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259화 (259/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59화>

만물이 끝을 고하는 계절.

겨울.

강윤섭이 진유성의 겨울에 대해 물어본 것은 오직 음악가의 입장에서 던진 질문일 것이었다.

그 스스로가 생의 끝자락 즈음에 서 있기 때문에 떠오른 화두일 수도 있었고.

하지만 진유성에게는 꽤나 의미심장한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그 스스로가 끝에 대해 수없이 많이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중원을 일통하던 여름이 가고, 스스로의 다짐을 천명처럼 여겨 민초들의 삶을 위하던 가을을 지났을 때.

진유성은 겨울을 떠올렸다.

무공이 고강하다지만 그도 사람이니 언젠간 죽을 것이고, 그의 시대에도 끝은 올 것이다.

과연 나의 끝은 어떤 모습일 것인가.

나의 죽음에 민초들과 천마신교가 슬퍼할까?

힘으로 중원을 지배하던 무뢰배가 죽었다고 모두가 기뻐할까?

나는 역사서에 성군으로 기록될까, 아니면 폭군으로 기록될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주변의 사람들이 겨울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상림이 사라지고, 함께 중원을 일통했던 1세대의 수하들이 죽었다.

멀더와 신주청이 죽고, 그를 사모하던 주혜미가 죽었다.

그렇게 모두가 겨울을 맞이했다.

아마 그들은 각자의 세계에서 새로운 봄으로 소생했을 것이었다.

그 봄은 자식, 손자, 제자, 가문, 무공 등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었을 것이었다.

또는 신념이나 지식, 지혜 따위로 불리기도 했을 것이었다.

어찌됐든 한 사람의 세계가 종말을 맞이한 이후 그것을 거름삼아 탄생한 모든 것이 봄이라 불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진유성은 아니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겨울을 맞이하고 새로이 소생하는 봄이 되었을 때.

진유성은 여전히 가을의 언저리에 멈춰 있었다.

그때 그는 알았다.

더 이상 자신의 계절은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쩌면 100년이 지나고, 다시 100년이 지날 때쯤이면 그에게도 겨울이 찾아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진유성은 삶이 너무나 길었기 때문에 봄이 없었다.

중원에서는 신으로 불리었기 때문에 그가 남긴 모든 것은 신의 유산이 될 것이고.

한국에서는 상림의 가족이 죽는 순간부터 세상을 스쳐 지나가는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진유성에게 겨울은 모든 것이 사라지는 시간이며 두려운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론 간절히 원하며 부러운 시간이었고.

생각을 정리한 진유성이 피아노 옆으로 다가가자, 강윤섭이 몸을 일으켰다.

“자네의 겨울을 들려줄 수 있겠나?”

“당신의 연주가 아닌, 원본을 들을 수 있을까? 좀 헷갈려서.”

“원본은 그 누구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버전은 이걸세.”

강윤섭이 들려준 것은 1987년의 연주 실황을 담은 영상이었다.

세계 최고의 악기 베를린 필하모니.

바이올린 여제 안네 소피 무터.

둘을 지휘하는 황제 카라얀.

셋의 만남은 그야말로 클래식의 다음 단계를 보여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괜히 카라얀의 전후로 20세기 클래식의 역사가 나뉜다는 것이 아니었다.

진유성이 그 공연 실황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을 때, 강윤섭은 이상함을 느꼈다.

‘방금 반말을 한 건가?’

반말을 했다는 사실 자체에 이상함을 느낀 건 아니다.

그 사실을 바로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 진짜 이상한 것이었다.

한국인들은 나보다 어려 보이는 사람이 반말을 하면 일단 몇 살인지 확인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이상한 점도 있었다.

진유성이 반말을 했다는 것을 인지했음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것.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당연한 느낌마저 들었다.

정말 이상한 감정이었다.

강윤섭이 혼란을 느끼고 있을 때, 베를린 필의 영상이 끝이 났다.

영상을 본 진유성은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강윤섭은 방금 전까지 품고 있던 의문들을 전부 날려 버렸다.

지금 궁금한 건 그게 아니다.

강윤섭은 이제 진유성을 가르치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눈앞의 천재는 그가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며, 가르침이 필요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래서 너무나 궁금했다.

이런 천재가 어떤 음악을 들려줄지.

‘천재의 음악이라니!’

예술계에는 ‘천재의 기예는 있어도 천재의 예술은 없다’는 오랜 격언이 있었다.

천재의 문장은 있어도 천재의 문학은 없고, 천재의 소리는 있어도 천재의 음악은 없다.

이는 기술적인 부분은 타고날 수 있지만, 예술을 완성시키는 깊이는 세월만이 완성한다는 것이었다.

강윤섭은 본래 이 말을 깊이 믿는 사람이었다.

긴 예술 인생 속에서 직접 경험했으니.

그러니 지금 그가 천재가 들려줄 음악을 궁금해한다는 것은 자신의 경험을 모조리 부인하는 일…….

그 순간이었다.

느리고 낮은 음이 울려 퍼졌다.

원곡은 스산한 듯하지만, 자세히 들어 보면 산뜻한, 그러면서도 심장을 조금씩 조여 오는 추위처럼 시작한다.

그러나 진유성의 연주는 조금씩 젖어 드는 추위가 아니었다.

이미 온몸이 얼어 버릴 정도로 지독한 추위로 시작했다.

강윤섭은 당황했다.

사람의 음악은 경험한 만큼만 쏟아낼 수 있다.

한데 시작 지점에서부터 이토록 잔인한 추위와 냉기라니?

그렇다면 이후 이어질 극심한 추위는 어떻게 표현한단 말인가?

게다가 지금 진유성은 본래 풀 오케스트라로 표현해야할 음악을 피아노 한 대로 치고 있는 것이다.

베리에이션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천재는 느껴 보지 못한 것조차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나 강윤섭은 금방 자신의 생각을 철회해야 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폐부조차 얼려 버리는 것 같은 지독한 추위 앞에 놓인 것만 같았다.

정녕 이것이 경험해 본 적 없는 상상의 산물일까?

그게 아니라면…….

* * *

진유성이 숨을 내쉬었다.

아니, 들이쉬는 건가?

지독한 추위 앞에 숨을 들이쉬고 있는 건지, 내쉬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살을 베어 내는 것 같은 추위가 얼굴을 넘어, 식도를 지나, 폐부까지 관통한 것 같았다.

보이는 것은 온통 어둠뿐이다.

한밤중이라서 그런지 지독한 눈보라가 어둠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산짐승이라도 있다면 그 뜨거운 피를 마시고, 살점을 씹을 텐데.

지금의 생존대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순간, 풀썩 하는 소리와 함께 생존대원 중 한 명이 쓰러졌다.

눈이 풀려 있었다.

이대로 놔두면 잠이 들고, 잠이 들면 죽는다.

“--!”

정신 차리라고 소리친 것 같은데, 눈보라 소리 때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혀가 얼어붙어서 떨어져 나갔을 수도 있고, 고막이 얼어 버렸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정도맹에게 쫓긴 지 11개월.

지도를 살피던 진유성은 이대로라면 결국 붙잡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설산에 올랐다.

백 명이 오르면 아흔아홉이 죽는다는 만년설산.

이곳을 통과하는 것만이 그들의 유일한 생존로였다.

하지만 너무나 괴롭고, 괴로웠다.

풀썩.

뒤를 돌아보니 또 누군가가 쓰러졌다.

그때 신주청이 다가왔다.

“진유성.”

신주청이 자신보다 내가기공의 공부가 깊기 때문일까?

신주청의 목소리가 뚜렷하게 들렸다.

“선택해야 한다. 반만 살 수 있다.”

여력이 있는 인원이 부축해서 데려갈 수 있는 숫자.

절반.

그러나 진유성은 고개를 젓고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어제 달과 별로 거리를 쟀다. 우리는 설산을 다 건넜어.”

“진심으로?”

“그래. 봐라. 눈을 모을 수 있다.”

설산의 한가운데를 지날 때는 주먹으로 꽉 쥐어도 눈이 모래처럼 바스라졌다.

하지만 이제는 눈이 뭉쳐진다.

설산의 끝이 다가온다는 소리였고, 여기서 대원들을 포기할 수 없었다.

진유성의 통솔 하에 기력이 있는 대원들이 쓰러진 이들을 부축해 눈길을 걸었다.

하지만 그리 오래 가진 못했다.

점점 쓰러지는 이들이 많았고, 그들을 부축하는 게 힘에 부쳤다.

마침내, 이성을 유지하는 사람이 진유성과 신주청 둘뿐이었다.

그때 신주청이 말했다.

“가라.”

“뭐?”

“대주가 생존한 이상, 대는 해체되지 않는다. 네가 설산을 건너면 생존대는 설산을 건넌 것이다.”

그렇게 말한 신주청이 눈을 감았다.

풀썩 하는 소리가 들린다.

진유성보다 고강한 내공을 가지고 있는 그조차, 추위에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어쩌면 얼마 전에 기연을 통해 복용한 구지화양엽초가 자신을 지켜주고 있는지도 몰랐다.

양강의 기운을 품은 약초를 내공으로 바꾸지도 못하고 허겁지겁 도망쳤는데, 그 기운이 기경팔맥에 남은 것이다.

진유성은 홀로 모든 생존대원들을 눈 위로 모았다.

그리고 궁리했다.

분명 북해빙궁은 대설산 못지않게 추운 곳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살아간다고 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간다고 했지?

분명 그가 읽은 수많은 서책에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이 있을 것이었다.

궁리하고, 또 궁리했다.

마침내 진유성은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눈 위에 물을 뿌리면 열이 난다.

이는 물이 얼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며, 북해의 학자들은 사물이 얼어 버리면 품고 있는 열을 방출한다고 믿는다.

그들이 눈으로 된 집을 짓고, 그 눈에 물을 뿌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북해빙궁의 무공이 양강의 무공이 아니라, 음한의 무공인 것도 여기서 기인됐다고 추측한다.

‘물. 물이 필요하다.’

하지만 물이 있을 리 없었다.

물이 될 만한 것은 눈을 녹이는 것밖에 없다.

진유성은 생존대원들을 하나씩 눕히며 거대한 원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 원의 바깥에 눈의 장벽을 쌓아 올렸다.

마지막으로…….

목숨을 걸었다.

프스스스스.

자신이 품은 모든 내공에, 기경팔맥에 자리한 구지화양엽초의 기운을 더했고, 생명력의 근간인 근원진기를 끌어올렸다.

이윽고, 눈이 녹았다가 얼기를 반복하며 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신주청이었다.

신주청은 비몽사몽간에 오들오들 떨려오는 추위를 느끼다가 깜짝 놀랐다.

추위를 느낀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직 눈을 뜨진 못하겠는데, 눈꺼풀 위로 햇빛이 눈부셨다.

‘어떻게?’

그들은 전부 죽었어야 했다.

유일한 가능성이 있다면 정도맹이 그들을 추포한 것인데…….

그럴 수는 없다.

그들이 설산에 오른 것은 기습적인 선택이었고, 한겨울에 설산에 오르는 미친 짓이었다.

혹시 설산에 은거한 기인이 우리를 살려 준 것일까?

설산에 사람이 살 수 있을 것 같진 않지만, 그 방법 외에는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할 때쯤, 신주청은 간신히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리곤 주변을 둘러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

정도맹의 짓도 아니고, 기인의 도움도 아니었다. 신의 가호도 없었고, 행운 따위도 없었다.

그들을 살린 것은 오로지 진유성의 집념이었다.

신주청은 고마움보다 의문이 먼저 들었다.

대체 왜, 진유성은 이렇게까지 하는 것일까?

그는 어찌하여 자신을 불태워 타인을 구원하는 것일까?

신주청은 진유성과 같은 이들의 끝을 아주 많이 지켜보았다.

이런 이들은 둘 중 하나이다.

영웅이 되거나, 형편없이 죽어 잊히거나.

호흡이 들리는 걸 봐서 지금의 진유성은 살아 있지만, 이런 식이라면 그는 언젠간 죽을 것이다.

그리고 모두에게 잊힐 것이다.

“으음.”

그때 상림이 눈을 뜨는 소리가 들렸다.

설산의 겨울이었다.

* * *

강윤섭은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온몸이 떨리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렸고, 음악이 끝났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는 누구인가?”

“…….”

“어찌 그런, 그런 걸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음악들은 자네의 경험인가?”

진유성이 강윤섭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과연 한 분야의 끝에 이른 거장과 명인들은 다르다.

이해를 거부하는 이성보다 이해를 돕는 감성을 선택한다.

하지만 진유성은 굳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뭐가요? 연주가 들어 줄 만했나 보네요?”

“…….”

“내가 말했죠? 하루면 된다고.”

의뭉을 떠는 진유성을 보며 강윤섭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대신 물었다.

“그렇다면 자네의 겨울은 무엇이었나?”

“내 겨울이라…….”

진유성은 대답했다.

솔직하게.

약간의 침묵 뒤 진유성이 웃으며 강윤섭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배우고 갑니다.”

그렇게 진유성이 오피스텔을 빠져나가려는데, 강윤섭이 노구를 이끌고 다가왔다.

“하나만. 하나만 묻겠네.”

“뭐죠?”

“자네에게 또다시 겨울이 닥친다면, 자네는 같은 선택을 할 건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 마땅히 그러할 겁니다.”

진유성이 떠나고 텅 빈 오피스텔.

무언가를 아주 오랫동안 생각하던 강윤섭이 작곡용 오선지를 들었다.

그리곤 오선지 위로 음표를 빽빽이 채워 넣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오선지의 제일 위에 적힌 제목은 <유성(流星)>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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