을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르겠는데, 하루 종일 집에 있다가 상림과 나갔다 오며 묘목을 가져온 것이었다.

“내일 세상이 멸망하지 않으니, 난 두 그루의 나무를 심을 거야.”

약간의 헛소리와 함께.

그렇게 나무를 심고, 물을 준 뒤 모두가 잠에 들었다.

한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나무가 한 뼘 정도 자라 있었다.

나무가 콩나물도 아닐 터인데 하룻밤만에 한 뼘이 자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는 간밤에 추적추적 내린 비를 따라서 나무에 스며든 영성이 영향을 끼쳤다는 소리다.

‘길어 봐야 한 달이다.’

어쩌면 그보다 훨씬 짧을 수도 있었고.

그때 진유성의 스마트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를 확인해 보니 상림이었다.

-교주님, 아랍에미리트의 왕족들이 달러를 바리바리 싸들고 왔는데 어쩌죠?

“무슨 소리야?”

-압구정 상가를 하나 내어 달랍니다. 돈은 달라는 대로 준다고.

“일반인들이야?”

-왕족들은 일반인인데, 각성자 경비원들을 오십 명 가까이 거느리고 있습니다. 가드들도 많고요.

아랍 국가들은 SG에 가입하지 않았고, 아랍의 각성자들은 국가에 충성하지 않는다.

막대한 부를 거머쥔 왕족의 사병처럼 이용된다.

문제는 이들이 아포칼립스 사태가 발발하자 사병들을 이끌고 압구정으로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저들이 저렇게 각성자를 독점한다면 국가의 국민들은 대체 누가 지킨단 말인가?

“헛소리 말고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해.”

진유성은 생명을 차별하진 않지만, 저들은 압구정이 아니더라도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

왕족이 엄선한 오십 명의 각성자라면 대부분이 강할 것이니까.

-내어주지 않으면 무력 시위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아놀드 벡은?”

-서대문에서 열린 게이트에 들어갔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한지후 본부장한테요.

“별게 다 귀찮게 하네. 기다려. 곧 간다.”

물론 현재 압구정에는 빈 건물들이 제법 있다.

하지만 대통령과 약속한 것 중 하나가, 거주할 곳이 없는 이들을 압구정으로 인도하는 것도 있다.

현재 뉴스의 시청률은 80%가 넘는다.

전 국민이 밤만 되면 뉴스를 보고 있다는 소리.

거기서 압구정이 안전한 곳이라고 광고를 하면 전 국민이 몰릴 수도 있다.

진유성은 그걸 원했다.

당장은 지내기 불편하더라도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밀집해 있어야 지키기 쉽다.

전화를 끊은 진유성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경공을 사용했다.

직선거리로 돌파하니 5분도 안 걸려서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데, 집에 도착해서 생각해 보니 화가 난다.

이들이 정확히 상림의 집으로 왔다는 것은 한국에 끄나풀이 있다는 소리다.

그렇지 않으면 청와대나 SG 본부로 갔겠지.

그런 놈들이 압구정의 건물 한 채를 내어 달라는 건, 지낼 곳이 없는 게 아니다.

특권 의식이다.

그때, 진유성을 뒤늦게 발견한 각성자들이 흠칫 놀라며 왕족을 둘러쌌다.

그 속에서 누군가 걸어 나와서 영어로 물었다.

“당신이 언노운 엠페러입니까?”

“너, SS급이냐? SSS급에 거의 근접했지?”

진유성의 물음에 남자가 살짝 당황했다.

각성 등급이란 본인이 밝히지 않으면 모르는 법인데, 보자마자 정확히 등급을 잡아낸다.

실제로 그는 아랍의 랭킹 1위인 각성자였다.

“왜 그러십니까?”

“그런 새끼가 돈 준다고 부자 뒤를 따라다녀? 시민들은 죽으라고 놔두고?”

“무례하시군요. 우리 아랍에서는 왕족을 지키는 것이 곧…….”

짝!

진유성의 손이 움직임과 동시에 멀뚱멀뚱 서 있던 여섯 명의 왕족들의 뺨이 돌아갔다.

아랍의 각성자들이 깜짝 놀랐다.

분명 그들은 왕족을 몸으로 가리고 있다.

한데 그들을 무시해 모든 왕족의 뺨을 동시에 후려치다니?

“너희들을 건드리지 않는 건 예뻐서가 아냐. 온전한 전투력을 보전한 채로 한국에서 게이트나 클리어하라는 거야. 알아먹어?”

그렇게 말한 진유성이 상림에게 물었다.

“야, 각성자가 가장 부족한 곳이 어디냐?”

“당연히 제주도죠.”

“조금 이따가 대통령이 필요한 모든 일을 처리해 줄 사람들 보낼 거야. 그때 이 자식들 제주도로 보내 버려.”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본인들이 타고 온 전용기가 있을 텐데.”

“아, 그런가?”

“근데 이놈들이 거기서 제대로 일을 할까요?”

“게이트에 빨려 들어가면 살려고 발버둥 치겠지.”

그사이, 통역가를 통해 진유성과 상림의 한국어 대화를 전해 들은 각성자들의 얼굴에 분노가 어렸다.

여기 있는 이들은 아랍에서 100위 안에 드는 하이랭커 중의 하이랭커들이다.

제 아무리 언노운 엠퍼러에 대한 소문이 전 세계를 강타한다고 해도, 쉽게 굴복할 순 없다.

그들은 압구정의 몇몇 구역을 지켜준다는 것을 조건으로 이곳에 자리를 잡으러 온 것이었다.

‘무력 시위가 필요하겠군.’

그들의 힘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시선을 교환한 53명의 아랍 각성자들이 전투태세에 돌입하려는 순간, 이들의 심동을 읽은 진유성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아랍의 각성자들은 자신이 태양을 쳐다봤다고 생각했다.

태양은 맨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풀썩, 풀썩.

53명의 각성자가 모두 기절했다.

진유성은 기절한 각성자들을 헤치며 왕족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멀더의 술법으로 그들의 언어를 익혀서 입을 열었다.

“두 개의 선택지를 주마. 제주도에서 얌전히 쉴래? 아니면 너희들을 다 죽이고 이들을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줄까?”

지금 당장은 고용주 앞이라 의무를 다하고 있지만, 모든 왕족이 죽으면 이들은 자유 각성자들이 된다.

이들의 왕족의 복수를 해 줄 리는 없다.

아니, 애당초 복수가 성립되는지도 모르겠고.

진유성의 눈빛을 받은 왕족 중 한 명이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슬퍼서도, 아파서도 아니다.

무서워서였다.

“다 제주도로 가라. 만약 다른 지역에서 너희들이 발견 되면, 그때는 모두 죽일 거다.”

왕족들이 딸꾹질을 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진유성이 손짓하자 비 각성자 가드들이 각성자들을 등에 업었다.

상림은 아랍의 왕족들을 컨트롤하는 진유성의 모습을 보며 강한 기시감을 느꼈다.

한국에서의 진유성은 언제나 즐거워 보였고, 매 순간 재미있는 것들을 찾아 헤매는 사람이었다.

지금, 상림의 눈앞에 있는 건 대정고 3학년 1반의 진유성이 아니었다.

멸마대와 생존대의 진유성이다.

그게 상림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때, 진유성이 상림을 쳐다보며 인상을 팍 썼다.

“뭘 봐, 대머리 고자.”

“아니, 제가 그 흉측한 단어 좀 쓰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내가 아까 위정자들 머리카락을 다 밀어 버리려다가 참았거든?”

“왜 참으셨어요?”

“괜히 앙심 품을까 봐. 지금은 앙심을 품을 때가 아니라, 일을 할 때거든.”

“그건 그렇죠.”

“그래서 내 손이 근질근질해. 모발 맛을 보고 싶어서.”

“에이, 모발 놈.”

“뭐?”

“아뇨. 이 모발 놈이 제 속을 썩인다고요. 기왕 두피에서 자라날 거면 좀 튼튼하게 자라지.”

“……기분이 묘하게 나쁘다?”

“네? 왜요. 제 머리카락을 욕한 건데. 모발 놈.”

“…….”

진유성에게 한 대 맞기 직전, 상림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식료품은 지금처럼 뿌릴까요?”

“어.”

“3개월밖에 못 버티는데요?”

“그 정도면 충분해.”

진유성의 말에 상림의 얼굴에 안도가 어렸다.

그는 진유성의 판단을 믿었다.

진유성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아, 참. 아멜라 메건은 한지후 본부장의 부탁을 받고 해남으로 내려갔습니다. 해남에서부터 순차적으로 올라오면서 각성자들을 교육할 거래요.”

“그래? 결국 얼굴도 못 봤네.”

아멜라 메건은 한국에 도착해서 아주 큰 업적을 하나 만들어 냈다.

이제 게이트는 독립적인 공간이 아니라 지구에서 열린다.

게이트가 발생하면 공간이 유리되긴 하지만, 이는 물 밖과 물속처럼 약간의 굴절이 일어날 뿐이었다.

공간 자체는 동일했다.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은 아멜라 메건은 정신계 각성자들이 게이트 안과 밖에서 소통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즉, 게이트 안에서 게이트 밖으로 정보를 전달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진유성은 게이트를 찢고 들어갈 수 있다.

그러니 극히 위험한 게이트가 발생해도 진유성에게만 정보를 줄 수 있다면, 클리어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방법을 정신계 각성자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 전국으로 교육을 떠나는 것이고.

듣자하니 이미 우산도의 정신계 각성자들에게는 방법을 전수했다고 했다.

우산도 멤버들이 다른 이들에게 전수하면 퍼져 나가는 것은 금방일 것이고.

“해남까지 누가 따라갔어?”

“혼자 갔습니다.”

“혼자? 걔 정신계라서 약하지 않나? 등급도 AA였던 것 같은데.”

아놀드 벡에 따르면 아멜라 메건은 아카샤의 화신인 타트바와 소통하기 위해 각성 등급을 키울 여력이 없다고 했다.

그 순간, 상림이 고개를 갸웃했다.

“에이, 그래도 아멜라 메건인데요. 정신계 최초의 고위 각성자 아닙니까. 제가 보기엔 강해 보이던데요?”

“그래?”

“근데 교주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뭐?”

“교주님이 보시기엔 아멜라 메건도 박색해 보이십니까?”

상림의 물음에 진유성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말은 곧, 상림이 보기에는 아멜라 메건이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그 순간, 진유성의 몸이 흔들리더니 상림을 지나쳤다.

그리고는 냅다 문을 열고 외쳤다.

“외숙모! 상소윤!”

진유성의 의도를 파악한 상림이 기겁했지만, 그는 진유성을 붙잡을 실력이 못 됐다.

무슨 일이 발생한 줄 알고 허겁지겁 뛰어나왔던 유혜연과 상소윤이 상림의 말을 전해 듣는 건 순식간이었다.

“아, 그렇구나. 아멜라 메건이 그렇게 예쁘구나.”

“아니, 여보. 그게 아니고…….”

한데, 상소윤의 반응이 좀 묘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냐?”

진유성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박색하다고 했다.”

상림이 인상을 팍 썼다.

분명 진유성은 저런 말을 안 했다.

생각해 보면 대답 자체를 피했었다.

“읍!”

한데, 말을 하려고 보니 어느새 아혈이 점혈당해 있었다.

‘억울해!’

전쟁 속에서도 사랑은 피어나고, 지진 속에서도 꽃은 피듯이.

그들은 힘든 시간 속에서도 찰나의 웃음을 피워 내고 있었다.

“읍읍!”

억울한 상림만 빼고.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