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257화 (257/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57화>

* * *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진유성은 수많은 부분에서 문화 충격을 느꼈었다.

여인들의 옷차림도, 미의 기준도, 과학 기술도, 모든 게 파격적이었다.

파격(破格).

격식을 깨트린다.

이처럼 한국에서 조우한 대부분의 것들은 진유성이 알고 있던 격과 식을 부정했다.

하지만 그중 가장 이상했던 것을 하나 꼽아 달라면 진유성은 아마 노래라고 대답할 것이었다.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상소윤이 음악 방송이란 걸 본다길래 따라 본 적이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OST 중에는 꽤 괜찮은 음악들이 있었기에 흥미가 있었다.

하지만 음악 방송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아이돌들의 박색한 얼굴보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더 이상했다.

아니, 그건 노래가 아니라 소음이었다.

그 뒤로 진유성은 한 가지 오해를 했다.

지구에 있는 음악은 대다수가 소음이고, 소수만 좋다.

그러니 소수의 좋은 음악들은 명작 영화나 드라마에 쓰인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오해긴 하지만, 당시에는 그럴 법했다.

음악 방송에 나오는 아이돌 가수들의 노래와 명작 영화에 나오는 OST가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진유성은 지구의 음악에 관심을 거뒀다.

그런 진유성이 다시 음악에 관심이 생긴 것은 고인수 덕분이었다.

“저걸 보자고? 지금?”

“어, 왜?”

“예매해야 할걸? 저거 티비 광고도 하고, 유명한 거 아니야?”

“배급사 이름 봐 봐.”

“아버지네 회사가 배급한 거야?”

시험이 끝나고 친구들과 다 같이 놀러 갔던 어느 날.

정확히는 볼링장에서 진유성을 제외한 이들이 편을 먹고 패배를 안겨 줬던 날.

진유성은 친구들을 따라서 <레미제라블>이란 뮤지컬을 보게 됐었다.

1832년 2월 혁명의 파리를 배경으로 하는 레미제라블.

상처받고, 피폐하고, 가난한 이들이 내일을 다짐하며 부르는, 그 유명한 ‘내일로’를 듣는 순간.

가슴이 뛰었다.

자신의 과거와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일 것이었다.

그 뒤로 진유성은 지구의 음악에 대해 생각이 바뀌었고, 이런저런 음악들을 들어 보기 시작했다.

가요도 들어 봤고, 클래식도 들어 봤다.

그동안 외면하던 음악과 관련된 영화나 드라마를 챙겨보기도 했다.

그리고는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음악가들이 만든 음악은 대체로 좋고, 스타들이 만든 음악은 대체로 별로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긴 했지만, 극히 드물었다.

진유성은 지닌 바 통찰력이 하늘에 닿았기 때문에, 금세 현대 문화에서 ‘트렌드’란 단어가 내포하는 의미를 캐치한 것이었다.

그 뒤로는 진유성도 제법 음악을 즐기게 되었다.

베토벤의 피아노 연주곡을 듣고 감탄했고, 한국의 판소리에 깊이를 느낀 적도 있었다.

물론 상소윤은 핸드폰으로 <수궁가>나 <심청가> 같은 판소리를 듣는 진유성을 미친놈처럼 쳐다봤지만.

진유성이 피아노를 치겠다고 나선 것에는 이러한 이유들이 있었다.

한 번쯤은 경험해 보고 싶은 악기였으니까.

진유성이 그런 생각을 하며 피아노로 다가가자, 상소윤이 입을 열었다.

“여긴 치고 계시잖아. 저쪽에도 피아노 있는데 저기로 가 보자.”

“거리의 모든 피아노에는 연주자가 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소리가 들린다.”

“엄청 멀리 있는데?”

“소리가 어딘가에 흡음되어 사라지지 않는 한, 난 3km는 충분히 들을 수 있다.”

“아…….”

상소윤이 진유성의 능력에 새삼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가장 가까운 피아노를 치고 있는 어르신을 쳐다보았다.

피아니스트는 연세 지긋한 백발의 노인이었는데, 빳빳한 정장 차림과 꼿꼿한 허리가 꼭 교수님 같은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노신사가 치고 있는 곡은 상소윤이 태어나서 처음 들어 보는 것이었다.

‘구경하는 사람이 없을 만하네.’

보통 피아노 연주자들 주변에는 구경꾼들이 제법 몰리기 마련인데, 이는 연주자들이 유명한 곡을 연주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노신사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진유성과 상소윤을 제외하면 아무도 서서 듣는 사람이 없었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힐끔거리는 정도?

그래도 연주는 듣기 좋았고, 평온한 느낌을 주었다.

신촌의 길거리에서 듣기는 지나치게 서정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묘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상소윤의 집중력은 30분을 넘지 못했다.

노신사의 연주가 30분이 넘게 이어지자, 상소윤이 진유성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리곤 연주에 방해되지 않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야, 계속 이렇게 기다리기만 할 거야?”

“말 시키지 마라.”

“왜?”

“피아노 치는 법을 배우고 있지 않느냐.”

“저걸 보고 배운다고?”

“그래. 이제 대충 알겠구나. 할 수 있겠다.”

진유성이 몸으로 하는 일은 다 잘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피아노도 몸 쓰는 일로 쳐야 할까?

상소윤이 그런 생각을 할 때, 진유성이 상소윤의 정수리를 톡 하고 두드렸다.

“속이 왜 이리 좁으냐. 곧 자리를 뜰 터이니 기다려라.”

“자리를 뜬다고? 저 어르신이?”

“그래.”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다 아는 수가 있다.”

무공이란 오성의 겨룸이기도 하지만, 직감의 겨룸이기도 하다.

진유성은 눈앞에서 피아노를 치는 백발의 노인이 곧 자리에서 일어날 것 같았다.

어쩌면 음공을 배웠기 때문에 음악에 담긴 심(心)을 엿본 것일 수도 있고.

“야, 근데 너 담아 두고 있었지? 내가 쑊 좁다고 한 거?”

“……무슨 소리냐. 절대 아니다.”

“맞는데? 아니면 지금 속이 좁다는 말을 쓸 타이밍이 아닌데.”

“예의를 갖춰라. 네가 어르신이라고 부른 저 동생보다 내가 나이가 많다.”

“…….”

상소윤은 순간 충격을 받았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진유성은 120대와 130대 사이의 어느 나이라고 했으니까.

그때였다.

자신만의 세계에서 피아노를 두드리고 있던 노신사가 갈색 가방을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난 게.

어느덧 연주가 끝난 모양이었다.

노신사는 유일한 관객이던 상소윤과 진유성에게 점잖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단순한 거리의 연주가라기보다는 피아니스트처럼 보였는지, 상소윤도 허겁지겁 허리를 숙였다.

물론 진유성의 허리는 그대로였지만.

상소윤과 진유성의 모습을 본 노신사가 희미한 미소와 함께 떠나자.

“야, 인사도 안 받냐.”

“어깨를 두드려 주려다가 참았다. 사회적인 규칙이 있으니.”

진유성이 피아노 앞에 앉았다.

“캠코더로 이 완벽한 피사체를 잘 담도록 하여라.”

“야, 근데 너 칠 줄 아는 곡은 있어? 악보 외운 거 있어?”

“없다.”

“그럼 뭘 치게?”

“악보 대신 다른 걸 외웠지.”

그렇게 말한 진유성의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한국의 모든 피아니스트들에게 존경받는 원로 피아니스트 강윤섭은 신촌 거리를 빠져나오며 미소를 지었다.

손녀의 선물을 사기 위해 신촌에 들렀다가 우연히 발견한 피아노.

그 피아노를 보고 시작한 충동적인 연주가 퍽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좀 더 솔직히는…….’

마음에 든다는 표현보다는 서로를 위로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서대문구청에서 관리를 하고 있다고 해도, 거리의 피아노는 수명이 그리 길지 않다.

강윤섭이 보기에 오늘 그가 연주한 피아노는 수명이 다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장이 날 것이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분명 누군가는 그 피아노가 내는 소리를 듣고 즐거웠을 것이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자신처럼.

그런 생각을 하던 강윤섭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가방은 챙겼는데, 손녀의 선물은 챙기지 않았다.

연주 전에 피아노 안쪽에 놔 뒀는데 깜빡 잊어버린 것이었다.

‘사라진 건 아니겠지?’

5분도 지났는데 사라졌을 것 같진 않지만, 또 모르는 법이다.

그가 떠나고 자리에 앉았던 학생들이 있으니 말이었다.

헐레벌떡 조금 전까지 연주하던 피아노로 돌아오니, 다행히 손녀의 선물은 그대로 있었다.

자신의 연주를 구경하던 남학생이 연주하는 피아노 안쪽에.

강윤섭은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피아노 뒤쪽의 길가에 섰다.

지금은 연주 중이니 방해할 수 없고, 연주가 끝나면 챙길 요량으로 말이었다.

한데…….

연주를 지켜보던 강윤섭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리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강윤섭이 놀란 것은 훤칠하게 생긴 남학생이 자신이 연주했던 것과 똑같은 곡을 연주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연주할 수도 있다.

그가 연주한 곡은 며칠 전 콩쿠르 작곡 부문에서 3위를 차지한 독일 작곡가의 곡이니까.

즉, 이 곡은 세상에 공개된 곡이었다.

그가 이 곡을 순식간에 외워 버린 것은 은퇴를 앞둔 자신의 감정과 비슷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나, 젊은 피아니스트들은 노장들보다 악보를 더 빨리 외우곤 한다.

때론 선 자리에서 다 외워 버리기도 하고.

그러니 저 곡을 연주하고 있는 것 자체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윤섭이 소스라치게 놀란 것은 ‘실수’에 있었다.

강윤섭은 이 곡을 연주하면서 총 3번의 실수를 했고, 8번의 템포 루바토를 의도했다.

템포 루바토란 연주자가 나름대로 해석하여 템포를 바꾸는 변주를 뜻했는데, 이러한 변주에는 필연적으로 피아니스트의 색채가 녹아들 수밖에 없었다.

한데 눈앞의 남학생은 자신이 행한 3번의 실수와 8번의 템포 루바토를 완전히 똑같이 연주하고 있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저 학생이 자신의 연주를 입력하고, 그대로 출력했음을 뜻했다.

‘그게…… 가능하다고?’

이름난 피아니스트들은 초견(악보를 처음 보고 연주하는 것)으로도 완벽한 연주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초견을 넘어선다.

처음으로 듣고, 연주하는 것이니 말이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기억력이자, 절대 음감이었다.

하지만 기억력과 음감보다 강윤섭을 놀라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자세가 엉망이었다.

허리와 손목, 페달을 누르는 자세를 보건대, 이 학생은 피아노를 배운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로시티(건반을 누르는 속도)가 완벽했다.

아니, 완벽함을 넘어서 여유가 있었다.

본인이 원한다면 더욱 빠르게 누를 수도 있고, 더욱 느리게 누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의 연주를 똑같이 복사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었다.

이 같은 모든 요건들이 의미하는 단어는 두 글자.

천재(天才).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재능.

배우지 않았음에도 할 수 있고,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완벽하다.

‘하늘이 내 목숨을 거둬 가기 전에 운명을 내려 주시는 겐가?’

모든 대한민국의 피아니스트들이 첫 번째로 꼽길 주저하지 않으며, 세계에서도 두 손이면 그 순위를 매길 수 있는 피아니스트 강윤섭.

그는 운명을 느끼고 있었다.

강윤섭은 떨리는 두 손을 매만지며 남학생의 피아노 연주가 끝나길 기다렸다.

마침내 모든 연주가 끝났을 때.

그는 피아노로 다가가 손녀의 선물을 챙겼다.

그리고는 학생에게 물었다.

“자네, 혹시 피아노를 배운 적이 있나?”

“없는데요.”

“그럼 그 연주는 어떻게 한 건가?”

“그냥 치는 걸 봤으니까요.”

가슴이 두근거린다.

자신의 추측이 정확했다.

“혹시 잠깐만 시간을 내줄 수 있나?”

“왜요?”

“자네는 운명을 믿나?”

자신을 빤히 쳐다보던 남학생이 말했다.

“안 사요.”

“……뭘 팔려는 게 아니네.”

“종교 있어요.”

“포교 활동도 아니고.”

“연예인 안 합니다.”

“캐스팅도 아니네만…….”

강윤섭이 남학생의 오해를 푸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찌나 의심이 많은지, 인터넷에 자신의 영상과 뉴스 기사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 같다.

간신히 모든 오해를 풀었을 때, 강윤섭이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혹, 피아노를 배울 생각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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