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87화>
Quest 45. 마주한 천마님
특정 구역에 게이트가 생성되기 시작하면, GEL 수치를 감지한 SG가 대피 명령을 내린다.
대피 명령은 생각보다 급하게 진행되진 않는다.
GEL 수치가 감지된 게이트가 완성되는 데 최소 5일에서 최대 10일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랜 시간동안 사람들은 ‘긴급한 게이트 사태’에 직면한 적이 없었다.
물론 갑자기 생성되는 비징후 게이트가 있긴 했다.
하지만 전 세계에 비징후 게이트가 등장한 횟수는 한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다.
그렇게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게이트를 위험하기보다는 번거롭게 여기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의 집단 지성이 이룩해 낸 승리였다.
분명 게이트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모두가 종말을 떠올렸으니까.
하지만…….
앞으로의 게이트는 인간의 승리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뉴욕 브루클린 북동부의 작은 소도시, 파시말.
거주민 대부분이 공장 노동자인 이곳에 게이트가 열린 건,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새벽 4시였다.
* * *
파시말에 거주하는 세이브는 목이 말라서 잠에서 깼다.
눈을 뜨니 어두컴컴한 방 안 천장이 보인다.
그 순간, 그는 의아함을 느꼈다.
내가 정말로 목이 말라서 깼나?
물을 마시고 싶지 않은데?
그럼 이제 뭘 하지?
그리고, 다시 한번 의아함을 느꼈다.
뭘 하냐고? 당연히.
살아남아야지.
“헉!”
세이브가 이불을 걷어차며 반사적으로 몸을 굴렸다.
-크엉!
괴성과 함께 우지끈 소리를 내며 침대가 반으로 쪼개졌다.
세이브는 사태를 파악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서 거실로 달리기 시작했다.
스스로가 놀랄 만큼 기민한 움직임이었지만…….
-크르르르릉!
이미 거실에는 다른 무언가들이 있었다.
거실로 나오자 달빛 너머로 놈들의 실루엣이 보인다.
TV에서나 보던 몬스터였다.
“씨, 씨발!”
욕을 내뱉으며 창고로 달려간 세이브는 샷건을 꺼내들었다.
철컥, 탕! 철컥, 탕! 철컥, 탕!
두 놈이 총을 맞고 쓰러졌다.
탕! 탕! 탕!
다시 두 놈이 총을 맞고 쓰러졌다.
하지만 총의 살상력이 발휘된 건 아니었다.
몬스터들은 그저, 강한 운동 에너지에 피격당해 뒤로 나동그라졌을 뿐이었다.
그 증거로 총에 맞았던 몬스터들이 별 이상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으니까.
미친 듯이 총을 쏘던 세이브는 더 이상 총알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크엉!
몬스터들이 바닥을 박차며 달려든다.
달빛을 받은 손톱이 예리하게 빛나고, 그 예리함이 세이브의 목을 긋기 직전.
프스스스스스-
몬스터들이 난데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세이브의 심장은 이미 정지한 뒤였다.
극한의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었다.
전 세계에 동시 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 * *
미국, 백악관.
“게이트 폭주는 사라졌습니다. 이제 게이트 클리어에 실패해도 폭발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대신, 잔존한 몬스터들이 일정 시간동안 현실에 남아서 시민들에게 물리력을 행사합니다.”
“일정 시간이라면 정확히 얼마입니까?”
“아무래도 게이트 등급마다 다른 것 같습니다. 파시말에서는 클리어 실패 이후 10분, 퀸스브릿지에서는 15분, 런던의 맨체스터에서는 32분이 관측됐습니다.”
요원들의 보고에 미국의 대통령이 침통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망자는 얼마입니까?”
“게이트 내에서 파시말 426명, 퀸스브릿지 481명입니다. 영국의 맨체스터에서는 190명가량으로 추정됩니다.”
“게이트 밖에서는요?”
“파시말 134명, 퀸스브릿지 109명, 맨체스터 약 170명 가량입니다.”
대통령이 떨리는 손으로 요원이 내미는 보고서를 넘겼다.
요원이 보고서에 기록한 내용은 미국이 비교적 명확한 수치를 파악한 케이스들이다.
그리고, 수치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아직 사회 시스템이 정상 작동하고 있음을 뜻했다.
차라리 이러면 다행이다.
인도 수도의 게이트에서는 만 명이 넘게 죽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지만, 진위 여부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정부가 무너지고 있으니까.
단 하루 만에 미국 내에서 수천 명이 죽었다.
과연 전 세계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을까?
미국의 대통령이 되기까지 무수히 많은 일을 경험했지만, 지금처럼 두려운 적은 없었다.
국민들은 안정시킬 정치적인 쇼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한 명의 인간으로서 두려움에 떨 뿐이다.
그때 요원이 입을 열었다.
“해외 요원이 아놀드 벡의 최종 행선지에서 그를 찾았습니다.”
“어디 있습니까? 그는?”
“한국의 압구정에 있습니다. 아멜라 메건과 함께.”
“압구정……?”
“맞습니다. 사망자 0명의 게이트가 발생했던 그곳입니다.”
“당장 귀국하라고 하세요.”
“아놀드 벡이 메시지를 전해 왔습니다. 작금의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이가 압구정에 있고, 자신은 그를 서포팅해야 한다고.”
“서포팅……?”
“정확히 그 단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전 세계가 황제라고 부르던 최초의 SSS급 각성자가 입에 담았다고는 생각하기 힘든 단어였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대통령이 물었다.
“혹시 언노운 엠페러입니까?”
“아놀드 벡이 입에 담지는 않았으나, 정황상 그렇게 추측됩니다.”
“대체 언노운 엠페러가 뭐 하는 각성자입니까?”
그 누구도 대통령에 질문에 속 시원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루의 시간이 더 지나고, 또다시 수천 명이 죽었다.
그때쯤 아직 작동하는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압구정에 신이 강림했다고.
각각의 나라를 경영하는 위정자들은 헛소리에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신을 운운한단 말인가.
혼란한 시대를 틈타서 한국에 사이비 종교라도 출현한 모양이라고.
하지만 다시 하루가 흐르고.
수많은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국
사망 153 / 부상 621
한국의 사망자가 점차 줄어든다.
첫날에는 800명에 육박하는 사망자를 냈지만, 이튿날에는 400명대, 삼 일차에는 100명대로 줄어든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부상자의 수치였다.
현재 게이트 사태에서 부상자는 그다지 발생하지 않고 있다.
정부는 게이트가 발생하면 인근 거주민들을 곧장 대피시킨다.
게이트 클리어에 실패하면 몬스터들이 한동안 물리력을 행사하니, 그 지역 자체를 비워 버린다는 것.
불행 중 다행히도 몬스터들은 생성 지역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게이트에 빨려 들어가 죽거나, 피난민이 되어서 도망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부상자가 발생할 여지가 없다.
게이트 안에서 다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이 경우에는 부상자가 아니다.
게이트 안에서 다쳤지만 살아남는다면, 그는 각성자가 된다.
각성자가 되면 전투가 아닐 때 포션을 사용할 수 있다.
포션은 비 각성자에게는 무의미한 것이지만, 각성자들에게는 유의미하다.
그러니까 153명의 사망자와 621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는 한국의 보고는 아주 의미심장했다.
그들은 게이트로 강제 진입하는 법을 알아낸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많은 부상자가 발생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게이트로 진입한단 말인가?
전 세계의 게이트 과학자들이 20년이 넘게 연구해도 알아내지 못했던 것인데.
그때쯤 전 세계에 ‘소문’이 아니라 ‘보고’가 들어왔다.
한국의 압구정에 신이 강림했다고.
한국이 큰 문제없이 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건, 한 사람의 힘이라고.
그는 게이트를 넘나들며 몬스터들을 학살하는데, 그의 힘을 목격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라고.
부자들이 이성적이고 냉정하다는 건 할리우드 영화가 만들어낸 기믹이다.
부자들 역시 죽음 앞에서 한 명의 사람일 뿐이다.
돈이 너무 많아 주체할 수 없는 부자들은 마음을 정했다.
이 세상에 종말이 내려앉았다면, 가장 생존 가능성이 높은 건 기적이 벌어지는 땅이 아니겠는가.
전 세계의 부자들이 개인 비행기를 타고 무작정 압구정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 *
“대체 그자는 누굽니까?”
“진유성. 대정고에 재학 중이며, LF 건설의 상림 대표의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블랙마켓에서 신분을 산 것 같습니다.”
“경제 활동은 어때요?”
“KPM의 제휴 업체인 CMSG란 기업의 실질적인 소유자입니다.”
“아니, 재력 말고 활동은 어떠냔 말이에요. 어떤 방식으로 돈을 벌었고, 썼고!”
“그게…… 알 수 없습니다.”
“뭐요?”
“아무래도 JC 그룹에서 대부분의 흔적을 설거지한 거 같습니다.”
“김정철…….”
김정철 회장이 난데없이 KPM을 만들고 성공한 것에 의구심을 품는 이들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김정철이 아놀드 벡, SG와 접촉한 것을 알고 있었기에 뒷배에 의심을 품진 않았다.
그러나 이제 보니 김정철 회장의 배경은 아놀드 벡이 아니었던 것 같다.
언노운 엠페러다.
“김정철 회장에게 국회로 출석을 요구하세요.”
“이미 했습니다. 하지만 와병 중이라는 이유로 연기를 신청했습니다.”
“강제로 집행하세요! 계엄령이 선포됐습니다! 한지후 본부장과 함께!”
“하지만…… 그들은 언노운 엠페러를 등에 업고 있습니다. 군경의 힘으로 집행하려면 엄청난 피를 흘려야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봐야 각성자 한 명 아닙니까?”
“기존의 각성자와 완전히 다릅니다. 어쩌면 그는 정말…….”
국정원장이 뒷말을 흐리자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헛기침을 해댔다.
“크흠.”
불편한 것이었다.
한 개인의 영향력이 한 국가를 뛰어넘는다는 게.
보고를 끝낸 국정원장이 눈치를 보다가 사라지고, 국정회의실에는 침묵이 맴돌았다.
침묵을 깬 것은 대통령실의 비서실장이었다.
“진유성의 약점을 잡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에게 약점이 있습니까?”
“LF 건설 상림 대표의 가족들과 아주 가깝게 지낸다고 합니다.”
각성자들이 국가의 명령을 듣는 건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SG가 그런 기저를 만들어 냈으니까.
둘은 국가가 작정하면 고립되니까.
국가는 게릴라전을 펼치는 고위 각성자에게 수갑을 채우는 게 힘들다.
하지만 각성자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는 아니다.
그에게도 부모가 있고, 형제가 있고, 배우자가 있다.
국가가 작정하고 각성자들의 가족을 압박한다면 각성자도 어쩔 수가 없다.
실제로 게이트 사태 초창기에는 이러한 일들이 종종 발생했다.
국가 안보를 위한다는 명제로 말이었다.
“구체적인 계획이 있습니까?”
누군가의 질문에 비서실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의 입을 통해 나온 이야기는 진유성에 대한 해답이라기보다는, LF 건설과 상림의 가족에 대한 제재였다.
그 순간이었다.
난데없이 회의실의 문이 열린 것은.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회의실의 출입문을 쳐다보았고, 이내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기에는 진유성이 있었다.
“여, 여기가 어디라고!”
누군가의 발작적인 외침에 진유성이 되물었다.
“여기가 어디냐?”
“…….”
“정치를 하는 곳이냐? 권력을 지키는 곳이냐?”
진유성이 한국에 와서 놀란 것 중 하나가 ‘정치’란 단어이다.
중원에서 정치는 고결한 단어였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정치질’이란 단어를 ‘협잡질’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한다.
뭐, 사실 중원의 위정자들이라고 고결한 행동을 한 건 아니었다.
어쩌면 시민들이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현대 사회이기 때문에 정치질이란 단어를 쓸 수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진유성이 천천히 회의실의 테이블을 향해 다가갔다.
“가, 가드!”
누군가 비명과 같은 소리를 지르자, 진유성이 손을 치켜들었다.
그리곤 테이블을 내리쳤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책상 위에 있던 볼펜들이 빙글빙글 돌며 허공에 떠오른다.
한데, 그게 내려오지 않는다.
허공에 떠오른 물건이라면 응당 중력의 영향을 받아 내려와야 하는데…….
여전히 볼펜은 허공에서 돌고 있을 뿐이었다.
“너희들은 한 자루의 펜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고, 나 역시 한 자루의 펜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진유성이 물었다.
“어느 쪽이 빠를 것 같으냐?”
명백한 무력 시위였다.
그러나 위정자들이 발이 풀린 것은 허공을 돌고 있는 볼펜 때문이 아니다.
언노운 엠페러에게서 뿜어지는 끔찍한 기운 때문이다.
“속세의 위정자들은 어딜 가나 변함이 없구나.”
그 순간, 기운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너희들은 가엽게 여긴다. 억지로 다가오는 죽음이란 놈이 너희들조차 비껴가길 원한다.”
툭, 툭.
허공에 떠올라 있던 펜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진유성이 물었다.
“대통령은 어디 있느냐?”
“관사에…….”
현재 대한민국 대통령인 김기영은 역대 대통령 중에 나이가 가장 많았다.
안 그래도 최근에 몸이 좋지 않았는데, 아포칼립스 발발 이후 급박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건강이 더욱 나빠졌다.
“그에게 안내해라.”
진유성이 비서실장을 가리키며 말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국정회의실을 나온 비서실장은…….
“이, 이럴 수가.”
모든 청와대의 보안 요원들이 벽에 비스듬히 주저앉아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아무도 죽지 않았다. 그저 잠들었을 뿐. 잡스럽게 굴지 말고 어서 안내나 해라.”
잠시 뒤, 진유성은 대통령과 1시간 정도 독대를 했다.
그는 대통령에게 모든 사법권과 행정권으로부터의 초월을 약속받았고.
게이트 사태의 종말을 약속했다.
진유성은 그렇게 대한민국의 위에 서서, 그들을 구원하는 인외(人外)의 존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