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58화>
* * *
“여기가 내 연습실이네.”
강윤섭의 말에 슬리퍼로 갈아 신은 진유성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급 오피스텔의 내벽을 전부 제거해 강당처럼 탁 트이게 만든 집이다.
물론 강당과 비교하기엔 공간이 좁지만, 30평은 될 것 같은 공간이 탁 트여 있으니 넓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공간의 가운데에는 한 대의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에이전시에서 잡아 준 연습실은 따로 있지만, 난 이곳을 더 좋아하네. 남들에게 보여 주기 부끄러운 연습들을 할 수 있거든.”
“부끄러운?”
“뭐, 치기 어린 마음들로 치는 곡들이지.”
그렇게 말한 강윤섭이 피아노 앞에 앉더니 1분 남짓의 짤막한 곡을 연주했다.
진유성은 피아노에서 울리는 소리가 벽에 충돌하며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감탄했다.
‘방음벽이군.’
역시 지구의 과학 기술은 굉장하다.
전지의 존재가 내려앉은 곳이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결국 수많은 사고(思考) 끝에 과학을 발전시킨 것은 인간의 역량이 아니겠는가?
‘흠…….’
진유성이 방음벽을 쳐다보았다.
진유성은 몰랐지만 이곳의 벽은 차음재와 흡음재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진유성이 모르는 것은 사물의 명칭뿐이고, 원리는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방법으로 음공을 차단할 수 있나?’
물론 진유성은 지금도 호신강기를 통해서 소리의 전달을 막을 수 있고, 그 어떤 음공도 무력화시킬 수 있다.
애당초 중원무림에 음공으로 패권을 거머쥔 이가 나타나지 않은 것은 호신강기 앞에 무력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호신강기로 음공을 막는 것은 100의 힘을 들여서 10의 힘을 막는 일이다.
모름지기 효율적인 방어라 함은 10의 힘을 들여서 100의 힘을 막아야 한다.
‘이렇게 하면 되나?’
진유성은 강윤섭의 연주를 대충 흘리며 혼자서 음공과 흡음-차음의 원리를 충돌시켜 보았다.
그러니 놀랍게도 아주 쉽게 음공을 무력화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 물리학을 배우면서도 종종 느꼈지만, 과학 기술 중에는 무공에 응용하면 대단한 효능을 보이는 것들이 있다.
진유성이 새로운 무공을 개발해 냈을 때, 강윤섭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집중하지 않는군.”
“들었는데요.”
“그래? 내 연주에서 뭘 느꼈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
“……!”
대수롭지 않은 대답에 강윤섭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진유성이란 학생의 말이 정확했으니까.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수명이 다하는 신체적인 죽음은 아니었다.
강윤섭은 나이에 비해 건강한 편이었고, 지병도 없었다.
그러니 앞으로도 몇 년, 혹은 십몇 년은 더 살 것이었다.
강윤섭이 두려워하는 죽음은 피아니스트로서의 죽음이었다.
한데, 이 소년은 자신의 연주에 담긴 감정을 곧바로 꿰뚫었다.
역시나 그의 생각이 맞았다.
이 소년은 천재 중의 천재며, 무조건 피아노를 쳐야 한다.
하지만 강윤섭은 사기를 당하는 중이었다.
진유성은 연주에 담긴 감정을 꿰뚫어본 것이 아니었다.
그냥, 심상을 읽었다.
심검의 지극한 경지에 오른 진유성은 타인이 뿜어내는 심상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예술을 하는 이들은 심상을 줄기줄기 흘려서 읽기 편했다.
이 사실을 모르는 강윤섭은 온몸을 부르르 떨 정도로 놀라고 있었고.
그렇게 사기(?)를 당한 강윤섭이 진지한 태도로 진유성에게 물었다.
“피아노를 딱 하루만 배우겠다고 했지?”
“그랬죠.”
신촌의 차 없는 거리에서 만난 강윤섭은 진유성에게 피아노를 배워 보겠냐고 물었고, 진유성은 딱 하루만 배우겠다고 했다.
때마침 신촌에 정새롬을 비롯한 친구들이 당도해, 상소윤을 그들에게 보내고 강윤섭을 따라온 것이었다.
“하루라…….”
오성이 하늘에 닿아 심즉통(心卽通)과 심어행(心於行)의 경지를 구축한 진유성에게 물리적인 시간은 의미가 없다.
하루를 배우나 일 년을 배우나 비슷하다.
물론 하루를 배워서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될 순 없다.
예술에는 기술적인 부분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필요하니까.
하지만 중요한 건 하루만 배워도 최고가 되는 ‘방법’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나머지는 시간과 노력이 해결해 줄 문제이지, 누군가의 가르침이 필요하진 않았다.
어차피 진유성은 피아니스트가 될 생각도 없으니, 직업 체험의 마음으로 가볍게 한번 배워 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강윤섭에게는 하루라는 단어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눈앞의 소년은 천재다.
아니, 그냥 천재가 아니라 전무후무한 천재이다.
세계를 무대로 삼았던 강윤섭은 수많은 명 피아니스틀과 수많은 어린 천재를 목격했지만 진유성이란 소년만큼 뛰어난 이는 없었다.
초견도 아니고, 초연을 듣고 그대로 소리를 복사한다고?
그것도 벨로시티까지 똑같이?
불가능하다.
피아노를 배운 적도 없는 이가 피아니스트의 곡에 담긴 감정을 꿰뚫어 본다고?
이것도 불가능하다.
그것들이 가능하다면 세계 피아노의 정상에 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19살의 나이는 피아노를 시작하기엔 꽤 늦었음에도 말이었다.
그러니 이런 천재에게 피아노가 얼마나 쉽겠는가.
하루면 충분하다고 호언장담을 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 소년은 대정고에 다닌다고 했으니, 집안이 아주 부유하기도 할 것이었다.
‘내가 할 일은…….’
천재란 족속들의 생리란 늘 똑같다.
쉬워 보이는 것엔 흥미를 갖지 않지만, 거대한 벽을 느끼면 그 벽을 부수고 싶어 한다.
그러니 자신의 의무는 천재에게 벽을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친 곡을 그대로 따라 칠 자신이 있나?”
그 순간 진유성은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렸다.
영화에서 이와 똑같은 장면을 봤었다.
“혹시, 피아노 왕자?”
“뭐?”
“지금부터 피아노 배틀을 시작한다.”
“……?”
강윤섭은 잠깐 혼란스러웠으나 신세대들의 농담이라고 생각하고는 넘겼다.
그는 진유성의 주접에 일일이 반응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강윤섭이 깊이 심호흡하며 피아노 앞에 앉았다.
피아니스트들은 곡을 가리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사랑하는 곡들이 있다.
그는 월광 소나타 1악장을 사랑했다.
독일의 시인이자 음악 평론가인 루드비히 렐슈타프는 월광 소나타 1악장을 듣고 이렇게 말했었다.
달빛이 비치는 루체른 호수,
그 위에 뜬 조각배.
세계의 클래식 시장에서 동떨어진 한국인 출신의 거장.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거장이었던 건 아니었다.
조각배처럼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다가 오랜 시간이 걸려 당도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힘든 시간을 견디게 해 준 것이 바로 월광 소나타 1악장.
영화 음악으로 자주 쓰이고,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건 현란한 3악장이지만.
그는 자신의 외로움을 대변해 주던 1악장이 가장 좋았다.
이렇게 강윤섭이란 사람의 본질을 담고 있는 연주가 시작되자, 진유성은 감탄했다.
음공의 최고봉은 내가 소리를 내는 게 아니다.
심상 속에서 소리가 나와서 스스로를 죽이는 것이다.
심음지경(心音之境).
검공에 심검이 있다면, 음공에는 심음이 있다.
그리고 강윤섭의 연주는 내공이 없을 뿐, 가히 심음지경이라고 칭할 만했다.
그렇게 1악장의 연주가 끝이 나자, 진유성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박수를 쳤다.
하나의 길에서 극의를 본 명인들은 늘 존경스럽다.
강윤섭이란 남자는 자신보다 어리지만, 마땅히 존경받을 만한 이였다.
진유성의 박수 소리를 들으며 강윤섭이 미소를 지었다.
“똑같이 칠 수 있겠나?”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기에 진유성은 똑같은 소리를 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똑같은 소리일 뿐, 똑같은 음악일 수는 없다.
정확한 연주는 사람보다 기계가 더 잘한다.
피아노를 치는 기계를 만들어서 악보를 그대로 치게 만드는 게 뭐가 어렵겠는가.
실제로 어지간한 피아니스트들은 기계가 친 것보다 못한 소리를 낸다.
실험 결과도 있었다.
사람이 친 연주와 기계가 친 연주를 대중들에게 들려주고 투표를 하게 하는.
그러나 초일류의 영역으로 들어서면 달라진다.
정확한 연주만으로는 이길 수 없는 깊이가 생겨나며, 대중들도 그것을 느낀다.
이것은 곧 어린 천재에게 큰 벽으로 다가올 것이다.
같은 소리인데 대체 뭐가 다른지 모를 것이니.
거기서 호기심이 시작되고, 분노가 시작되며, 마침내 피아노에 매료될 것이다.
강윤섭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연습실에 진유성의 월광 소나타 1악장이 울려 퍼지기 전까지.
“아니……!”
완전히 똑같다.
연주의 수준, 소리가 주는 느낌, 곡이 담은 깊이.
그 모든 것이 같았다.
그저 소리만 복사하는 게 아니었다.
심지어 이번에도 템포 루바토까지 그대로였다.
이 말은 진유성이 악보를 알고 있는 게 아니라, 들은 그대로를 쏟아냈다는 뜻이었다.
‘이럴 수가?’
강윤섭은 이제 으스스해졌다.
이게 가능하려면 눈앞의 소년이 품은 깊이가 자신과 같아야 하니까.
그러나 강윤섭은 결코 알지 못할 것이었다.
진유성이 품은 삼라만상과 소우주는 너무나 넓고 깊어, 강윤섭의 것을 아득히 초월한다는 것을.
그때 연주를 끝낸 진유성이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재밌네요. 다른 거 없습니까?”
은근히 반말을 하던 진유성의 말투가 꽤 공손해졌다.
강윤섭을 완전히 한 사람의 명인으로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혼란스러웠던 강윤섭이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새로운 곡을 쏟아냈다.
이번엔 쉽지 않을 거라는 마음으로.
하지만 곡을 들은 진유성은 또다시 완벽히 따라했다.
그 뒤로는 비슷한 행위의 반복이었다.
강윤섭은 기술적으로 아주 어려운 곡도 쳐 보고, 화음 구성이 어려운 곡도 쳐 보고, 루바토를 파격적으로 구성해 보고, 심지어 자작곡도 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유성은 아주 평온하게 곡을 따라했다.
아니, 습득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피아노를 치는 진유성의 자세가 점점 좋아지더니, 마침내 프로 연주자의 것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마지막에 가서는 혼란스러워진 강윤섭의 페달 실수를 옳게 고쳐 치기도 했다.
이제 강윤섭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진유성이란 소년에게 벽을 느끼게 해 줄 수 없다는 걸.
아니, 애초에 벽이 존재할 재능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왜, 왜 자네의 곡은 치지 않나?”
“내 곡?”
“그 정도 실력이라면 이제는 날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자네를 담을 수도 있지 않나?”
강윤섭이 아쉬운 것은 진유성이란 사람이 담긴 곡을 듣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내 제자가 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겠네. 피아노를 배울 필요도 없다는 걸 알겠고. 그러니 자네의 곡을 한 번만 들려주게.”
“난 칠 줄 아는 곡이 없는데요?”
“그럴 리 없네. 편안함이 극에 이르면 여백이 생기고, 그 여백에는 분명 자신이 묻어나기 마련이네.”
진유성의 편안함은 이제 강윤섭을 넘어섰다.
처음에는 강윤섭이 치는 것을 그대로 복사하던 게 맞았다.
진유성은 소리와 악보를 외운 게 아니라, 강윤섭의 동작을 외운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몇 곡을 반복하다 보니 알게 되었다.
어떤 행동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
그때였다.
다짜고짜 피아노 앞에 앉은 강윤섭이 어떤 곡을 연주했다.
당연히 진유성은 곡명을 몰랐다.
하지만 그 곡을 듣는 순간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장면을 떠올리는 것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자신이 떠올린 장면과 강윤섭의 연주가 주는 감정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왜 그 장면이 떠올랐는지도 모를 정도로.
그때 강윤섭의 연주가 끝이 났다.
“내 겨울은 봄을 기다리는 계절이라네. 내가 죽더라도, 차가운 눈이 녹으면 땅위에 새싹이 피겠지.”
“노래 제목이 겨울입니까?”
“비발디 사계(四季), 겨울.”
강윤섭이 물었다.
“자네의 겨울은 무엇인지 들려줄 수 있겠나?”
강윤섭은 지금, 진유성이 스스로 그리는 끝에 대해서 묻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