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72화>
* * *
텅 빈 방 안에 무언가 꿈틀거린다.
본디 색이라 하면 빛이 있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빛이 없는 곳에서는 아무런 색도 인식할 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
누군가 이 불길한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면 그는 검은색을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한 톨의 빛도 존재하지 않아 망막에 반사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암전.
그 속에서조차 인식할 수 있는 어둠.
이것은 어둠이 시각의 인지 영역을 아득히 넘어선 영역에서 존재감을 내뿜기 때문이다.
푸스시시시시-
그 순간, 꿈틀거리던 어둠이 한 곳으로 모여들며 끔찍하리만큼 사나운 악의를 내뿜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둠은 한 명의 백인 남자가 되었다.
존재를 재구성한 로스차일드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그그그극-!
핑거 스냅에 맞춰 거대한 철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며 빛이 들어왔다.
저벅, 저벅.
가벼운 발소리로 방에 들어온 남자는 CSG의 수장, 신주청이었다.
신주청은 주변을 돌아보며 혀를 찼다.
“아까운 돈만 날렸군.”
로스차일드가 존재하던 공간은 가로세로 6.66m의 정사각형 형태로 모든 것이 순은으로 만들어진 곳이었다.
한데, 지금.
순은이 새까맣게 부식되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대에게 물질적인 가치가 의미를 주나?]
“없지는 않지.”
[그렇다면 그대가 원하는 만큼 전 세계에서 수탈하도록 하여라.]
“전 세계의 주인이 될 마음이 생겼나?”
은은 부정한 것들이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특성이 있다.
로스차일드는 은의 특성을 역이용했다.
마도 코어를 원자의 단위로 분열시키면 일시적으로 구속력이 사라져서, 보유한 영기가 자연으로 환원될 가능성이 있다.
로스차일드는 그 가능성을 막는 용도로 거대한 순은의 방을 만든 것이었다.
즉, 지금 로스차일드는 자신의 근원을 원자의 단위로 분해시켰다가 재조립하는 모험을 감행했다는 것이었다.
자아가 날아가 소멸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행위를 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첫째는 소멸했다. 더 이상 이 세상에 나와 같은 마도 코어를 공유하는 이는 없다.]
“확실한가?”
[확실하다.]
정말 마도사들의 첫째가 소멸했는지를 알기 위해.
로스차일드는 첫째가 자신의 마도 코어로 빚어 낸 창조물이고, 그것은 두 존재가 같은 근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첫째가 보다 상위의 근원이었고, 로스차일드는 거기서 파생된 존재였다.
그렇다면 근원을 완전히 해체한 다음에 다시 재조립한다면 어떻게 될까?
근원이 맞닿은 것들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마도 코어의 구속력, 간섭력, 인접력 등등.
하지만 둘째는 마도 코어를 재구성하면서 그 어떤 영향력도 느끼지 못했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첫째는 소멸했다.
아니, 소멸당했다.
아마도 높은 확률로 진유성의 손에 의해 벌어진 일이었을 것이었다.
[중원의 절대자는 정말이지 두려운 존재로군.]
“두렵다고?”
[그래, 두렵다.]
길고 긴 삶을 살아온 로스차일드가 처음으로 입에 담은 말이었다.
하지만…….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그 힘 덕분에 목적지에 도착하다니.]
“결정을 내렸군?”
신주청이 눈을 빛냈다.
[그래. 이제 아카식 레코드가 완전히 오염된 게 확실해졌다.]
두 번째.
아카식 레코드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
원자는 자연의 상태에서 세계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임을 의미한다.
만약 아카샤의 의지가 이종의 기운을 배척하는 중이었다면, 로스차일드는 원자 단위에서 사라졌어야 했다.
힘을 발휘할 수 없으니, 이 세계의 법칙으로부터 도망칠 길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추방당하지 않았고, 스스로를 완전히 복구했다.
이는 더 이상 지구를 감싼 아카샤의 절대 의지가 마도를 배척하지 않음을 의미했다.
DDP 게이트에서 몬스터들이 게이트 밖에 영향력을 행사할 때 짐작했던 것이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확실해졌다.
그래서 로스차일드는 결정을 내렸다.
아카샤와 함께 아카식 레코드의 <공동 관리자>가 되겠다고.
이후 아카샤를 소멸시켜서 그 힘을 흡수하면, 로스차일드는 유일한 신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네 도움이 필요하다, 월성.]
“어째서? 본디 이 계획에 내 역할은 그대의 쌍둥이들을 죽이는 것까지가 아니었나?”
[결과는 같지만, 과정이 달라졌다. 본디 난 둘의 힘을 흡수했어야 했다. 하지만 진유성이 소멸시켜 버렸지.]
전지의 존재인 아카샤는 전능의 존재와 싸워서 많은 힘을 소실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카샤는 신적인 존재다.
이런 아카샤가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그녀가 아카식 레코드를 떠받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카식 레코드.
모든 인류의 색(色)을 기록해 놓은 기록.
로스차일드가 기록의 공동 관리자가 되겠다는 것은, 모든 기록을 수정해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는 것을 의미한다.
아카샤처럼 계속해서 기록을 유지하기 위해 지탱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그저 단 한 순간.
모든 아카식 레코드의 무게를 짊어질 수만 있으면 된다.
그 뒤로 아카샤와 로스차일드의 싸움은 로스차일드가 압도적으로 유리해진다.
아카샤는 기록을 유지하는 데 많은 힘을 들여야 하지만, 로스차일드는 단 한 번만 수정하면 되니까.
지키려는 자와 파괴하려는 자의 싸움에서 후자가 유리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로스차일드는 일순간이라도 아카식 레코드를 짊어질 수가 없었다.
아득히 많아 기하의 영역에 달하는 기록은 인간의 수로는 셀 수 없으며, 마도의 수로도 어림짐작할 뿐이니까.
[그래서 네 도움이 필요하다. 월성.]
“나는 마도 지식이 없다.”
[네 영혼의 격은 나와 동일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 넌 아카식 레코드 안에서 태어난 존재이다.]
기록 밖에서 온 존재가 기록을 짊어지는 것과 기록 안에서 온 존재가 기록을 짊어지는 것은 그 부담이 다르다.
물론 두 사람이 부담을 나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격을 섞은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너에게도 큰 이득이 되는 제안이다.]
사냥꾼은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
로스차일드가 신이 되는 순간, 그가 신주청을 흡수하려 할 위험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신주청이 로스차일드의 조력자로서 아카식 레코드의 수정을 돕는다면, 그 기록에는 신주청의 이름 역시 남는다.
즉, 로스차일드는 신주청을 죽일 수 없게 된다.
신주청을 죽이는 순간 수정된 기록이 거짓이 되기 때문이었다.
로스차일드는 압도적인 힘을 갖게 되고, 신주청은 그런 로스차일드에게서 불살해(不殺害)의 징표를 획득하는 것.
[게다가 너도 아카식 레코드에서 오는 힘을 이용할 수 있게 되겠지.]
“흠.”
[내 제안에 답해라. 월성. 아니, 신주청.]
신주청은 알고 있었다.
여기서 그가 거절한다면 로스차일드와 생사결을 벌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신주청은 로스차일드와 싸울 이유가 없었다.
로스차일드는 필요한 존재이다.
“협력하겠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말하라.]
“나에 대한 불살해의 징표를 네 마도 코어에 새겨라.”
[어려운 일은 아니군.]
로스차일드가 손을 휘둘렀다.
그 순간, 신주청의 심장과 로스차일드의 마도 코어가 새까만 불길에 휩싸였다.
불살해의 징표가 각인된 것이었다.
이제 로스차일드는 신주청을 죽일 수 없다.
신격을 획득해 마도 코어를 초월하는 순간 징표는 무의미해지지만, 그때는 아카식 레코드의 기록이 신주청을 보호할 것이었다.
징표를 확인한 신주청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 시작할 생각이지?”
[일주일 뒤, 아포칼립스가 시작된다.]
“빠르군.”
[결정했다면, 아카샤가 손을 쓰기 전에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아포칼립스(Apocalypsis).
종말의 장.
전 지구에 동시다발적으로 게이트가 열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고통의 시기.
그들의 죽음에서 흘러나오는 영성은 로스차일드에게 전달된다.
로스차일드는 그 영성을 거름 삼아 단숨에 아카식 레코드를 수정할 생각이었다.
신주청이 시계를 통해 날짜를 확인하니, 오늘이 9월 23일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뒤.
2023년 9월 30일.
9월의 마지막 날.
세상은 종말의 페이지에 접어들 것이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나의 결론도 다가오겠군.’
신주청은 그런 생각을 하고는 꿈틀거리는 로스차일드의 새까만 영기를 바라보며 진유성을 떠올렸다.
내친걸음이었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신주청과 로스차일드는 모르겠지만, 또한 알아도 신경 쓰지 않겠지만.
공교로운 사실도 한 가지 있었다.
2022년 9월 30일은 진유성이 천신궁 게이트를 넘어 지구에 도착한 날이었다.
그러니 진유성이 한국에 온 지 정확히 일 년째에 아포칼립스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 * *
아아아…….
아아아아…….
들릴 리 없는 고통에 울부짖는 신음 소리가 들린다.
이것은 환청인가?
아니면 하늘에 닿은 그의 인지 능력이 인지하는 육감의 영역인가.
하지만 뭐가 됐든 상관없었다.
천신궁의 진유성은 감정이 전혀 담기지 않은 표정으로 앉은 자세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
검이 무언가를 베었지만,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진 않았다.
대신 고통에 울부짖는 신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본래 진유성은 천마신교의 교주였고, 대명제국을 통치하고 있었지만, 황제의 직위에 오르진 않았다.
주혜미와 관련된 사건으로 주씨 황가가 몰락한 다음에는 황실의 외가에서 새로운 황제를 즉위시켰다.
하지만 이것은 진짜 진유성이 한 일이었다.
‘--’를 잃은 천신궁의 진유성은 그런 번거로운 일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황제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걸리적거리는 소리를 내는 이들은 전부 죽여 버렸고.
그래서 그가 옥좌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천신궁의 진유성은 고개를 돌려 궁궐 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에 구름이 없다.
아니, 구름뿐만 아니라 하늘도 없다.
차원이 멸망한 이후 새파란 하늘 대신 나타난 것은 서서히 회전하는 혼탁한 검은색의 기류였다.
저것을 오랫동안 쳐다보는 이들은 정신 착란을 일으키고, 미쳐 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이상 하늘을 보지 않았다.
따사로운 태양의 은총도 받을 수 없었다.
그렇게 진유성이 태어난 중원의 행성은 멸망해 가고 있었다.
아아아…….
아아아아…….
그때, 다시 한번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 진유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청이 아니었군.”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에게 이러한 소리를 들려 준 것이다.
천신궁의 진유성이 검을 빼 드는 순간, 그의 눈앞에 커다란 학이 나타났다.
“만난 적이 있는 놈이군.”
과거에, 진유성은 꿈속에서 학을 만났었다.
[등선하겠는가?]
[예상하고 있지 않았는가. 그대가 원한다면 인간을 벗어날 수 있다는 걸.]
그리고 학의 제안을 거절했다.
[어째서인가? 그대 정도의 존재가 아직도 집착하는 것이 남아 있단 말인가?]
[가득 차면 범람하기 마련이다.]
[그대로부터 범람한 것들이 그대와 같으리라고 생각하는가?]
당시의 진유성은 학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천신궁의 진유성은 마침내 깨달았다.
“그래. 내가 진유성으로부터 범람한 존재였군.”
[우둔한 자여. 그대는 무엇을 원하여 차원을 유폐시켰는가.]
“알 것 없다. 어차피 너희들은 깨달음을 얻어 천계로 나아갔다고 생각하는 등신들이 아니더냐?”
그래봐야 천계 역시 중원에서 파생된 하위 차원일 뿐이다.
[차원을 열어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좌시하지 않겠다.]
“중원에서의 마지막 여흥인 셈이군. 얼마든지 좌시하지 않아도 좋다.”
검을 빼든 진유성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학의 영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학이 날갯짓을 시작하자, 깃털이 천신궁의 사방으로 흩어졌다.
단순한 깃털이 아니었다.
그 모든 깃털에는 [존재]가 깃들어 있었다.
중원에서 지고한 깨달음을 얻어 천계에 도달했다는 전설적인 존재들이.
괜히 차원을 돌아다니며 멸망시키던 마도사들이 천계를 우회해서 지나간 것이 아니었다.
깨달음을 얻어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이들이 육신을 벗어던지고, 영혼의 격을 보존하는 무릉도원.
그게 천계였다.
하지만 진유성이란 존재는 주저하는 법이 없다.
“……재밌겠군!”
그 순간이었다.
후우우웅-!
광풍이 불어오며 깃털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광풍 속에서 나타난 것은 마도사들의 첫째.
아니, 첫째의 육신을 뒤집어쓴 ‘무언가’였다.
[천계는 강하지만, 그 인접력이 지나치게 약하지. 간단한 인과율 차단만으로도 추방할 수 있을 정도로.]
“흥을 깨 버리는군.”
[벌레를 죽이는 게 재미있다고 굳이 독충과 싸울 필요는 없다.]
첫째를 뒤집어쓴 무언가가 말했다.
[시간이 되었다. 중원의 절대자여.]
무언가가 선언했다.
[지구에 현현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