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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274화 (274/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74화>

* * *

MK 엔터의 박차명 팀장은 점심도 거르고 회의를 하던 중, 스마트폰의 진동을 느꼈다.

“잠깐, 전화 좀.”

그는 평소 두 대의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녔는데 하나는 일반인용, 또 하나는 VIP용이었다.

만약 지금 울리는 전화가 VIP용이 아니었다면, 박 팀장은 굳이 회의를 끊지 않았을 것이었다.

‘누구지?’

회의실을 나와서 스마트폰 화면을 확인하니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대출 권유 같은 건가 싶어서 전화를 받은 그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대정고에서 그쪽이 저한테 명함을 줬었거든요. 무슨 뮤직비디오를 찍을 때.

왜 기억을 못하겠는가.

퍼스널 컬러의 뮤직 비디오 촬영을 갔다가 만났던 두 명의 원석을.

이름까진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 명은 LF 건설의 상속녀였고, 또 한 명은 모든 움직임이 우아하고 아름다웠던 남학생이었다.

둘 다 엄청나게 탐이 났지만, 연락이 없어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남학생 쪽에서 연락이 왔다.

박차명은 속으로는 엄청나게 반가웠지만, 막상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반가움과는 달랐다.

“대정고에 뮤직 비디오 촬영을 갔던 적은 있는데…… 내가 명함을 줬던가?”

처음부터 주도권을 저쪽에 넘겨줄 필요는 없었다.

아쉬운 쪽이 아쉬운 티를 내는 멍청이들은 쇼 비즈니스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당당하고, 거만하게.

하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게.

“아, 미안해요. 내가 일 년에 뿌리는 명함만 백 장이 넘어서.”

거짓말이다.

캐스팅 디렉터가 아닌 팀장급이 뿌리는 명함은 몇 장 안 된다.

확실한 이들에게만 주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제가 어떤 상황에서 명함을 줬었는지 기억나요?”

박차명 팀장이 자신의 연기에 만족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이제 남학생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명함을 받았는지를 열심히 설명할 것이고, 자신은 떠올리는 척을 할 것이다.

그럼 관계가 결정되는 것이다.

선택을 하는 사람이 누구고 선택을 받는 사람이 누군지.

-내가 기억이 안 난다는 거죠?

“음, 상황을 설명해 주면…….”

-그럼 됐고.

뚜뚜뚜…….

박차명 팀장의 말은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겨 버렸다.

박차명은 당황했지만, 바로 전화를 거는 우를 범하진 않았다.

어쩌면 주도권을 잡기 위한 술수일 수도 있다.

요즘 애들이 좀 영악한가?

기다리면 다시 전화가 올 것이다.

하지만.

“……왜 안 오지?”

시간이 지나도 전화는 오지 않았다.

혹시 다른 회사에서 받은 명함에 전화를 하고 있는 걸까?

내 눈에 보석이면 남의 눈에도 보석이다. 기획사의 명함을 한 장만 받았을 리가 없다.

박차명은 갑자기 초조해졌다.

‘하지만 다시 전화를 걸어서 뭐라고 하지?’

이름. 이름을 기억해 내야 한다.

그는 머리를 부여잡고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한동안 고민하던 그는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스치듯 들었던 이름을 떠올린 것이었다.

곧장 전화를 건 박차명은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말했다.

“아, 제가 다른 사람이랑 착각을 했네요! 대정고! 축구! 까먹었을 리가 없죠.”

-그래요?

“잘 지내셨어요?”

박차명이 회심의 이름을 꺼냈다.

“진혜성 씨?”

-……유성인데.

“네?”

뚜뚜뚜…….

또 끊긴 전화를 보며 박차명이 머리를 움켜쥐었다.

별똥별 비슷한 이름이었던 게 기억났는데, 혜성이 아니라 유성이었다.

‘아니, 그게 그거잖아!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해?!’

그러나 박차명은 진유성이 보여 줬었던 몸짓을 떠올렸다.

얼굴이 잘생긴 사람은 많지만 움직임이 잘생긴 사람은 극히 드물다.

배가 불룩 튀어나온 아저씨 역할을 연기해도, 명배우가 하면 그 몸짓이 다르다.

그래서 연기 트레이너들 중에는 이렇게까지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연기란 행위에서 얼굴이 차지하는 부분은 10%뿐이고, 목소리가 30%, 몸이 70%를 차지한다고.

꼭 연기만 몸짓이 중요한 것도 아니다.

물론 박차명은 진유성을 배우로 키우고 싶었지만, 아이돌을 한다고 해도 춤선은 아주 중요한 문제다.

결국 박차명은 다시 한번 핸드폰을 들었다.

“아이고, 농담만 하면 그새를 못 참고 전화를 끊으시네.”

결국 박차명은 진유성이 학교가 끝나고 친구와 함께 MK 엔터를 방문한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친구라고 하니 가슴이 벌렁거린다.

그때 봤던 여학생과 함께 오는 걸까?

“혹시 명함을 줄 때 함께 있었던 친구 말하는 건가요?”

-아, 그랬었네.

“맞다는 거죠?”

-맞아요.

“그럼 방문하시기 전에 두 분이 어느 분야를 지망하는지 좀 알 수 있을까요?”

-난 모르겠고, 친구는 배우.

“유성 씨는 고민 중, 친구는 배우. 오케이. 알겠습니다.”

박차명은 전화를 끊고는 어린놈이 말하는 게 참 싸가지가 없다고 속으로 욕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 기대가 된다.

박차명의 경험상,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스타들은 싸가지가 없었으니까.

* * *

“야, 진유성. 이 차 타고 가게?”

“본래 말과 무사는 지아비와 지어미처럼, 군주와 신하처럼 움직여야하는 법이다.”

“이건 말이 아니잖아……?”

“이게 내 애마다. 싫으면 내려라.”

“아니, 아니야.”

지종수가 고개를 저으며 진유성의 엔초 페라리에 올라탔다.

사실 지종수는 부잣집 자식이라는 타이틀을 떼고, 기획사를 방문하고 싶었다.

부잣집 자제들은 어려서부터 엔터테인먼트의 유혹을 받는다.

이는 부잣집 자제가 연예인이 되고 싶어 하는 순간부터, 회사에서 건질 것이 아주 많기 때문이었다.

대놓고 돈을 요구하는 건 삼류고, 연예계에서 별다른 위치를 차지하지 못한 곳들이다.

진짜 일을 잘하는 곳들은 부잣집의 ‘영향력’을 빌린다.

물론 종종 자식이 데뷔를 하지 못하면 회사에 투자를 해 버리는 부모들도 있긴 하지만.

그래서 지종수는 이런 화려한 차를 타고 기획사에 가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에이, 뭐. 어차피 대정고 다니는 거 아는데.’

지종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한 게 떠올랐다.

“야, 아침에 너 운전 잘하더라.”

“당연하지. 내 관성 드리프트를 보았느냐?”

“소윤이 반응은 어땠어?”

“상소윤?”

“어. 그, 조수석에서 꽤 귀여웠을 것 같은데.”

“흠, 귀엽다기보다는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었지.”

“새로운 모습?”

진유성은 상소윤이 욕을 그렇게 잘하는지 처음 알았다.

제발 속도 좀 낮추라고 욕을 퍼붓는데, 딱 중원에서의 상림이었다.

과거 상림은 걸쭉한 입담으로 상대방을 열받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진유성이 뭔가를 회상하는 듯하자, 지종수가 닦달했다.

“뭔데, 뭐가 새로운데?”

“아주 야만적이었다.”

“야만적이라고?”

“그래.”

지종수는 문득 조수석에 앉아 갈색 시가를 꼬나문 채 ‘더 빠르게 달리라고!’를 외치는 상소윤을 떠올렸다.

아니, 이건 말도 안 된다.

하지만 정말로 그랬다면 색다른 매력이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진유성이 입을 열었다.

“지종수.”

“왜?”

“넌 그렇게 잘생긴 얼굴이 아니다.”

“뭐라는 거야. 우리 엄마는 내가 제일 잘생겼다고 했거든?”

“거짓말을 하신 거다.”

“아, 뭐! 어쩌라고!”

사실 지종수도 알고 있었다.

지종수는 일반인들 사이에서 평범보다 조금 나은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잘생긴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배우들과 비교하자면 못난 축에 속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아야 한다. 가장 어려운 장애물을 넘으면 전혀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것을.”

진유성 같은 경우에는 초식을 익히는 게 몹시 느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초식의 형과 식을 암기하고 재연하는 건 아주 빨랐지만, 남들처럼 그 초식을 금방 써먹지는 못했다.

적당히 이해해서 적당히 써먹는 다른 멸마대원들과 다르게 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건 진유성의 재능이 초식을 만든 사람의 재능을 압도해서 생긴 일이다.

진유성이 보기에는 불필요하고, 왜 저렇게 움직이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초식이 너무나 많았으니까.

그러나 그때는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진유성의 활용 능력이 부족하다고만 평가했다.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는 순간, 진유성은 초식에 구애받지 않는 경지에 올랐다.

거기에 심동과 무심동을 깨우치는 순간 초식이 필요 없는 경지에 올랐다.

무초식의 경지는 멸마대에게 무공을 가르치던 교관들조차 오르지 못한 곳이었다.

만약 교관들이 진유성을 칭찬만 했다면 이러한 경지에 단숨에 오를 수 있었을까?

절대 아니었다.

장애물은 그것을 넘는 순간 새로운 세계를 보여 주기 마련이었다.

비단 무공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진유성도 이제 미의 기준을 알고 있고, 꽤 익숙해졌다.

지종수는 분명 배우를 하기에는 부족하다.

하지만 그 부족함을 극복할 수 있다면 그는 틀을 넘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틀 안에 있는 이들과는 경쟁조차 할 필요가 없어진다.

“연기훈이냐? 갑자기 웬 설교를…….”

지종수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유성의 분위기에 놀랐다.

왠지 진유성이 굉장한 어른처럼 느껴졌다.

진유성은 지종수를 보고는 피식 웃으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때쯤, 진유성의 차가 MK 엔터테인먼트에 도착했다.

MK 엔터테인먼트가 압구정에서 멀지 않은 신사동에 위치했기 때문에 금방 왔다.

본래 엔터테인먼트 사옥은 연예인이 오가기 때문에 출입 검사를 철저히 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진유성의 엔초 페라리가 들어가는 것을 붙잡지 않았다.

박차명 팀장이 진유성의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내려왔다.

“친구분은요?”

인사를 건넨 박차명 팀장의 첫 마디였다.

“여기 있잖아요.”

“명함을 줄 때 함께 있었던 친구랑 온다고……?”

“지종수. 너도 내가 명함을 받을 때 함께 있지 않았느냐?”

“어, 있었지.”

“아, 그럼 연기를 하겠다는 친구도 이 친구고?”

지종수는 자신을 훑어보는 팀장이란 남자가 상소윤을 기다렸다는 걸 깨달았다.

이 남자가 진유성과 상소윤에게 함께 명함을 줬었기 때문이었다.

부잣집에서 태어난 지종수는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 무시를 받은 경험이 별로 없었다.

물론 진유성이 매일 같이 자신을 무시하지만, 거기엔 장난이 섞여 있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진짜로 자신을 무시하고 있었다.

아마 평소 같았으면 쪽팔려서 자리를 떴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왠지 진유성이 해 준 말이 가슴에 남는다.

장애물을 넘는 순간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는 것을.

지종수가 가만히 서 있자, 팀장이 진유성과 지종수를 엘리베이터로 이끌었다.

“친구분 카메라 테스트부터 먼저 할까요?”

곁다리는 빨리 해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가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지종수 학생이라고 했죠?”

“네.”

“근데 문제가 좀 있어요.”

“뭔가요?”

“저희가 연기를 전혀 안 해 본 분을 테스트할 때는 상대역을 준비하거든요. 안 그러면 너무 어색해해서.”

“네.”

“근데 여학생이 오는 줄 알고, 남자 배우 지망생이랑 남녀가 붙는 멜로 대본을 준비해서…… 종수 씨가 여자 역할을 해야 할 것 같은데요.”

“괜찮습니다.”

“그래요? 정말이죠?”

“네. 정말로 괜찮습니다.”

어쩌면, 오히려 그게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종수가 유일하게 해 본 연기가 바로 이것이었으니까.

진유성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지종수를 보며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회를 잡을 때는 운이란 놈도 중요하다.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 걸리는데, 진유성 씨는 어떻게 하실래요? 테스트 구경하셔도 되고, 회사 구경하셔도 되고.”

“회사 구경.”

기감으로 MK 엔터테인먼트 전체를 훑어본 진유성은 이미 뭘로 시간을 때울지 정한 상태였다.

그는 아이돌에 관심이 없고, 연기에도 관심이 없다.

하지만 살짝 관심이 가는 게 있었다.

한국에 와서 몸으로 하는 새로운 문물을 거의 해 봤는데, 아직 안 해 본 것이기도 했다.

바로, 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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