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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267화 (267/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67화>

* * *

“수능이 중요하지 않은 놈들도 있겠지만, 공부하는 친구들을 위해 면학 분위기 형성해라. 알겠냐?”

“네.”

“지종수, 알겠어?”

“넵.”

“조회 끝.”

아침 조회를 끝낸 연기훈이 문을 열고 나가자 3학년 1반 학생들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다른 반 선생님들은 아침 조회 때 출석만 확인하는데, 연기훈은 끝없는 잔소리를 한다.

수능이 가까워진 2학기가 되자, 잔소리가 점점 심해지는 기분이다.

한동안 연기훈을 욕하던 학생들이 주제를 돌렸다.

“근데 진유성 안 왔는데, 담임은 아무 말도 없네?”

“미리 연락했나 보지.”

“소윤아, 무슨 일인지 알아? 오늘 등교도 따로 했잖아.”

정새롬이 상소윤을 쳐다보며 물었다.

사실 아침에 지종수의 충격적인 ‘부술 수 없다면 가져버리겠어.’만 아니었어도, 친구들의 관심은 진유성과 상소윤에게 쏠렸을 것이었다.

지금껏 두 사람은 늘 함께 등교해 왔기 때문이었다.

정새롬의 질문을 받은 상소윤이 대수롭지 않은 척 답했다.

“몰라?”

“몰라? 진유성이 별말 없었어?”

“아니, 말은 했는데 이유를 모른다고. 그냥 늦게 온댔어.”

상소윤이 거짓말을 한 이유는 진실을 말하기가 상당히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진유성은 엄마랑 함께 도윤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느라 늦는데, 그걸 말하면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안 그래도 진유성이 SG에 각성 검사를 하러 갔을 때, 엄마가 학교에 찾아오는 바람에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다.

심지어 진유성이랑 약혼한 거냐고 물어보는 친구들도 있었다.

농담조긴 했지만, 진짜 100% 농담이었다면 직접 물어봤을 리가 없다.

어느 정도 의심을 하는 거다.

‘약혼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상소윤은 평소처럼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저도 모르게 어떤 장면들을 떠올렸다.

“이번엔 시켜 주겠느냐?”

“명예 소방관.”

“아주 잘 버텼다. 훌륭했다.”

“소윤아.”

“꽉 잡고 있어라.”

DDP 게이트 안에서 겪었던 일들이었다.

진유성은 상소윤이 DDP 게이트에서 겪었던 일들 때문에 트라우마를 갖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흔쾌히 쇼핑몰의 모델도 해 주었고, 동대문 도매점을 갈 때도 따라가 주었다.

쇼핑몰이 성공하면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게 쉬울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상소윤은 악몽을 몇 번 꾸는 것 외에는 생각보다 아주 괜찮아 보였다.

그래서 진유성은 역시 상소윤이 상림의 형질을 물려받았다고 생각했다.

상림은 비록 상실의 공간에서 가슴에 품은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잊어버렸지만, 유전 형질에는 남아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생각은 반만 맞았다.

상소윤이 상림의 피를 이어받아서 위기 상황에 오히려 침착해지고, 결의를 다지는 것은 맞다.

하지만 진유성의 걱정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상소윤은…….

DDP 게이트에서 겪었던 일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정확히는 진유성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나빴고, 그 이후에는 오히려 좋았다.

진유성의 새로운 면모를 보게 되었고, 진실을 알게 되었고, 관계가 변화하게 되었다.

아빠는 여전히 ‘내 딸은 교주님의 친구인데, 난 왜 교주님의 수하지’라고 헷갈려 했지만, 상소윤은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좀 재밌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상소윤은 진유성이 안타까웠다.

100년 후의 진유성은 놀이공원에 갈 때마다 오늘의 일을 떠올릴까?

그 순간, 상소윤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서 진유성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내가 기억해 줄게. 죽기 전까지는.”

여전히 놀이공원에서 자신이 왜 그런 행동과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야, 상소윤.”

“응?”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박색한 표정을 지어?”

상소윤은 순간 진유성이 정새롬의 얼굴을 뒤집어쓴 게 아닌지 고민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새롬이가 맞았다.

그 순간, 정새롬이 화들짝 놀랐다.

“지금 내가 박색이라고 했어?”

“응…….”

“……조졌다.”

옆에서 핸드폰을 보고 있던 고인수가 컥 하고 웃었다.

평소 거친 뉘앙스의 말을 거의 쓰지 않는 정새롬의 반응이 웃겼기 때문이었다.

“웃을 때가 아니야. 생각해 보면 우리 대학교 가서 어떡해?”

“뭘 어떡해?”

“야, 고인수. 너랑 도훈이랑 PC방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어. 근데 네가 좀 빨리 와서 게임을 혼자 하고 있다고 쳐봐.”

“리얼한데? 자주 그래.”

“그러니까. 그렇게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데, 갑자기 심도훈이 옆에 털썩 앉는 거야. 그럼 너 뭐라고 말할래?”

“뭘 뭐라고 해?”

“뭐라고 말할 거냐고.”

“왔느냐.”

“그럼 심도훈은 뭐라고 해?”

심도훈이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왔도다.”

고인수와 심도훈은 뭐가 이상하다는 건지 이해를 못해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때 정새롬이 책상을 탕 두드렸다.

“봐봐. 이거 봐. 이상한지도 모르잖아.”

“아니, 그. 어, 사람들이 잘 쓰지 않는 말투긴 한데…… 그렇게 이상하진 않잖아? 그냥 좀 재밌지.”

“웃기고 있네. 너희 처음 진유성 전학 왔을 때 말투 가지고 2주는 씹었거든?”

“…….”

확실히 그렇긴 하다.

진유성과 홍대에 놀러가기 전까지는 관종 같다고 엄청 뒷담화를 했었다.

사실 그 뒷담화도 상소윤 덕분에 많이 순화된 것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상소윤이 진유성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니까.

이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그들이 미간을 좁힐 때, 교실문이 열리며 진유성이 들어왔다.

진유성이 성큼성큼 걸어오자, 상소윤이 손을 들며 말했다.

“왔느냐.”

“강림했도다.”

심도훈과 고인수는 강렬한 이성과 본능의 강한 충돌을 느꼈다.

강림했도다는 희귀하다.

본능적으로 따라 하고 싶다.

그러나 따라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마약 같은 놈…….”

지종수의 중얼거림에 정새롬이 미간을 좁혔다.

단어 선택이 비범하다.

역시 부술 수 없으면 가져 버리겠다는 노선이 틀림없다.

그사이, 상소윤이 진유성을 쳐다보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근데 너 왜 늦게 왔냐?”

일부러 티를 내는 것이었다.

난 네가 왜 늦었는지 모르는 상태라고.

말을 맞춘 건 아니지만, 진유성은 똑똑하니까 이 정도만 해 줘도 알아서 대처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상소윤은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너무 오랫동안 떠받들어진 채로 살아온 진유성은 머리가 좋지만, 그 좋은 머리를 잘 쓰진 않았다.

“뭐라는 것이냐? 도윤이와 함께 병원에 다녀온다니까.”

“……!”

상소윤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사이, 지종수가 물었다.

“네가 왜?”

“그냥 갔다. 외수, 소윤이 어머니 혼자 힘들까 봐.”

하마터면 외숙모라고 말할 뻔한 진유성이었지만, 그 누구도 진유성이 살짝 말을 전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네 입에서 나온 어머니의 표기와 표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악령으로 진화하기 직전인 지종수의 음산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니까.

“설마 장모님이라고 쓰고 어머니라고 읽는 건 아니지?”

진유성이 지종수를 진지하게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뭐? 뭐가 그래!”

“넌 확실히 답을 밀려 썼구나. 표기와 표의란 단어를 아는 걸 보니 꼴등은 아닌 듯하다.”

“말 돌리지 마!”

지종수가 벌컥 소리를 지를 때, 교실 문이 열리며 1교시 과목의 선생님이 들어왔다.

“여러분 미안해요. 제가 좀 늦었죠?”

“아뇨! 더 늦어도 돼요!”

지종수가 저도 모르게 벌컥 소리를 지르는 순간.

교실 뒷문이 열리며 연기훈의 머리가 나타났다.

“지종수, 나와.”

때마침 3학년 1반 앞을 지나던 연기훈이었다.

지종수는 담임한테 불려가 혼나는 동안 굳게 다짐했다.

‘두고 봐라, 진유성. 넌 오늘 내 앞에서 허겁지겁 도망가게 될 거다.’

* * *

마침내 모든 수업이 끝나고, 연합군은 작전을 개시했다.

그들의 계획은 간단했다.

저녁 6시에 진유성의 생일 파티 겸 저녁을 먹기로 하고, 수업이 끝나는 4시 반부터 지종수가 작전을 개시하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야, 진유성. 그, 뭐 할 거냐?”

“다들 집에 들렀다가 온다니, 나도 집에 가려고 한다.”

“태워 줄까?”

“필요 없다.”

“아, 왜. 일단 타.”

“후회할 텐데?”

“뭔 소리야? 타기나 해.”

진유성이 차에 올라타자, 시동을 건 지종수가 물었다.

“어디로 가냐?”

“상소윤네 집까지만 태워 주면 된다. 거기서부터는 내가 가지.”

“뭐, 그래.”

진유성은 자신의 집이 정확히 어딘지 알려주지 않았지만, 지종수는 묻지는 않았다.

그들은 진유성이 사이비 종교 재단의 후계자라고 생각하기에, 진유성이 머무는 곳이 평범한 곳이 아닐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보여 주기 싫어하는 것이다.

그들의 추측은 틀렸지만, 진유성이 사는 곳이 평범한 곳은 아니긴 했다.

상소윤의 집이니.

그렇게 차가 출발하고, 지종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부터는 연기력이 중요하다.

블랙박스가 잘 찍고 있을 거고, 밥 먹을 때 이 영상을 틀어 진유성을 놀릴 것이었다.

“유성아.”

“왜?”

“글러브 박스 열어 봐.”

진유성이 글러브 박스를 여니 지종수가 미리 준비한 케이크와 선물이 보인다.

“이게 뭐야?”

“널 위한…… 선물.”

“뭐?”

“사실 너에게 말하지 않은 진실이 있어.”

그 뒤로 지종수의 절절한 연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놀랐다.

‘나한테 이런 재능이 있다고?’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재능에 대해서 착각을 한다.

나한테 어떤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그러나 진짜 재능이 있는, 흔히 말하는 천재들은 착각을 하지 않는다.

확신을 한다.

그리고, 지종수는 자신에게 연기의 재능이 있다는 걸 확신했다.

진짜였다.

이 재능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 순간, 당황한 표정의 진유성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장난이 심하네. 넌 상소윤을 좋아하잖아.”

“그랬었지. 하지만 널 보고, 정확히는 널 질투하게 되면서 알게 됐어. 내가 진짜 질투하는 대상은 진유성이 아니라, 상소윤이라는 걸.”

본래 이런 대사는 예정에 없었지만, 지종수는 자신의 배역에 완벽히 몰입한 상태였다.

연기 천재들은 종종 캐릭터 그 자체가 되어 대본에 없는 대사들을 뱉곤 하니까.

게다가 진유성이 잔뜩 당황하고, 놀라는 게 느껴져서 몰입이 쉽다.

지종수는 이후 자신이 그동안 느꼈던 심적인 고통과 마음을 열연했다.

폭풍 같은 연기가 끝나고, 지종수는 일부러 길에 차를 댔다.

진유성이 도망갈 수 있는 길을 터 줘야 하니까.

“대답…… 해 줄 거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진유성이 느릿느릿 답했다.

“지종수.”

“왜?”

“나는 함정을 깨트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함정을 만든 사람까지 응징한다. 그러니 기회를 주겠다.”

“기회?”

“반성하고, 사과하면 봐줄 테니까, 운전이나 하라는 것이다.”

지종수는 함정이란 단어에 뜨끔했지만, 조금 전까지 진유성이 당황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한 번 더 열연했다.

“아직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진유성의 태도는 냉담했다.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택하는 구나. 좋다.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무슨 소리야?”

“지종수. 차에 탄 순간부터 내 말투가 평소와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느냐?”

“……뭐?”

“너만 연기 중인 게 아니었다.”

배역에 깊게 몰입했던 지종수가 생각을 더듬었다.

확실히, 진유성의 말투가 평소와 달랐었다.

하지만 진유성이 왜?

연기를 해서 뭘 한단 말인가.

“내가 왜 연기를 했는지 궁금한 모양이구나.”

“…….”

“이걸 위해서였지.”

진유성이 계속 만지작거리던 핸드폰 화면을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진유성이 누군가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낸 흔적이 있었다.

문자 메시지에는 음성 파일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아무래도 방금 녹취한 파일 같다.

“뭐, 뭐야? 누구한테 보낸 거야?”

“이런 몹쓸 놈을 보았나.”

“뭐?”

“상소윤의 번호는 외우고, 이 번호는 못 외운단 말이냐?”

“서, 설마?”

최악의 시나리오를 떠올린 지종수가 화들짝 놀라서 진유성의 핸드폰을 빼앗았다.

진유성은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핸드폰을 내어 주었다.

그 편이 즐거우니까.

지종수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진유성이 보낸 번호를 입력하려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 번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으니까.

[아바마마.]

“으악!”

지종수가 화들짝 놀라서 핸드폰을 던지는 사이, 진유성은 허공섭물의 수법으로 몰래 블랙박스의 메모리 카드를 꺼냈다.

진유성은 지종수가 ‘아직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라고 외치는 곳까지 녹취했다.

블랙박스 영상이 있다면 다음 대화를 증명할 수 있지만, 그게 없다면?

감히 천신을 능멸하려 한 벌을 달게 받을 것이다.

“후후.”

진유성이 상쾌하게 웃으며 지종수의 손에 들린 자신의 핸드폰을 빼앗았다.

“미, 미친놈아! 어디가!”

지종수의 절규를 무시하며 차에서 내린 진유성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하다.

“거, 죽기 딱 좋은 날씨네.”

물론, 지종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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