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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265화 (265/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65화>

* * *

진유성의 생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온 9월 3일.

학교가 끝났음에도 진유성과 상소윤은 집으로 향하지 않았고, 대정고 근처를 벗어나지도 않았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대정고에서 멀지 않은 대형 마트였다.

“오늘은 뭐 할 거야?”

“모른다.”

“뭘 몰라. 알아야 재료를 사지.”

“요리를 정해 놓고 재료를 사는 게 아니다. 마음에 드는 재료를 고르고 요리를 하는 것이다.”

“오, 약간 거장 같았어. 요리 거장.”

“나는 네가 인지할 수 없이 아득히 큰 사람이니, 거장이라고 불러도 좋다.”

“거장이 아니라 거참.”

“…….”

“왜? 너 이런 거 좋아하잖아.”

“내가 하는 것만 좋다. 남이 하는 건 별로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진유성과 상소윤이 마트에서 식재료를 사는 이유는 간단했다.

상림과 유혜연이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대정고 맞은편의 상가로 온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진유성의 요리 솜씨를 알게 된 이후, 이들은 종종 진유성의 상가 건물에서 저녁을 먹었다.

물론 그때마다 진유성은 상림에게 돈을 뜯어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제는 상림도 노련해져서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곤 했다.

유혜연과 상소윤이 보고 있으면 진유성이 물리적인 힘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덕분이기도 했고.

그렇게 모든 재료를 사고 상가 건물에 도착하니 5시 반이 막 넘어가고 있었다.

대정고의 수업이 끝나는 시간은 4시 반.

상림이 유혜연과 상도윤을 픽업해서 상가에 도착하는 시간은 6시 반.

아직 약속 시간이 한 시간이나 남았다.

그사이, 진유성은 유튜브를 보고, 상소윤은 인스타그램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상소윤이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야, 진유성.”

“왜 그러느냐?”

“넌 지종수가 뭘 할 건지 다 알고 있잖아?”

“물론이다.”

“근데 왜 가만히 있어? 평소 네 스타일이랑 다른데?”

진유성은 그동안 연합군들이 A라는 작전을 짜면, 그것을 망쳐 버리는 데서 끝내지 않았다.

계획을 깨트린 다음에 철저히 되갚아 준다.

예전에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갔지만, 이제는 안다.

진유성은 내공을 사용해서 어지간한 일을 할 수 있었고, 그들이 무슨 계획을 짰는지 알고 있다.

그러니 연합군이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하이난에서 낚시할 때는 어떻게 한 거야? 내공으로 물고기를 끌어온 건가?”

“무슨 소리냐. 그것은 나의 낚시 실력이었다.”

“볼링 칠 때도 볼을 내공으로 조종한 거지?”

“아니다. 나는 몸 쓰는 법이 입신의 경지에 올랐기 때문에 내공 없이도…….”

“와, 생각해 보니까 축구도 내공으로 한 거였구나? 농구도.”

“어허, 아니라니까!”

진유성은 의념과 내공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고, 자신이 ‘정정당당한 스포츠’를 즐길 때는 의념과 내공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상소윤은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웃기고 있네.”

“대체 왜 믿지 않는 것이냐?”

“너니까.”

“……인성까지 박색하구나.”

“아무튼 지금은 왜 가만히 있는 건데?”

“너무 어처구니없는 계획이라서 그러하다. 대체 왜 그딴 걸 계획한 것이냐?”

9월 4일에 진행될 진유성의 생일 기념 몰래카메라는, 진유성의 말처럼 좀 어이없는 것이었다.

얼핏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작전.

하지만 여기에는 근거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진유성이 날 두려워했던 적이 있어.”

“에이, 종수야. 꿈꾼 거 아니냐?”

“아냐. 진짜 있다니까.”

“언제?”

“밸런타인데이.”

밸런타인데이 때, 지종수는 여학생들의 부탁을 받아서 진유성에게 초콜릿을 줬었다.

자신에게 준다고 오해했던 흑역사도 있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때…….

“네 거야.”

“내 거라고?”

“어. 네 거야.”

“이걸 왜 주는 것이냐?”

“왜긴 왜야. 좋아하니까.”

진유성은 허겁지겁 도망쳤다.

세상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만 같던 진유성이 혼비백산해서 도망쳤던 첫 번째 사건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진유성은 보통 지종수를 없는 사람처럼 취급한다.

지종수가 구체적인 어떤 행동을 취하기 전에는 무슨 짓을 해도 크게 반응하지 않는다.

하찮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종수의 눈빛 한 방에 진유성이 화들짝 놀라서 반응했던 적이 있다.

하이난으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

지종수가 감탄했다.

그야말로 심미(審美)의 극치였다.

온몸에 자리 잡은 근육들이 당장 명령만 내려 달라는 듯이 꿈틀거린다.

선 베드에 누운 채 무알콜 칵테일 잔을 잡을 때 온몸의 근육들이 요동을 쳤다.

완벽했다.

“허어…….”

지종수가 열등감과 부러움을 담은 한숨을 내쉬는 순간.

촥-!

진유성이 칵테일을 지종수의 얼굴에 부어 버렸다.

“무, 뭐야!”

“더러운 눈으로 보지 말거라.”

“더, 더러운 눈이라고?”

“말 더듬지 마라.”

그때처럼 진유성이 격렬히 반응했던 적이 없었다.

일련의 사건들을 종합해 봤을 때, 진유성을 혼내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고백해서 혼내 주자.

그랬다.

연합군의 이번 작전은 지종수의 고백이었다.

사실 지종수가 상소윤을 좋아한다는 것은 대정고 교장이 키우는 개도 알고 있을 사안이었다.

그러니 누가 봐도 이것은 명백한 장난이고, 오래갈 수도 없는 장난이다.

지종수가 원하는 것은 진유성이 자신을 두려워해 도망가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목표도 있었다.

헐레벌떡 도망가는 진유성의 뒷모습을 핸드폰으로 찍은 다음에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것.

한 줄의 글귀와 함께.

[큭큭. 두려워하는군. 애송이.]

이것이 연합군의 소소한 목표였고, 놀랍게도 실현 가능성이 꽤 높기도 했다.

상소윤이 생각하기에도 진유성이 미리 작전을 알지 않았다면 당했을 것 같았다.

그러니 상소윤은 궁금했다.

진유성이 과연 어떻게 대처를 할 것인지.

그 순간, 진유성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상소윤. 그동안 내게 대적했던 적이 얼마나 될 것 같느냐?”

“일단 그 적에 날 넣어줘.”

“어허. 진지한 이야기다.”

“뭔데?”

“함정을 설치하고 날 기다리는 이들의 심리는 늘 똑같았다. 이번 함정으로 죽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한번 해 보자.”

“뭐, 그랬겠지?”

“이게 얼마나 안일한 생각인지 감이 안 오느냐?”

“뭔 소리야?”

“함정 뒤에 숨었다는 것이다. 함정이 성공하고 실패하고만 염두에 둔다는 것이고. 그때마다 난 함정을 깨트리자마자 곧장 적진으로 달려갔다. 그런 싸움은 참 쉽지. 싸울 마음의 준비가 안 된 놈들이거든.”

진유성이 선언했다.

“난 지종수의 적진으로 뛰어들 것이다.”

상소윤이 뭔 소리인지를 물었지만, 진유성은 더는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 대신 상소윤의 핸드폰에 이상한 걸 보냈다.

영어로 된 페이지였는데, 상소윤의 영어 실력으로는 읽을 수 없었다.

“이거 뭐야?”

“내게 몇 차례 묻지 않았느냐. 생일 선물로 뭘 받고 싶냐고. 이걸 받고 싶다.”

“그니까 이게 뭐냐고.”

“FIA에서 주관하는 슈퍼 A 라이센스 획득 과정이다.”

“그게 뭔데, 씹덕아.”

국제 자동차 기구 FIA에서는 F-1에 출전할 수 있는 드라이버 라이센스 슈퍼 A를 발급해 준다.

슈퍼 A를 발급받으면 레이싱 트랙에 나갈 수 있게 되는데, 하부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서 세계 최고의 리그 F-1 레이싱에 출전하는 것이 모터스포츠 선수들의 꿈이었다.

진유성이 상소윤에게 보내 준 것은 강원도 인제에서 진행하는 슈퍼 A 라이센스 획득 과정이었다.

설명을 들은 상소윤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야, 너 면허도 없잖아?”

“생일이 지나면 딸 수 있다. 이제 하루밖에 안 남았다.”

“아니, 면허야 그렇다고 쳐도 레이싱 면허를 고등학생이 딸 수 있어?”

“딸 수 있다.”

결국 상소윤은 어깨만 으쓱했다.

보통의 고등학생이 레이싱 면허를 따겠다고 하면 드는 첫 번째 생각이 ‘위험하다’일 것이다.

하지만 진유성을 보면 그런 생각이 전혀 안 든다.

아마 레이싱 자동차가 산산조각 나도 유유자적 걸어 나오지 않을까?

아니, 애초에 산산조각 나지 않을 것 같다.

“그래. 누나가 결제해 준다.”

“무엄하구나.”

“앙칼지구나.”

“어허!”

“야, 내 생일도 너랑 열흘 차이밖에 안 나는 거 알지?”

“알고 있다. 생일 선물은 내가 좋은 걸로 골라 주마.”

“필요 없으니까 벌모세수나 해 주라고.”

“흠.”

진유성이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진짜?”

“그래.”

“오예!”

사실 진유성이 상소윤의 벌모세수를 해 주기 싫은 건 두 가지 이유였다.

첫째는 감히 본 교주를 미용 제품처럼 이용하는 게 괘씸해서.

둘째는 벌모세수를 하면 아파서였다.

벌모세수는 노폐물을 씻어 내는 게 아니다.

혈도를 직접 타격해 자극을 가하고, 내공으로 씻어 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노폐물까지 흘러나오는 것뿐이다.

처음 상림을 만나서 신나게 두들겨 팬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벌모세수를 제대로 하려면 고통이 수반된다.

상도윤의 경우야 체내에 노폐물과 화기가 쌓이기 전인 신생아였기 때문에 고통이 없는 것이고.

그래서 안 해 주던 것인데, 생각해 보면 상소윤이 바라는 건 혈도를 씻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노폐물을 씻는 것이다.

그러니 그 정도는 고통 없이 해 줄 수 있다.

생일 기념으로 특별히 한 번 정도는 해 줄 수 있겠지.

진유성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자동차 배기음이 들렸다.

이 배기음은 상림의 차가 내는 소리였다.

기감을 확장시키니, 아니나 다를까 상림과 유혜연의 목소리도 들렸다.

아무래도 약속 시간이 다 된 것 같았다.

“거의 다 온 듯하구나.”

“아, 그래?”

상소윤이 상가 건물을 열고 밖으로 나가 보니, 도로의 끝에 아빠의 차가 보인다.

거리가 제법 되는데 참으로 신기하다.

* * *

집에 돌아온 지종수는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작은아버지의 딸인 혜수 누나였다.

재벌가의 형제들은 사이가 아주 안 좋거나, 사이가 아주 좋은 경우가 많았다.

전자의 경우에는 하나의 회사를 두고 상속 경쟁을 할 때.

후자의 경우에는 서로 다른 회사를 운영하며 도움을 줄 수 있을 때.

지종수의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는 후자였고, 외동아들인 지종수는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지혜수와 아주 친했다.

“누나! 언제 왔어?”

“오늘 새벽에 왔어. 집에서 좀 자다가 강남 가는 길에 들렀지.”

“언제 다시 가는데?”

“안 가. 한국에 눌러앉으려고.”

지혜수의 아버지는 호텔을 경영하고 있었고, 지혜수는 프랑스에서 호텔리어로 경력을 쌓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한국에 들어왔다는 것은 아마 호텔을 상속받는다는 뜻.

하지만 이건 지종수의 오해였다.

“결혼을 한다고?”

“야, 쉿쉿. 아직 아빠 허락 안 받았어. 큰아빠는 집에 없지? 회사시지?”

“회사겠지. 그럼 뭐야? 그냥 남자친구랑 둘이 결정한 거야?”

“아, 몰라. 남친은 나 한국 들어온 것도 몰라. 생일 서프라이즈 해 주려고.”

“대책 없네.”

지종수는 그 뒤로 지혜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야, 이거 봐라. 내가 직접 만든 거야. 프랑스 제빵 장인한테 배워 온 거.”

“아주 사랑꾼 납셨네.”

“그럼, 그럼.”

지종수는 지혜수가 좀 부럽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미래를 약속하고, 그 약속을 위해 대책 없이 한국으로 달려오고.

멋지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지종수의 생각이 와장창 깨진 것은 잠시 뒤였다.

좀 쉬어야겠다던 누나의 손님방에서 고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가 보니, 지혜수가 울면서 엄청나게 화를 내고 있었다.

통화 내용을 들으니 상황이 파악됐다.

남자친구가 헤어지자고 했고, 처음부터 결혼할 생각도 없었고, 심지어 양다리였다.

결국 그날, 지종수는 술에 취해서 그놈 죽여 버리겠다는 누나를 말리고, 위로하느라 한숨도 못 잤다.

다음날 아침.

술에서 깨 정신을 차린 지혜수가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 나 때문에 얼굴 퀭한 거 봐.”

“뭐야? 멀쩡해졌네?”

“그딴 놈 떨쳐 내는 데 하루면 됐지. 암튼 이거 가져가서 친구들이랑 먹어. 진짜 엄청 유명한 프랑스 제빵사한테 배워 온 거야.”

지종수는 그렇게 퀭한 눈으로 누나가 들려 준 케이크를 들고 학교로 향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오늘이 9월 4일이고, 작전 날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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