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55화>
* * *
“아, 미친 담임. 방학 숙제는 무슨 방학 숙제야?”
“야, 근데 그거 알아? 원래는 대정고에도 방학 숙제 있었다?”
“진짜? 우린 1학년 때부터 한 번도 없었잖아.”
“개교하고 5년 동안 단 한 명도 제출을 안 하니까 없어졌대.”
“생각해 보니까 어이없네. 그 제출 안한 사람 속에 담임도 있는 거잖아.”
“그치.”
“근데 뭐 이런 걸 시켜?”
개학이 4일 남은 8월 말.
간만에 모인 지종수, 정새롬, 심도훈, 고인수는 그들의 담임을 씹느라 바빴다.
그만큼 그들의 담임인 연기훈이 내준 숙제가 어이없었기 때문이었다.
영화 의 등장인물들은 사립학교의 연극 동아리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막대한 부를 쥐고 있는 부모님들의 후원을 받아서 영국 왕실 극단에서 연극을 하고, 사립학교 부모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하지만 서민 출신 교사인 주인공이 보기에는 뭔가 이상했다.
그래서 실패할 확률이 0%인 울타리 안에서 자라는 학생들과 내기를 하는데, 그게 ‘거리 공연’이었다.
영화 속 학생들은 런던의 길거리 예술가들이 모이는 곳에서 공연을 하는데, 처음으로 철저한 무관심을 맛보게 된다.
그리고 그때 알게 되는 것이었다.
상위 1%의 특별한 삶을 살던 이들이 나도 그저 한 명의 사람일 뿐이라는 걸.
그동안 그들의 모든 삶은 돈 위에 세워진 가짜라는 걸.
그랬다.
연기훈이 내준 숙제도 이와 같았다.
거리 공연을 해서 찍어 올 것.
사실 이런 말도 안 되는 숙제를 내준 걸 보면 연기훈도 상식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영화 속 인물들은 원래 연극이라도 했지.
대정고 학생들은 갑자기 무슨 공연이란 말인가?
게다가 연기훈은 몰랐다.
“자자, 이리 오세요.”
정새롬의 목소리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오늘 촬영의 엑스트라를 맡아줄 알바생들이었다.
“그냥 적당히 지나가시다가 몇몇 분은 호기심이 동한 듯 이쪽으로 와 주면 돼요.”
그렇게 말한 정새롬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음원을 틀어놓고, 립싱크로.
촬영을 맡은 촬영팀의 스태프들이 쑥덕거렸다.
“립싱크를 하네?”
“어차피 야외니까 음원 대충 짓뭉개서 현장감 낸다더라.”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래요?”
“몰라. 나도.”
정새롬의 턴이 끝나고, 이번엔 지종수가 축구공을 가져와 트래핑을 했다.
다음은 더 심했다.
심도훈은 어디서 포커 카드를 가져와 대충 마술을 하는 척 만지작거리다가 촬영을 끝내 버렸다.
나머지는 편집이 해 줄 거라면서.
이게 연기훈의 실수였다.
지금은 영화의 배경이 되는 90년대가 아니며, 대정고 학생들은 훨씬 영악하다는 것.
그렇게 30분 만에 촬영을 끝낸 네 명은 엑스트라들에게 알바비를 지급하고는 숙제를 끝냈다.
나머지는 외주를 맡긴 편집 회사가 알아서 해 줄 것이었다.
“근데 소윤이랑 진유성은? 걔들도 숙제 해야 할 거 아니야.”
심도훈의 물음에 정새롬이 어깨를 으쓱했다.
“진유성은 진짜로 한다던데. 상소윤은 캠코더 들고 따라갔고.”
“뭘? 공연을 진짜 한다고?”
“어.”
“이 쓸데없는 걸 왜 하는 거지?”
“진유성 이상한 거 하루 이틀 보냐?”
“하긴.”
그렇게 말한 네 사람 사이에서 기묘한 침묵이 맴돌기 시작했다.
정새롬, 지종수, 고인수, 심도훈.
네 사람의 머릿속에는 공통된 생각이 떠올랐지만, 다들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진 않았다.
내가 꺼낼 수 없는 생각을 누군가가 대신 해 주길 기다리고 있을 뿐.
그들이 하고 있는 생각은.
‘보고 싶다!’
‘너무 너무!’
이제는 부정할 수 없었다.
자신들이 진유성의 주접에 중독됐다는 것을.
그러나 아직 인정의 단계는 아니었다.
결국 그들은 그럴 듯한 변명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진유성 이 자식이 소윤이와 단 둘이……!”
지종수가 어딘지 어색한 톤으로 분연히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자, 정새롬이 냉큼 끼어들었다.
“소윤이 심심하겠다. 전화나 해 볼까?”
심도훈과 고인수도 그럴 듯한 핑계를 대며 그들의 옆에 섰다.
잠시 뒤, 상소윤과 통화를 한 정새롬이 두 사람이 신촌에 있다는 정보를 가져왔다.
“신촌이면 바로 앞이네.”
“그러게.”
“가까우니 가 볼까?”
압구정과 신촌이 바로 앞이라고 표현될 거리는 아니지만, 누구도 그걸 지적하진 않았다.
* * *
토미 데이먼은 마술사였다.
그냥 마술사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한 손 안에 꼽히는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미국의 TV쇼에도 자주 나오고, 어마어마한 인스타그램 팔로워 숫자를 자랑하며, 일 년 내내 투어를 다니는 셀럽.
그런 그가 한국에 온 것은 휴가차였는데, 데이먼은 한국을 올해 휴가 장소는 꽤 잘 고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인종의 차이 때문인 것 같았다.
자신도 동양인의 얼굴을 구별하기 힘드니, 동양인들도 마찬가지겠지.
유명세는 그를 부자로 만들어 준 원동력이지만, 1년 내내 누군가의 시선에 노출된다는 것이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토미 데이먼은 한국을 여행하며 편안한 시간을 보냈고, 신촌에 당도하게 되었다.
홍대에서 내키는 대로 관광을 하다가 신촌까지 걸어온 것이었다.
“오호.”
그가 방문한 지역이 그런 건지, 한국이란 나라가 그런 건지.
길거리에 거리 공연을 하는 이들이 유독 많다.
토미 데이먼은 버스커들의 옆을 스쳐 지나가다가 한 한국인 남자를 발견했다.
노래나 춤 따위를 선보이는 격정적인 버스커들 사이에서 마술을 하는 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술을 하려고 준비를 하는 듯, 종이에 Magic이라는 글자를 쓰고 있었다.
‘한국 출신 마술사들은 대부분 솜씨가 좋았지.’
직업이 직업인지라 마술을 준비하는 이에게 시선이 간다.
요즘 꿈나무들은 어떤 마술을 주무기로 삼는지도 궁금하고.
결국 토미 데이먼은 남자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영어를 못하면 어쩌지라는 걱정을 하며 ‘Excuse me’로 대화를 시작했지만, 남자의 영어는 훌륭했다.
“무슨 마술을 할 건가요?”
“소멸 마술.”
“오, 어려운 걸 시도하는 군요. 제가 당신의 영상에 첫 번째로 등장해도 될까요?”
캠코더를 들고 있는 여자를 가리키며 묻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토미 데이먼은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은 남자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도 정체를 밝힐 생각도 없다.
하지만 이 한국인이 계속해서 마술의 길을 걸어가다 보면 언젠간 본인의 연습 비디오에 나오는 인물이 ‘토미 데이먼’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어쩌면 훗날 눈앞의 한국인이 유명한 마술사가 돼서 비디오를 들고 찾아올 수도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몹시 즐거웠다.
“야, 진유성. 이제 해도 돼. 잘 나온다.”
“나란 완벽한 피사체를 담으려니 캠코더가 잠시 긴장했었나 보군.”
“뭐래, 오토 포커싱이 꺼져 있던 건데.”
“잘 켜져 있던 기능이 왜 갑자기 꺼졌겠느냐? 거물을 앞에 두고 기능 저하를 일으킨 것이지.”
“테스트 삼아 날 찍다가 그랬는데?”
“지나친 박색함이 일으켰던 기능 저하였군.”
“…….”
토미 데이먼이 이해할 수 없는 한국어의 향연에 멀뚱히 서있을 때, 남자가 손을 내밀며 영어로 말했다.
“이 세상에서 소멸시키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꺼내 봐.”
“소멸?”
“없으면 동전도 괜찮고.”
토미 데이먼은 주머니에서 블루투스 이어폰을 꺼냈다.
“이걸 소멸시켜 달라고?”
“에어팟이 고장 났거든요.”
“진짜 없어지는 거야. 돌려 달라고 하면 혼난다.”
“혼난다고?”
아무래도 이 한국인은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나 직위가 높은 사람에게 영어를 배운 듯하다.
말투에서 상대를 내려다보는 느낌이 강하다.
“버리려던 걸 버릇처럼 챙겨온 거니까, 없어져도 되는 거죠.”
“좋아. 소멸시켜 주지.”
남자가 똑바로 서더니 오른손바닥을 보이며 손을 쫙 펼쳤다.
“이 손에 소멸시키고 싶은 물건을 가져다 대라.”
토미 데이먼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어폰을 남자의 손바닥에 가져다댔다.
이어폰은 자식이라도 달린 것처럼 손바닥에 찰싹 달라붙었다.
세계적인 마술사였기에, 토미 데이먼은 이 같은 행위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수십 개는 알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소멸 마술은 실제로 물건을 소멸 시키는 것이 아니다.
관객의 눈에서 소멸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관객의 정신을 분산시켜야 하고, 시선을 흐리게 만들어야 한다.
아마 이 한국인도 지금부터 트릭에 시동을 걸 것이었다.
‘어디서 왔어요?’ 따위로 말을 건다던지, 손을 교차시키는 방법 따위로.
하지만 남자는 토미 데이먼의 예상을 무참히 짓밟았다.
“없앤다.”
“바로?”
“어, 왜? 없애지 마?”
“아뇨…… 하시죠.”
남자가 주먹을 쥐는 순간 까드드득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얼하다.
정말로 그의 에어팟이 부서지는 소리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 상태에서 대체 어떻게 소멸을 시킨다는 것일까?
그저 손을 쭉 뻗은 채로 움켜쥐고 있을 뿐인데.
관객의 눈을 현혹시키는 몸 동작이 전혀 없고, 너무 정적이다.
그가 알고 있는 수백 개의 트릭 중 그 어떤 것도 저런 자세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마술이 아닌 게 아닐까?’
마술을 하는 척 기대감을 줘 놓고선 장난을 치는 몰래 카메라 같은 게 아닌가?
하지만…….
“소멸했다.”
“네?”
“없어졌다고.”
남자가 손을 펴는 순간.
“……!”
그의 손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말도 안 돼!”
“후후.”
토미 데이먼의 격한 반응에 남자는 꽤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보았느냐? 전 세계로 뻗어 나가는 나의 마술을.”
“외국인이라서 그런지 리액션이 좋네.”
“만국공통의 반응이다.”
“근데 수학여행에서는 3등에도 못 들었죠?”
“그 자식들 눈이 잘못돼서 그렇다. 아마 이 미국인은 마술에 대한 조예가 깊은 사람일 것이다. 그러니 나의 마술에 놀라는 것이고.”
“야, 엄밀히 따지면 이건 마술도 아니잖아. 그냥…….”
“어허! 입이 방정맞구나.”
두 한국인이 투닥거리는 사이, 토미 데이먼은 정말로 놀라고 있었다.
이 한국인은 마술의 일부라고 볼 수 있는 쇼맨십도 없고, 호기심을 자극하지도 못하고, 재미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방법을 이해할 수가 없다.
똑바로 선 채로 손만 뻗고 있었는데, 대체 어떻게?
“하, 한 번만 더!”
마술사들은 어떻게든 트릭을 알아내려고 하는 관객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속고 속이는 것 자체가 퍼포먼스의 일종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토미 데이먼은 자신이 싫어하던 관객의 모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마술사로서의 자존심이다.
정확히 어떤 트릭인지 알아낼 필요는 없어도, 큰 틀에서 어떤 방식으로 했는지는 눈치 챌 수 있어야한다.
그걸 못하는 순간, 주류의 흐름에서 도태되는 것이다.
토미 데이먼의 격렬한 반응에 흐뭇해진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이번엔 동전이었다.
토미 데이먼은 500원짜리 동전을 쥔 남자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여전히 다리와 어깨선은 고정이고, 왼손은 미동도 없다.
시선을 현혹시킬 것이 전무하다.
그러나.
까드드득!
동전이 짓눌리는 소리와 함께 손이 열리자,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토미 데이먼은 자신이 알고 있는 마술이 부정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혹시 각성자인가?’
아니, 아니다.
토미 데이먼은 셀럽이었기 때문에 각성자 친구들과도 친분이 있었다.
얼마 전에 멕시코에 귀화를 했다가 사망한 SS급 각성자인 콜 헨드릭과도 친분이 깊었고.
SS급인 콜 헨드릭도 불가능하다.
손에 쥔 물건을 짓이길 수는 있어도, 눈에 보이지 않게 만들 수는 없었다.
토미 데이먼이 황급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곤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접속해서 남자에게 건넸다.
“저는 토미 데이먼이라는 미국의 마술사입니다. 스스로 말하는 게 민망하지만, 꽤 유명한 편이죠.”
“근데?”
“함께 마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인스타그램을 보면 자신을 알아볼 줄 알았지만, 남자의 표정은 시큰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