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62화>
* * *
대정고 3학년 1반의 담임이자, 재벌 3세인 연기훈은 개학을 앞두고 짧은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학기가 시작되면 몇 달 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미리 스트레스를 풀려는 것이었다.
인천 공항에 도착하니 새벽 4시였고, 집에 도착하니 새벽 5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본래는 간단히 샤워를 하고 잠에 들 생각이었던 연기훈은 문득 제자들에게 내줬던 방학 숙제가 떠올랐다.
‘몇 명이나 했으려나?’
이번 숙제는 중요하다.
대정고의 제자들도 그들이 평범한 사람임을 알면 좋으련만, 세상은 그들을 그렇게 두지 않는다.
사회에 나가는 순간부터 개인의 인격은 사라지고 누군가의 자식, 누군가의 손자, 어떤 집안의 핏줄이 된다.
그들이 스스로를 범인이라고 느낄 만한 순간은 고등학생 때밖에 없고, 그것을 도와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영화 The Teacher 속의 주인공처럼.
그런 생각을 하며 메일에 접속한 연기훈은 울컥했다.
생각보다 방학 숙제를 제출한 놈들이 너무 없었다.
아무리 급하게 내준 숙제라고 하지만 2명은 너무 한 게 아닌가?
‘그래, 뭐. 아직 방학이 며칠 남았으니까.’
연기훈이 간신히 화를 참는 순간이었다.
띠링.
타이밍 좋게 누군가에게서 방학 숙제 메일이 도착했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새벽 5시가 넘은 야심한 시간에 방학 숙제를 보냈다는 것은 이 학생이 그만큼 과제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게 아닌가?
“어떤 착한 놈이…….”
메일을 클릭한 연기훈이 멈칫했다.
발신자가 진유성이었다.
연기훈은 두 가지 감정에 휩싸였다.
첫 번째는 진유성이 보내온 영상을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제 막 귀국한 데다가 비행기에서 잠을 못자서 굉장히 피곤하다.
그러니 지금 진유성의 영상을 봐서 정신적으로 피곤해지고 싶지 않다.
그간의 경험에 따르면, 이 빌런 놈과 엮이면 항상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궁금했다.
과연 진유성은 불특정 다수의 행인들 앞에서 어떤 짓을 했을까?
결국 호기심을 두려움을 이겼다.
연기훈이 진유성이 보내온 영상을 재생한 것이었다.
‘멀쩡하네……?’
놀랍게도 영상의 내용은 아주 멀쩡했다.
진유성은 홍대나 신촌쯤으로 보이는 번화가에서 마술 공연을 했고, 뒤이어 장소를 옮겨서 피아노 연주를 했다.
지나가는 행인들은 진유성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마술을 할 때는 웬 리액션 좋은 외국인 한 명이 반응을 해 줬고, 피아노를 칠 때는 나이 지긋한 노신사가 귀 기울여 줬을 뿐이었다.
연주가 끝나고 몇 마디 나누는 구도에서 영상이 끝났고.
연기훈은 퍽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대정고 사상 최강의 빌런도 이제는 알게 됐을 것이었다.
스스로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 순간이었다.
“음?”
갑자기 동영상의 화면이 전환되더니 연기훈에게 익숙한 장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영화 The Teacher에서 나오는 거리 연극 씬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이 혼란스러운 듯 중얼거린다.
[특별하지 않았던 거야?]
[부모님들이 거머쥔 부와 명예가 우리에게 환각제를 주사한 거야?]
[그럼, 그걸 빼면…….]
[우린 대체 누구지?]
부모님이 돈으로 지어 준 세계 속에서 살아가던 사립 학교의 학생들의 세계가 깨어지는 장면.
다시 봐도 명장면이다.
아무래도 진유성은 자신이 숙제를 내준 의도를 정확히 이해한 듯했다.
“짜식.”
아마 진유성이 감사의 인사를 표하기 위해서 이 장면을 삽입한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연기훈의 엄청난 착각이었다.
영화의 명장면이 페이드아웃 되더니 갑자기 또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
웬 마술사의 마술 쇼 장면이다.
영상 속 마술이 벌어지는 장소는 연기훈도 가 본 곳이었다.
라스베이거스의 레볼루션 홀.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퍼포먼스들이 공연을 하는 장소이며, 저곳에서의 단독 공연은 세계 최고의 퍼포먼서에게만 허용되는 명예였다.
한데, 저 마술사는 단독 공연 중이었다.
마술에 별 관심이 없는 연기훈은 마술사가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어딘지 얼굴이 익숙…….
‘엉?!’
진유성의 영상 속에 등장했던 리액션 좋은 외국인이다.
그때 화면으로 마술사의 화려한 프로필이 떠오르더니, 다시 한번 진유성이 마술 공연을 했던 장면으로 돌아왔다.
앞선 동영상에는 나오지 않았던, 공연 이후의 시점이었다.
[저는 토미 데이먼이라는 미국의 마술사입니다. 스스로 말하는 게 민망하지만, 꽤 유명한 편이죠.]
[함께 마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잠깐만, 그럼 저 마술사가 진유성한테 감탄을 한 건가?’
연기훈이 생각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또다시 뜬금없는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이번에도 연기훈이 아는 장소다.
베를린 필하모니.
대충 분위기를 보니 정기 연주회는 아닌 것 같은데, 피아니스트가 메인으로 잡히는 영상이었다.
한데 피아니스트의 얼굴이 익숙하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명 피아니스트 강윤섭.
‘아니, 잠깐만?’
연기훈은 클래식을 즐기는 사람이기에 당연히 강윤섭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아는 강윤섭의 외모는 한참 클래식을 즐겨 듣던 10년 전이다.
10년 쯤 지났으면 아마.
[혹, 피아노를 배울 생각이 있나?]
저렇게 늙었을 것 같다.
지금 화면에 나오는, 진유성이 거리 연주를 할 때 서 있던 노신사처럼.
연기훈이 그런 생각을 할 때, 동영상 화면이 암전되었다.
끝난 건 아니었다.
새까만 배경 위로 하얀색의 글자가 떠오른다.
죄송합니다.
선생님의 의도는 알겠지만,
전 특별합니다.
부와 명예.
그 모든 것을 제외해도!
“…….”
연기훈은 꼿꼿이 세우고 있던 허리를 무너트리며 의자에 앉은 채로 바스러졌다.
피곤하다.
너무나 피곤하다.
그에게는 더 이상 진유성이란 빌런에게 대항할 힘이 없었다.
개학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 * *
상소윤의 쇼핑몰 유니 셀렉샵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모든 것이 좋아지고 있었다.
쇼핑몰의 발전 포텐셜을 측정하는 지표들은 다양하지만, 그중 상소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두 가지였다.
환불 비율.
쇼핑몰 체류 시간.
그리고 이 두 가지 지표들은 시간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었다.
환불 비율은 낮아지고, 쇼핑몰에 들어온 고객의 체류 시간은 길어진다.
세상 경험을 시켜 주기 위해 돈을 빌려준 유혜연이 놀랄 정도로 말이었다.
물론 벌써부터 큰돈을 번 것은 아니었다.
내부 지표가 좋을 뿐이지, 절대적인 고객 수를 확보한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인터넷 쇼핑몰이 6개월을 버티지 못해 폐업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굉장히 훌륭한 시작이라고도 말할 수 있었다.
상소윤은 개학 직전, 쇼핑몰 관련 업무들을 인수인계 하느라 바빴다.
아무래도 개학을 하게 되면 방학 때처럼 쇼핑몰을 관리할 수 없기에, 상림이 소개시켜 준 직원 두 명에게 관리를 넘긴 것이었다.
물론 ‘어떤 옷을 팔 것인지’는 계속해서 상소윤이 정할 것이었다.
“와, 개꿀이다.”
“이제 학점 관리 대충 해도 되겠네요. 어차피 취업 확정인데.”
“그러니까. 앞으로 잘 해보자.”
참고로 상림이 소개시켜 준 두 명은 LF 건설과 연계된 대학의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들이었다.
이번 기수 인턴 중 유독 일을 잘하던 2명에게 졸업 즉시 채용을 약속하고는, 상소윤의 쇼핑몰과 연결시킨 것이었다.
모두가 윈-윈인 거래였다.
상소윤은 성실하고 유능한 직원을 얻어서 좋았고, 학생들은 취업을 확정 지어서 좋았다.
상림 입장에서도 인턴십 중 훌륭한 기량을 보인 이들에게 취업을 약속한 것이니 손해는 아니었다.
덕분에 상소윤은 며칠 남지 않은 방학을 기분 좋게 보냈다.
직원도 생기고, 대표님 소리도 들으니 진짜 사회인이 된 것 같았다.
딱 한 가지만 빼면.
“그래서? 내 돈을 갚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겠다는 것이냐?”
“그게, 어쨌든 직원을 뽑았으니까 사무실은 있는 게 맞지 않나 싶어서…….”
“사무실은 본래 있었잖느냐?”
“아니, 그건 창고였지. 옷 쌓아 놓고 배송하는 창고.”
“거기에 의자와 책상만 놔두면 사무실이었다. 굳이 새로운 사무실을 구한 건 너의 허영이 아니더냐?”
“아, 아니라고!”
“아직 담보를 무엇으로 할지 정하지 못했는데.”
“갚는다고!”
“유성, 유성, 유성 머니.”
진유성에게 빌린 돈을 갚는 시기가 한참 미뤄졌다는 것.
그래서.
“상소윤. 벌레를 물고 가는 새가 어떻게 나는지 아느냐?”
“뭔데?”
“푸드득.”
“…….”
“이해 못했느냐?”
“아냐……. 이해했어…….”
“그럼 웃어라.”
“하하.”
“억지처럼 들리는구나.”
“하하하하!”
120대인지 130대인지 모를 미친 아재의 개그에 억지로 웃어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상소윤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개학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생활이 시작되면 진유성에게 새로운 관심사가 생길 거니까!
그렇게 3일이 흘렀다.
누군가는 진유성 때문에 다가오길 원하지 않았고, 누군가는 진유성 때문에 간절히 원하던.
2학기가 시작되었다.
* * *
“넌 한 군데에만 서류 냈어?”
“응. 워싱턴. 너는?”
“난 아이비리그는 다 돈 거 같은데.”
“다 붙으면 어디 가게?”
고3의 2학기라서 그런지 대정고 3학년의 분위기는 1학기와는 사뭇 달랐다.
유학을 결정지은 학생들은 대부분 여름 방학 때 입학 관련으로 외국을 돌아다녔고, 시종일관 유학 관련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그에 반해 수능을 잘 봐야 하는 집안의 학생들은 이제 3달도 남지 않은 수능 공부에 열을 올렸다.
아마 그들이 여름 방학 때 족집게 과외를 위해 쓴 돈은 어지간한 회사원들의 1년 연봉을 훌쩍 넘을 것이었다.
하지만 수많은 학생들 중에도 유독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는 이들이 있었다.
상소윤, 정새롬, 지종수, 고인수, 심도훈.
아마 남들이 보면 저 다섯 명도 진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고 오해할 것이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들은 오늘 한 명의 학생으로 대화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대화에 임하고 있었다.
“작전은 학교 끝나고 시작하는 게 낫겠지?”
“9월 4일이 금요일이니까, 그게 자연스럽겠지?”
“종수 차에서 하는 건 어때?”
“진유성이 내 차에 탈까?”
“상황을 만들어 보자.”
그들은 교실문을 힐끔 거리며 대화에 집중했다.
아무도 매점에 가지 않자, 간만에 스스로 아이스크림을 사러 떠난 진유성이 돌아올까 싶어서.
하지만 진유성의 능력을 알고 있는 상소윤은 회의적이었다.
진유성의 말에 따르면 그는 아주 먼 곳에서 나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고 했는데, 모든 소리를 듣는 건 아니라고 했다.
관심이 없거나 쓸모없는 정보들은 듣지 않는다.
특히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집에서는 모든 소리를 흘린다.
하지만 ‘진유성’이란 이름이 들리면 기감이 저절로 확장된다고 했다.
그러니 아마 지금의 소리도 듣고 있지 않을까?
“소윤아, 넌 어떻게 생각해?”
“난 안 먹힐 거 같은데? 그냥 정상적인 생일 파티 어때?”
“뭔 소리야. 저번엔 너도 하자며.”
“아니, 뭐.”
속일 수 있으면 상관없지만, 속일 수가 없지 않은가?
그때 매점에 다녀온 진유성이 태연한 표정으로 교실로 들어오자, 연합군 멤버들이 순식간에 대화의 화제를 돌렸다.
“담임이 이상하게 방학 숙제 가지고 별 말이 없네.”
“그니까. 안 한 애들도 많던데?”
그 순간, 상소윤의 눈빛을 받은 진유성이 전음을 보냈다.
[내버려 둬라.]
역시 진유성은 다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