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63화>
하지만 그보다 상소윤에게 더욱 인상 깊게 다가온 것은 전음이 주는 느낌이었다.
최근 상소윤은 진유성이 과거에 무슨 일을 했고, 어떤 일까지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자주 물어봤다.
처음에는 진유성의 능력에 대해서 실감을 못했다.
DDP 게이트에서 본 게 있으니 믿긴 믿었지만, 상상력을 발휘할 정도로 실감하진 못했단 말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궁금해졌다.
진유성이 무슨 일을 해왔고,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었다.
그렇게 들었던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 속에는 전음에 대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겪어 보는 건 처음이다.
‘진짜 신기하네.’
굳이 설명하자면, 조그마한 블루투스 이어폰이 고막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 좀 다른 것 같다.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뭔가를 들으면 주변 소리들이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전음은 주변 소리에는 아무 영향을 주지 않고, 진유성의 목소리만 전달한다.
상소윤은 모르겠지만, 이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전음입밀은 소리의 전달 매개체를 공기 대신 내공으로 치환하는 것이었다.
즉, 주변의 소리와는 다른 매질로 음성이 전달되며 여타 소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상소윤이 전음입밀의 다음 단계인 육합전성이나 혜광심어를 들었다면 까무러쳤을 수도 있었다.
전음입밀은 자신의 내공으로 음성을 전달하기 때문에 적에게 사용하기가 애매했다.
고수들은 전음을 타고 날아오는 내공을 역추적하여 위치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발전한 것이 육합전성과 혜광심어.
육합전성은 상대방을 둘러싼 주변 공기 전체를 진동시켜 소리를 전달하는 것이고, 혜광심어는 상대방의 몸속에 있는 공기를 이용해 소리를 전달했다.
육합전성이 여섯 방위에서 음성이 들리는 것도 이 때문이었고, 혜광심어가 자신의 가슴 속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육합전성과 혜광심어를 섞어 신처럼 보이는 것은 진유성이 지구에서 종종 했던 일이기도 하고.
상소윤은 이런 사실까지는 몰랐고, 알 필요도 없었지만, 갑자기 엄청나게 전음이 부러워졌다.
‘가만 있어 봐. 진유성이 시험 볼 때 전음으로 답을 알려줄 수도 있겠네?’
물론 상소윤은 컨닝할 생각이 없지만, 못하는 것과 안하는 건 다르니까.
그뿐만이 아니다.
생각해 보니 전음의 활용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예를 들어 진유성이 어떤 스포츠의 감독이 됐다고 치자.
그럼 경기 중에 계속해서 구체적으로 지시를 내릴 수 있다.
실수를 할 것 같은 선수에게 즉각적으로 피드백을 할 수도 있고.
아마 모든 프로 감독들이 간절히 원하는 능력일 것이다.
“오…….”
“응? 왜?”
“뭐가?”
“뭘 뭐가야? 네가 갑자기 감탄했잖아.”
“아, 뭐 떠오른 게 있어서.”
정새롬이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상소윤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로맨스 영화 같은 한 장면도 떠오른다.
무수히 많은 행인들 속에서 서로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
그 불특정 다수의 세계 속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두 주인공만의 달콤한 고백.
‘오…….’
간만에 로맨스 감수성이 폭발한 여고생 상소윤은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정새롬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진유성 같아.’
혼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맛탱이가 간 것 같은 상소윤의 행동이 꼭 진유성 같았다.
정새롬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상소윤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사이.
진유성도 문득 전음의 활용법에 대해 떠올랐다.
처음엔 별 생각 없이 전음을 보냈는데, 아주 좋은 생각이 났다.
진유성은 주저하지 않는다.
생각난 것이 있으면 바로 실행에 옮겨야 한다.
그게 장난이라면 더더욱.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구나.]
“……?”
[뭘 쳐다보느냐?]
“……!”
[허어, 이제 입까지 아둔해진 거냐? 왜 아무 말도 없느냐.]
“…….”
이 미친놈아. 전음으로 말을 거는데 어떻게 대답을 하냐?
라고 상소윤도 전음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상소윤은 내공이 없었고, 내공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음을 쓸 절정 수준에 도달할 수 없었다.
[내 예전부터 너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상소윤은 듣고 싶지 않아서 진유성에게서 고개를 돌려봤지만,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는 전음을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진유성의 기운에 대한 통제 능력은 하늘에 닿아 있어서, 제 아무리 복잡한 건축물 안에 있어도 2~3km 까지는 무리 없이 전음을 보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인간 무전기.
하지만 무전기와 다른 점은 수신자가 송신을 끊을 수 없다는 것.
진유성은 일방적인 딜 교환이 가능하다는 것을 방금 깨달은 것이었다.
[너와 동대문을 다니면서 네 옷 취향에 대해 알게 되었다. 너는 평소 핑크색이 잘 받는다며 핑크색 옷을 사곤 했지.]
“…….”
[그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너에게 어울리는 컬러는 핑크색이 아니라고.]
악마의 속삭임 같다.
듣고 싶지 않지만, 거부하고 싶지만, 묘하게 호기심을 자극해서 자꾸 듣고 싶어지는.
[너에게 어울리는 컬러는…….]
아, 뭔데. 빨리 말해 봐.
[60초 뒤에 발표됩니다.]
“…….”
[농담이다. 잔뜩 궁금한 것 같은데, 궁금하면 정새롬의 등짝을 내리쳐라. 감히 날 4위라고 조롱한 정새롬에게 호된 맛을 보여 주란 말이다!]
상소윤은 정새롬의 등을 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니 정말로 진유성이 입을 싹 닫았다.
더는 전음을 보내지 않는다.
상소윤은 진유성이 당연히 헛소리를 할 거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너무나 궁금하다.
결국 상소윤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짝!
“아! 뭐야, 왜 때려!”
“허리 좀 펴. 구부정하게 뭐 하는 거야?”
“무슨 소리야. 내가 엄마랑 요가를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 자세가 일반인이랑 다르다니까?”
“방금은 구부정했거든.”
“어, 그랬나?”
정새롬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허리를 쭉 폈다.
상소윤은 왠지 모를 죄책감에 정새롬의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그때 악마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잘했다. 나의 종복이여. 결국 너의 욕망에 충실했구나.]
진유성이 악마처럼 웃으며 전음을 보냈다.
[네가 원하는 답을 주마.]
[너에게 어울리는 컬러는 핑크색이 아니다.]
[너에게 어울리는 컬러는…….]
[박색이다.]
“…….”
상소윤은 순간 뇌정지가 왔다.
고작, 고작 이 이야기를 들으려고 새롬이를 배신한 건가?
난 무엇을 위해서…….
허탈함은 분노로 이어졌다.
“야!”
상소윤이 일어나 진유성에게 고함을 지르자, 진유성이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왜 그래?”
평소 같으면 ‘왜 그러느냐.’라고 대답했을 놈이다.
하지만 지금은 저 가증스러운 표정에 맞춰서 가증스러운 연기를 하고 있다.
지독한 컨셉충이다.
컨셉을 위해서라면 말투도 바꾼다.
그래서 더 화가 난다.
“야 이, 씨!”
상소윤이 정새롬의 복수를 위해 진유성의 등짝을 때리려 했지만, 진유성은 맞아 주지 않았다.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할 뿐.
결국 상소윤은 쉬는 시간이 끝날 때까지 진유성을 타격하지 못했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분해서 씩씩 거리는 상소윤을 본 지종수가 심도훈에게 소곤거렸다.
“소윤이가 갑자기 왜 그랬지?”
“몰라?”
“뭘 몰라. 이유가 있으니까 저랬을 거 아니야.”
“모른다고.”
그러나 심도훈은 별 관심이 없었다.
진유성이 남몰래 상소윤에게 무슨 장난이라도 쳤겠거니 생각했다.
하루 이틀 저러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상소윤을 열렬히 사모하는 지종수는 아니었다.
자신이 낄 수 없는 둘 사이의 비밀을 참을 수 없어서 안절부절 못하며 징징거렸다.
“우리가 모르는 뭔가 있지 않을까?”
“몰라.”
“분명 뭔가 있어.”
“모른다고.”
“아, 생각 좀 해 봐!”
지종수의 징징거림이 귀찮아진 심도훈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둘이 눈만 봐도 통하는 사이니까 그렇겠지?”
“뭐?”
“말도 필요 없는 거지. 눈만 봐도 막 마음이 통하고 무슨 말을 할지 아는 거야. 그래서 진유성이 칠 장난을 미리 알고 미리 화를 낸 거지.”
“야, 그게 말이 되냐?”
“말이 되지. 그 정도로 끈끈한 사이라는 거야. 둘이.”
“…….”
“네가 낄 곳은 없다. 이방인.”
“…….”
“그러니까 그만 징징거리고 하던 대로 축구 선수 스페셜이나 봐.”
“야!”
지종수가 벌떡 일어나서 소리를 지르자, 수업을 하고 있던 수학 선생님이 깜짝 놀랐다.
“지, 지종수 학생?”
“아, 죄송합니다.”
보통의 고등학교였다면 지종수는 수학 선생님에게 혼이 났어야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대정고는 선생들의 권위가 무너진 곳이었다.
하지만 그런 대정고에도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3학년 1반의 담임 연기훈이었다.
드르륵!
수학 선생에게 연락을 받은 연기훈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1반으로 들이닥쳤다.
“지종수, 따라 나와.”
지종수는 교무실로 질질 끌려가며, 진유성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반드시 복수하겠다.’
9월 4일, 진유성의 생일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지종수였다.
물론, 진유성은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 * *
진유성이 예리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딱히 위험해 보이는 놈들은 없다.
하지만 마음을 풀면 안 된다.
진유성은 여전히 눈에 힘을 풀지 않은 상태로 귓가에 속삭였다.
“내 무림의 절대자로서 무림의 격언을 알려 주마. 무림에서 가장 경계해야할 것은 아이와 노인이다.”
“…….”
“즉, 이곳에는 위험한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냐? 기선을 제압하는 것이다.”
“…….”
“저놈이 가장 강해 보이는구나. 가서 네가 만만한 놈이 아니라는 걸 보여 주거라. 상대가 너보다 크고 강하다고 해서 겁먹지 말고.”
“…….”
“가! 가서 엉덩이를 걷어차!”
진유성의 귓속말을 듣던 상도윤이 소리를 질렀다.
“으부부부!”
“좋아. 그 기세다!”
진유성이 상도윤을 바닥에 내려놓자, 상도윤이 정말로 진유성이 가리킨 아이를 향해 더듬더듬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상소윤이 기겁을 하며 후다닥 달려가 상도윤을 품에 안았다.
“야 이, 미친놈아. 대체 애한테 뭘 알려주는 거야?”
“영역에 들어간 순간부터 누가 가장 강한지를 가려야하는 법.”
“아니, 여긴 키즈 카페잖아?!”
“본래 아이와 노인이 가장 위험한 법이다.”
“아이가 아니라 아기잖아!”
“방심하지 마라. 방심은 죽음을 부르는 법.”
“…….”
상소윤은 열아홉의 나이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편두통을 느껴 보았다.
이 또라이는 너무나 강력하다.
상소윤은 진유성을 외면하며 상도윤을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하지만 상도윤이 자꾸 진유성이 가리킨 아이를 향해 걸어가려고 했다.
상소윤이 품에 안으려고 해도 자꾸 도망간다.
평소에는 누나의 품을 좋아하는데 말이었다.
그 모습을 본 진유성이 흡족하게 웃었다.
“좋은 근성이다. 꼬맹이.”
“…….”
상소윤은 뭔가 단단히 잘못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엄마의 의견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유혜연은 집에서 자꾸 진유성의 도움을 받아 날아다니는 상도윤을 보면서 문득 걱정이 들었다.
도윤이가 특별한 걸 평범하게 여기면 어떡하지?
사실 세상의 그 어떤 아기도 걸음마보다 날아다니는 걸 먼저 하진 않는다.
그래서 상도윤을 키즈 카페에 보내기로 결심했다.
보통의 아이들과 함께 놀다 보면 사회성이 생길 거라는 믿음으로.
물론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은 상도윤은 아직 키즈 카페에 갈 시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벌써부터 걸어 다니는 발육 정도를 따지면 충분히 갈 수 있었다.
그래서 상소윤에게 부탁해 키즈 카페에 보낸 것인데, 키즈 카페가 문제가 아니다.
진유성이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