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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281화 (281/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81화>

* * *

지구의 변화를 감지한 진유성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은 네 명이었다.

상림, 유혜연, 상소윤, 상도윤.

그들의 얼굴이 떠오른 순간, 마음이 급해졌다.

집으로 가야 한다.

세상이 어떤 식으로 변질되었는지 알 수 없는 지금, 영월에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렇게 서킷 개러지에서 빠져나가려는데, 감독이 허겁지겁 다가와 진유성을 붙잡았다.

압박감이 사라지자 입을 열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 이봐! 어디 가는 거야?”

감독은 이 한국인이 자신의 실력을 어필하기 위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제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눌 차례였다.

하지만 이것은 오해였다.

진유성은 덤덤한 눈으로 감독과 워츠 마이빅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집으로 돌아가라. 곧 위험한 일이 발생할 터이니.”

“위험한 일?”

“일상이 박살날 거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겠지. 그러니 가족 옆에 있어라.”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지만, 허공을 떠돌아다니는 기류가 심상치 않다.

“그게 무슨…….”

감독과 워츠 마이빅의 황당한 눈빛을 받았지만, 진유성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허황된 소리로 여겨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앞으로 한국이 가장 안전한 국가가 될 터이니, 이들 입장에서는 한국에 있는 게 나을 수도 있었고.

그렇게 서킷 개러지에서 빠져나온 진유성은 곧장 공간을 찢어 서울역으로 향하려 했다.

서킷 개러지의 뒤쪽에는 외부인이 레이스를 구경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스탠드가 있고, 몇몇 사람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은 남들의 눈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 순간이었다.

“진유성……?”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옆을 돌아보니 최유리가 반가움과 놀라움이 섞인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스탠드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다가온 모양이었다.

“지, 진짜네? 여긴 어쩐 일이야?”

“최유리.”

“어?”

최유리는 기억 속의 진유성과 눈앞의 진유성이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얼굴과 목소리는 그대로지만, 분위기가 다르다.

레이싱 슈트를 입고 있어서일까?

“집으로 가 있거라.”

“뭐?”

“아니, 집이 어딘지 모르겠는데 서울이 아니라면 부모님을 모시고 서울로 올라와라.”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곧 동시다발적으로 게이트가 열릴 거다. 서울이 가장 안전한 지역이 될 거고.”

최유리가 진지한 진유성의 얼굴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가 기억하는 진유성은 4차원인데다가 언행이 굉장히 특이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대정고에 다닐 만큼의 재력을 가진 부자기도 했다.

‘혹시 부자들만 어떤 정보를 접한 건가?’

정말 국가적인 재난이 일어날 거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유성의 말을 단번에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혹시 지금 장난치는 거야?”

진유성은 최유리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인벤토리에서 가짜 입멸검을 빼들었다.

시퍼런 날이 보였다면 최유리가 깜짝 놀랐겠지만, 현재 입멸검은 검집에 얌전히 들어가 있었다.

“가서 역도부 친구들에게도 전해라. 그들이 믿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넌 믿었으면 좋겠구나.”

그렇게 말한 진유성이 발검했다.

촤아아악!

시퍼런 날이 허공을 수놓는 것과 동시에, 허공에 무언가가 번진다.

물통 안에 물감을 떨어트렸을 때처럼 색이 확산되는 느낌.

최유리는 그 색을 정확히 인지할 수 없었지만, 푸른색에 가까운 색이라고 느꼈다.

마침내 그 번짐이 진유성의 몸보다 커졌을 때.

진유성은 어느새 검을 납검한 채, 공간 앞에 서있었다.

급한 마음에 공간의 틈새로 들어가려던 진유성이 멈칫했다.

최유리에게 입멸검으로 공간을 찢는 모습을 보여 준 건, 그녀가 자신의 말을 믿기를 원해서이다.

최유리와 그는 어떻게 보면 별다른 인연이 아니지만, 또 어떻게 보면 큰 인연이다.

불가에서는 사람의 인연을 겁이라고 부른다.

이천 겁의 무게를 지닌 인연은 하루 동안 동행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고, 오천 겁의 무게를 지닌 인연은 이웃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불가의 가르침이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게 진실이라면.

적어도 최유리와 그는 몇만 겁의 인연은 쌓지 않았겠는가.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가서 진유성이 발걸음을 멈춘 것이었다.

어쩌면 오늘이 최유리와 대화를 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일 수도 있으니.

“그때는 내가 세상 물정을 몰랐다.”

“어?”

“인터넷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나오던 것들이 조금은 과장됐을지언정, 진실과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유성이 웃으며 말했다.

“오다 주운 게 아니라, 사온 것들이었다.”

최유리는 비로소 눈앞의 진유성이 그녀가 알던 진유성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알 수 없는 검으로 공간을 찢어발긴 것도 진유성이었다.

“너…… 각성자야?”

“무인이다.”

그는 타의에 의해 각성된 존재가 아니다.

내면의 소우주를 무(武)라는 주제로 갈고 닦은 인간이다.

최유리는 진유성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덧붙였을 뿐이었다.

“내 말을 무시하지 말고, 꼭 부모님 댁에 가 있어라. 갈 곳이 없어진다면 압구정으로 와서 날 찾아도 좋다.”

진유성은 최유리의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몸을 날렸다.

이천겁의 무게를 견뎌야 하루를 동행하고, 오천 겁의 무게를 견뎌야 이웃으로 태어날 수 있다.

그리고.

억겁의 세월을 견딘 인연만이 평생을 함께할 수 있다고 한다.

진유성은 그 누구와도 평생을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삶은 지난하고 고독하며, 아득하고 무겁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유성이 그것을 바라 본 적 없는 건 아니다.

그 역시 누군가와 억겁의 무게를 나눠 들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진유성은 함께 무게를 나누고 싶은 이들에게 가기 위해 공간으로 뛰어들었다.

새까만 공간이 그를 반긴다.

진유성은 마스터 플레이어의 자격을 증명했던 ‘인과율’을 통해서 서울역으로 이동하려고 했다.

하지만, 마스터 플레이어와 관련된 인과율은 커다란 변화를 맞이해 요동치고 있었다.

아놀드 벡은 말했었다.

본래 마스터 플레이어란 세쌍둥이 마도사들의 것이라고.

“애당초 패스워드는 인간에 대한 조롱에 가깝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만약 뉴욕, 아니 서울 한복판에 도로를 새로 낸다고 치죠. 그때 일방통행 도로와 쌍방통행 도로, 둘 중 어떤 것을 만드는 게 편하겠습니까?”

“당연히 쌍방통행이겠지.”

“사악한 존재들이 게이트를 만들고 인간들도 마스터 플레이어가 될 수 있도록 해 둔 이유도 그것 때문입니다.”

사악한 존재들만 마스터 플레이어가 될 수 있다면 그건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난 일이다.

즉, 아카샤의 절대 공간에서 게이트를 색으로 인식하지 않을 확률이 있었다.

그러나 인간들도 마스터 플레이어가 될 수 있다면?

이는 지닌바 힘의 문제일 뿐이지, 인간종과 이종의 문제는 아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패스워드와 마력만 있다면 마스터 플레이어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마스터 플레이어는 아포칼립스의 문을 열었고, 요동치는 인과율이 진유성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투화아아악!

투명한 빛과 기운이 자신의 온몸을 뒤덮었다.

본디 투명하다는 건 뒤가 비쳐 보이기 마련인데, 진유성은 투명한 빛의 뒤를 볼 수가 없었다.

기시감이 든다.

‘이건…….’

백여 년 전쯤 경험했던 일이다.

게이트를 열기 위해 만든 제단에 묻어 놨던 보석.

투명하다는 건 본디 뒤가 비쳐 보이기 마련인데, 이 보석은 투명한데도 꿰뚫어 볼 수가 없다.

‘정기와 사기가 섞여 있군.’

정확히 반으로 나뉘어져 있는 기운은 때론 서로를 핥고, 때론 서로를 밀어낸다.

태극도 아니고, 오행도 아니다.

진유성이 알지 못하는 법칙에 의해 기운은 화합과 충돌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 것이었군.’

그때는 잘 몰랐다.

반씩 섞여 있는 정기와 사기가 어떤 법칙으로 움직이는지.

상림이 떠나던 즈음의 진유성은 무림의 절대자였지만, 입신의 경지를 이룩하진 못했었다.

입멸공의 최종오의로 인과율을 다룰 수는 있었지만, 지금처럼 법칙을 이해하고 있진 않았다.

그래서 몰랐다.

하지만 이젠 알 수 있다.

이것은 가능성을 품은 인과율이다.

그리고 진유성은 이미 이 가능성의 방향을 결정지은 지 오래다.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걸 깨달은 진유성이 남은 내력을 전부 쏟아부었다.

치이이이익-!

제단의 한 가운데에 놓인 보석이 빛을 뿜기 시작한 것이.

보석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붉은색과 푸른색의 빛을 번갈아가며 뿜기 시작했다.

‘사기가 흐려진다.’

보석에 잠들어 있던 사기가 흐려지고, 정기가 뚜렷해졌다.

만약 신이 있다면.

전지와 전능으로 쪼개져서 제 역할을 못하는 반쪽짜리들 말고, 진짜 신이 있다면.

그 존재는 처음부터 여기까지 보고 있었을까?

진유성이 이 땅 위에 서게 된 것이 사기를 품은 존재를 밀어내라는 뜻이었을까?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길을 걷는 건 자신의 의지였다.

진유성은 신이 되길 거부한 인간이었지만, 인간들을 굽어살피던 왕이었으니까.

마침내 진유성이 온몸으로 쏟아지던 빛과 기운을 받아들였다.

아스라이 환상이 떠오른다.

* * *

습기 가득한 아마존의 열대 우림 사이로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 다닌다.

알 수 없는 미증유의 기운을 감지한 원숭이 한 마리가 거대한 나무 위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끼기- 끼기기-

동료의 울음을 들은 원숭이들이 떼로 움직인다.

불길함을 감지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끼긱!

선두에서 달리던 세 마리의 원숭이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부딪쳐 나동그라졌다.

무언가에 갇힌 것이었다.

갇힌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원숭이 사냥에 나섰던 아마존의 원주민들이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가늠하고 있었다.

여전히 지구에는 문명이 닿지 않은 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존재한다.

물론 이들도 다큐멘터리 촬영팀이나, 대학의 연구팀과 접촉하여 바깥 문명의 존재는 알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부족의 의식에 맞춰 원숭이 사냥을 나섰던 원주민들은 자신들이 갇혀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 중 한 명이 보이지 않는 결계를 향해 돌을 던졌다.

하지만.

텅! 텅!

돌은 결계를 통과하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잠시 뒤.

허공에 놀랍도록 인간과 닮았지만, 누구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났다.

그 존재는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심상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번 미션을 진행할 관리자입니다.]

[우선, 미션 인원에 선별되심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현재 인원은 31명입니다.]

원주민들 중에도 각성자는 있었다.

게이트는 애초에 전 인류의 무의식을 오염시키려는 목적이었기에, 문명의 발전 정도와는 무관하게 탄생했다.

그렇기에 각성자가 용감하게 나서서 물었다.

“이곳이 게이트라고? 우린 게이트에 들어오지 않았다!”

타원형의 구체가 나타나지도 않았고, 선별 과정도 없었고, 장소의 이동도 없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결계에 갇혔을 뿐, 여전히 삶의 터전에 서 있었으니까.

그때, 관리자가 기묘하게 웃었다.

부족의 각성자들이 흠칫 놀랐다.

지금껏 관리자가 표정을 보였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그 기묘한 웃음 뒤로 관리자가 심상을 전달했다.

[페이즈-아포칼립스가 시작되었습니다.]

[지구 전체가 게이트 지역으로 분류됩니다.]

[미션 : 먹이 사슬 역전.]

[순수한 힘으로 사냥감과 사냥꾼의 자격을 입증하십시오.]

그 순간, 원주민들이 원숭이 사냥을 위해 들고 있던 무기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끼기기긱-!

끼기기기기긱-!

수백 마리의 원숭이들이 흉성을 토해 내며 몸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단지 털을 세우고, 몸을 펴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몸이 거대해진다.

60~70cm였던 원숭이들의 평균 신장이 두 배는 증가하더니.

끼기긱!

손톱을 세우며 원주민들에게 달려들었다.

이윽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미션이 종료되었습니다.]

살아남은 것은 부족 내 각성자 두 명뿐이었다.

거기서 죽은 29명의 영성이 불길한 기운을 타고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었다.

* * *

진유성은 깨달았다.

그동안 마도사들이 열어 놓은 게이트는 친절하고, 안전했다.

빈 수레가 요란한 것처럼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었지만, 치명적이고 절망적인지는 않았다.

애초에 게이트의 목적이 인간이란 종의 말살이 아니라, 무의식의 변질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카샤가 오염된 지금.

게이트는 목적을 바뀌었다.

전 인류의 말살과 영성의 흡수로.

SG는 GEL 수치를 감지해 게이트의 탄생을 예고하지만, 그렇다고 지구 전체의 GEL 수치를 감시하고 있는 건 아니다.

GEL 측정은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문명국이나, 최소한의 인구 밀도를 충족한 땅 위로 한정된다.

비율로 따지자면 전 지구의 69%를 감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포칼립스는 31%에서 조용히 시작된다.

더 이상 요란할 필요가 없다.

죽음은 요란하게 다가오는 놈이 아니니까.

문명국들이 종말의 위험을 감지하기 전에 비문명을 먼저 말살하고, 그 영성을 흡수해 문명국까지 말살한다.

이게 마도사들의 둘째, 로스차일드의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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