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61화>
* * *
포대기 위에서 몸 뒤집기를 시도하던 상도윤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꺄아아! 꺄아!”
자신의 몸이 날기 시작하자, 상도윤이 웃음소리를 내며 손을 내저었다.
단순히 손만 내젓는 게 아니라, 자전거를 타듯이 발을 구르기도 한다.
그 모습을 본 진유성이 상도윤을 조금 더 빨리 날게 해 주었다.
“이아! 아아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신생아의 언어였지만, 일단 신났다는 건 확실하다.
‘멀더의 술법을 쓰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지 않을까?’
진유성은 문득 호기심이 들어서 상도윤에게 멀더의 술법을 사용해 보았다.
진유성이 멀더의 술법이라고 부르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언어 습득의 마도술>은 사실 최상위 술법이다.
상대의 무의식에 접속해 새겨진 언어를 배워 오는 것이니 오죽할까.
게다가 언어 습득의 술은 대부분의 정신계 술법과 다르게 대상에게 아무런 해도 가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부담 없이 상도윤에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언어 습득의 술을 썼음에도 진유성은 상도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문이 열리며 상소윤이 들어왔다.
“어, 뭐야. 벌써 집에 와 있었네?”
“아우어!”
“……뭐 해?”
“방금 본 건 잊어라.”
진유성이 하는 이상한 짓을 하루 이틀 본 게 아닌 상소윤은 어깨만 으쓱했다.
“밥은 먹었냐?”
“어우으!”
“진짜 미친 거야……?”
“자, 잠깐만 기다려 봐라.”
드물게 민망한 표정을 지은 진유성이 숨을 고르며 언어 계통을 재정비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정상으로 돌아온 진유성이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직 밥은 안 먹었다.”
“근데 엄마는 어디 갔고, 너랑 도윤이랑 둘이 있어?”
“외숙모는 중요한 일이 있다며 부동산에 갔다. 가는 김에 장도 봐 온다고 했고.”
진유성이 대답과 함께 상도윤을 날려 보냈다.
상도윤이 헤엄을 치는 것처럼 손을 마구 흔들며 날아와 상소윤의 품에 안겼다.
“도윤아, 누나. 누나 해 봐.”
“우어와.”
“널 싫어하는 거 같다.”
“무슨 소리야. 이렇게 해맑게 웃고 있는데. 누나, 누나.”
“우어아아.”
“저리 비켜라, 덩치 큰 괴물아.”
“꺄아아!”
“죽여 주마.”
“업버버버.”
“제법 강하군.”
“으어우어어.”
“하지만 내겐 필살기가 남아 있다!”
“어으어으.”
“벽력일섬! 번쩍, 우르르 쾅.”
“…….”
상소윤은 상도윤의 옹알이에 더빙을 넣는 진유성을 미친놈처럼 쳐다봤다.
더빙만 넣는 게 아니라 효과음도 넣고 자빠졌다.
이미 몇백 번이나 생각한 것이지만 진유성은 제 정신이 아닌 듯했다.
하지만 역시 부르주아들은 자신이 어떤 호사를 누르는지 모르는 법.
세상에는 진유성의 주접을 간절히 갈망하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정새롬과 지종수를 비롯한 친구들 이야기였다.
그 뒤로 상소윤은 진유성, 상도윤과 함께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보통의 남매들은 싸우면서 자라지만, 상소윤과 상도윤은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싸울 것도 없었다.
애당초 19살과 1살이 싸운다는 것 자체도 성립이 안됐고.
상도윤의 자그마한 손을 쪼물딱거리던 상소윤이 물었다.
“근데 도윤이는 나이에 비해 성장이 엄청 빠른 거지?”
“그렇다고 하더군. 외숙모 말에 따르면 원래는 고개나 간신히 가눌 때라고.”
보통의 신생아들은 태어난 시점에 시력이 거의 없다.
하지만 상도윤은 뚜렷한 시력을 가지고 있었고, 상림의 번쩍이는 대머리를 보고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게다가 보통 아이들이 머리도 못 가눌 때 몸을 뒤집고 있고, 내공으로 조금만 도와주면 걷기도 한다.
전부 진유성이 내공으로 근골을 활성화시킨 덕분이었다.
“중원에서는 모든 애들이 이래?”
“그렇진 않을 거다.”
“왜? 무협 소설을 보니까 가주나 장로들이 어린애한테 분근착골 해 주던데.”
“분근착골은 고문이다. 근육을 분지르고 뼈를 골절 내는.”
“아니, 도윤이 앞에서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해?”
“네가 했잖느냐?”
“아니, 내 말은 소설 속에서 뭔가를 해 줬단 말이지.”
“벌모세수다.”
“엥? 세수를 해줘? 왜?”
“…….”
상소윤은 진유성이 무협 소설 속 세계관과 비슷한 곳에서 왔다는 걸 알고부터 무협 소설을 열심히 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디테일에서는 부족했다.
“벌모세수는 내공으로 온몸의 노폐물을 씻어 주는 행위라고 보면 된다.”
“흐음.”
“그러나 무협 소설 속의 벌모세수와 내가 해 주는 벌모세수는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그게 뭔데?”
“시전자가 다르지. 무려 이 몸이 해 준 것이니 그 효과가 남다를 수밖에 없지.”
진유성이 잘난 체하듯이 말해서 그렇지, 이는 사실이었다.
그가 살던 중원에서도 명문세가나 명문정파들은 기재가 태어나면 장로들이 나서서 근골을 만져 줬다.
하지만 그들과 진유성이 기운을 다루는 방식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었다.
진유성은 진기수발이 자유로운 경지를 아득히 넘어서 생각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
진기의 심상(心狀)과 현상(現像)이 일치하게 된 것이다.
그뿐인가?
인체란 소우주에 대해 진유성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무인은 전 중원에 없었다.
“그럼 외과 의사들보다 네가 더 잘 안다는 소리야?”
“물론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의학적인 지식은 피상(皮相)이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추상(抽象)이다.”
“추상은 뭉뚱그려서 아는 거 아니야? 추상화같이?”
“쯧쯧, 이리 무식해서야. 추상이란 개념과 특성의 상호 작용을 추출해서 파악하는 것이다.”
“호오…….”
상소윤이 박수를 치며 좋아하자 진유성은 의아함을 느꼈다.
상림이 저런 격한 호응을 할 때는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을 때고, 상소윤은 상림의 핏줄이다.
아니나 다를까였다.
“그럼 나도 벌모세수 해 주면 안 돼?”
“갑자기?”
“아니, 그 노폐물이 빠져나간다며.”
상소윤이 후다닥 소파로 달려가더니, 스마트폰을 가져와서 뭔가를 보여 줬다.
진유성이 애용하는 아이언맨 헬멧처럼 생긴 제품을 파는 사이트였는데, 제품의 역할은 완전히 달랐다.
“이게 요즘 핫한 미용 제품인데, 얼굴에 있는 노폐물을 싹 걸러 준다는 거야. 근데 이런 건 보통 허위 광고잖아?”
“…….”
“근데 네가 해 주면 허위가 아니라 진짜가 아니겠사옵니까, 교주님.”
“교주로서 명하니, 그 방정맞은 주둥아리를 다물어라.”
“뭐?!”
“어디 본 교주를 미용 제품으로 이용하려고 하느냐?”
“아, 해 줘! 해 주라고!”
결국 그들의 대화는 언제나 그렇듯 투닥거림으로 이어졌다.
얼마 뒤, 장을 봐서 집으로 돌아온 유혜연은 공중에 떠서 헤헤 거리고 있는 상도윤을 껴안으며 말했다.
“둘 다 언제 철이 들 건지…….”
* * *
상소윤은 신촌에서 친구들과 저녁을 먹었기 때문에 저녁을 먹지 않았다.
대신 진유성과 유혜연이 저녁을 먹는 식탁에서 후식을 먹었다.
식탁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상소윤이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야, 진유성.”
“왜 그러느냐?”
“네 진짜 생일은 언제야?”
“음?”
“아니, 호적상으로는 9월 4일인데, 그게 진짜 생일은 아니잖아.”
“내 생일은 중양절이다.”
“중양절? 그게 뭔데?”
“중양절을 모른다고?”
“내가 중원의 단어를 어떻게 알아?”
“이곳에도 중양절이 있고, 중국에서 가장 큰 명절이다. 모르는 네가 무식한 것이다.”
“엄마! 엄마는 알아?!”
“그럼.”
“진짜?”
“그래.”
“언젠데?”
“유성이가 말해 주겠지?”
아무래도 유혜연도 모르는 듯했다.
“9월 9일이다.”
“며칠 차이 안 나네?”
“엄밀히 따지면 차이가 크다. 중양절은 음력 9월 9일이니까. 한국 달력은 기본적으로 양력을 쓰지 않느냐.”
“아…….”
그때 진유성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떻겠느냐? 시차를 생각해 보면 내 생일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데.”
중원과 한국은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
진유성이 중원에서 90년을 훌쩍 넘는 세월을 보냈을 때, 상림은 한국에서 20년 남짓 살았다.
즉, 중원의 음력 9월 9일이 지구의 시간으로 며칠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앞으로 내 생일은 9월 4일이겠지.”
적어도 상림이 마련해 준 신분이 유효한 생애에는 말이었다.
진유성의 마음을 얼핏 이해한 상소윤이 입을 다물 때, 유혜연이 물었다.
“그러면 유성아. 보통 네 생일 때는 뭘 했어?”
“문파들을 찾아가 무력시위를 했죠. 곳간을 열라고.”
“응? 곳간?”
“곳간을 열어서 반경 백 리 안의 모든 백성들의 배를 불리는 잔치를 열게 했거든요.”
중원을 지배한 지 5년쯤 흐른 뒤부터는 강제할 필요 없는 연례행사가 됐지만, 처음에는 아니었다.
진유성, 신주청, 상림.
세 사람은 진유성의 생일 때마다 중원을 돌아다니며 문파들을 협박했다.
재밌는 건, 진유성의 힘을 목격한 정도 무림은 순순히 진유성의 요구를 이행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백 리를 오십 리로 줄이고 잔치의 규모를 줄이는 등의 술수를 썼지만, 그래도 따르긴 했다.
하지만 사파는 아니었다.
특히 녹림이 말을 제일 안 들었다.
좀 우스운 일이긴 했다.
평소에는 거들먹거리며 통행세를 받고, 상단을 습격하던 녹림이 진유성의 생일에 반경 백 리의 양민들에게 곡식을 푼다는 것은.
그래서 녹림은 진유성의 요구를 완전히 무시했다.
물론 녹림도 진유성을 두려워하긴 했지만, 그들은 정도 문파와 다르게 수틀리면 산채를 버리고 튈 수 있었다.
그래서 말을 참 안 들었다.
진유성이 해남에서 출발해 자금성을 접수하기까지의 3년은 정파와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자금성을 접수하고 난 이후 5년은 사파를 때려잡는 시간이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만백성을 편안하게 만들려면 사파도 굴복을 시켰어야하니까.
그래서 산적도 혼내 주고, 수적도 혼내 주려고 열심히 돌아다녔던 것이다.
“그럼 아빠랑 같이 나쁜 놈들 혼내 주러 다녔던 거네?”
“그런 셈이지.”
“올, 아빠.”
진유성은 그 뒤로 자신의 생일에 있었던 몇 가지 에피소드들을 들려주었다.
그 당시에는 귀찮았지만, 돌이켜 보면 재밌는 일들이었다.
“그래서 유성아, 생일 때 뭐 가지고 싶은 건 있어?”
“글쎄요?”
“원하는 게 있을 거 아니야?”
“제가 원하는 건 여전히 통일입니다.”
“통일? 통일은 왜?”
더 이상 유혜연은 진유성이 북한 지배 가문의 자제라고 오해하지 않는다.
“군대 가기 싫어서요.”
“너 군대 가……?”
“가야 한다고 하더구나.”
상소윤은 잠시 군대에 간 진유성을 떠올려 보았다.
만약 스물한두 살짜리 선임이 진유성을 갈구기 시작한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군대는 그 끔찍한 일을 바로잡을 힘이 없을 것이었다.
군대가 SG에 지원 요청을 보내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국가의 존립을 위해서라도 진유성은 군대를 안 가야 한다.
“그, 군대를 뺄 방법은 없나?”
“여러 방면으로 찾아보고 있었다.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다행이네.”
“뭐가 다행이냐?”
“네가…….”
상소윤은 ‘네가 군대에 가면 나라가 남아나질 않는다’라고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진유성은 도발을 들으면 넘기는 법이 없는 쑊 좁은 놈이다.
이 경우에는 애국심을 발휘해서 도발하지 않는 게 맞았다.
자칫 잘못하면 진유성이 열 받아서 입대하는 수가 있다.
“네가 군대에 가면 다른 병사들은 얼마나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겠어? 너는 다 잘할 거잖아.”
“호오. 후식으로 호두를 먹더니 제법 영민해졌구나?”
“……그러니까, 넌 안 가는 게 낫지.”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래. 맞지. 그게 맞아.”
유혜연은 진유성의 거들먹거림을 견디는 상소윤을 보며 대견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래도 그녀의 딸이 몇 시간 만에 철이 든 것 같았다.
“유성아, 네 생일 선물은 외숙모가 알아서 생각해 볼게.”
“네.”
“나도.”
“오냐.”
그렇게 그들은 평화로운 식사를 이어 갔다.
딱히 대단한 요리가 있는 건 아니지만, 넓디넓은 천신궁에서 홀로 먹던 진수성찬보다 훨씬 맛있었다.
여름이 한풀 꺾여 가는 8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