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54화>
“역시 아빠가 섬서성의 태행산을 넘을 때가…….”
“내가 혈혈단신으로 화산파의 매화검진을 뚫을 때가…….”
거의 동시에 말을 한 상림과 진유성이 눈살을 찌푸렸다.
“화산파?”
“태행산?”
“기억 안 나세요? 제가 혼자 외줄다리를 지켰던 거. 거의 뭐, 장판파의 장비였죠.”
“장판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동네 뒷산에서 좀 싸운 거 가지고.”
“뒷산이라뇨? 태행산은 지구에서 중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고 부를 정도로 험준하고…….”
“아, 됐고. 그래서 몇 명이랑 싸웠는데?”
“수백 명이랑 싸웠죠.”
“웃기고 있네. 그냥 열댓 명 오니까 다리 줄 끊고 튄 거잖아.”
“아니, 언덕 밑에 수백 명의 궁귀들이 활을 쐈다니까요? 그걸 내가 다 쳐냈고!”
“안 보이던데?”
“감기 걸려서 골골대고 있었으니까!”
“아니, 근데 네가 궁귀들의 활을 쳐낼 실력이 아니었는데? 그냥 낭인들 아니었어?”
“옷이 모산파였거든요?! 술법 쓰고 화살 날리는!”
“낭인들이 겁주려고 입었나?”
“와, 자기는 아프니까 누워서 간 주제에. 아니, 그래서 태행산에서 교주님은 뭘 하셨는데요.”
“…….”
상림의 질문을 외면한 진유성이 화제를 돌렸다.
“아니, 내가 매화검진 뚫을 때 넌 뭐했는데? 각자도생하라니까 냉큼 튀었잖아?”
“그거야 교주님이 혼자가 편하다고 빨리 가라셨잖아요?”
“가란다고 진짜 가냐?”
“그럼 가짜로 가요?”
“아, 그래. 그건 그렇다고 치자. 근데 솔직히 중원에서 단신으로 매화검진을 뚫을 수 있는 사람이 있냐?”
“당연히 없죠. 그런 바보가 있을 리가 없거든요.”
“바보……?”
“제가 분명 화산은 피해서 가자고 했죠. 그러니까 뭐랬어요? 오히려 본거지인 화산이 텅 비었을 거라며?”
“텅 비었던 거 맞거든? 일반 제자들은 다 각출돼서 나가 있었고.”
“그럼 뭐 해요? 칠십이 매화검수가 지키고 있었는데.”
“지킨 게 아니라, 화산파 장문인이 주화입마에 들었다는 소식에 헐레벌떡 돌아오던 걸 만난 거라고!”
“업어 치나 메치나.”
“업어 쳐 줘?”
상소윤은 대체 아빠와 진유성이 왜 싸우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버랩되는 장면은 있었다.
남학생들이 게임을 누가 더 잘하는지를 따지다가 싸울 때가 꼭 저렇다.
사실 진유성과 상림이 싸우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본인이 가장 돋보였던 순간에 상대방이 없었으니까.
갈수록 언성이 높아지자, 듣다 못한 상소윤이 말을 보탰다.
“아니, 누가 활약한 거 물어봤나? 그냥 재밌었던 일 없냐니까? 웃긴 거나, 흥미로운 거.”
“웃긴 거?”
“흥미로운 거?”
잠시 생각하던 진유성이 입을 열었다.
“중원을 일통한 내가 자금성에 들어와 주씨 황가를 억누를 때의 이야기다.”
* * *
“너 이름이 뭐더라?”
천신궁 안으로 들어온 황태자 주태윤이 이를 악물었다.
눈을 게슴츠레 뜬 진유성의 질문 때문이었다.
“아, 미안. 진짜 기억이 안 나서 그래.”
“…….”
“주…… 뭐였는데? 그치?”
“……주태윤이오.”
황태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유성의 뒤에 서 있던 신주청에게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폭사되었다.
살기가 황태자에게 닿기 직전.
신주청의 살기는 봄 나비의 날갯짓처럼 하늘하늘 사라져 버렸다.
진유성이 손을 쓴 것이었다.
“야, 아직 애잖아. 너무 그러지 마라.”
“하지만…….”
“말 좀 편하게 했다고 사람을 죽이냐? 으휴, 살인 중독자.”
“…….”
“됐어, 됐어. 그래, 태윤아. 뭐 때문에 왔어? 편하게 말해 봐.”
진유성의 말투에 주먹을 꽉 움켜쥔 황태자는 간신히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리곤 태연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다.
“천마신교는 대명치세와 중원무림을 일통했소.”
“근데?”
“천신은 어찌하여 동쪽의 오랑캐들은 내버려 두는 것이오? 그대 수하들의 역량이라면 동쪽 변방의 오랑캐들을 정벌하는 것 따위는 쉬운 일 아니오?”
“…….”
“혹시 그 말이 사실이오? 그대가 동이족(고려) 출신이라는 것.”
“…….”
“천신이 어찌……!”
그 순간, 진유성이 피식 웃었다.
“꼬맹아, 싸움을 걸 때는 상대가 어떤 종류의 무기를 가졌는지를 알아야 하는 거다.”
“본 태자는 싸움 따위 하지 않소.”
“아니, 넌 방금 내게 정치란 무기를 들이밀었다. 그럼…….”
진유성이 천천히 황금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내 무기는 뭔 거 같냐?”
그 순간, 황태자는 환상을 보았다.
의자에서 일어난 진유성의 몸이 천신궁을 가득 채울 만큼 거대해지고, 그대로 자신의 정수리에 검을 내리찍는 환상.
“으아아악!”
몸이 두 동강 났다.
힘없이 쓰러진 왼쪽 신체는 왼쪽 바닥을 보았고, 오른쪽 신체는 오른쪽 바닥을 보았다.
두 조각으로 잘린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천신궁의 바닥을 적신다.
이건 환상이 아니다.
진짜다.
진짜로 죽은 것이다.
‘내, 내가 여기서…….’
황태자의 의식이 흐려졌다.
이윽고 죽음을 맞이했다.
턱.
“!”
황태자는 차가운 대리석 바닥의 감촉에 화들짝 놀랐다.
죽었다. 나는 분명 죽었다.
한데……. 왜 살아 있지?
“흐억!”
황태자가 거친 호흡을 내쉬는 걸 지켜보던 진유성이 갑자기 고함을 내질렀다.
“궁녀! 궁녀들은 어디 있는가!”
진유성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천신궁 주변의 모든 궁을 관통했다.
이윽고 궁녀들이 헐레벌떡 달려와 머리를 조아리자, 진유성이 황태자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황태자가 실수로 오줌을 지렸다! 궁녀들은 속히 갈아입을 의복을 준비하라!”
신주청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황태자는 모르겠지만, 진유성의 목소리는 자금성 곳곳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때, 진유성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아니다! 오줌만 지린 게 아니다! 더 큰 거다! 묵직하다!”
그 뒤로 진유성은 매년 같은 날 황태자에게 고려에서 들여온 요강을 선물했다.
아무데서나 지리고 다니지 말라는 덕담과 함께.
* * *
이야기를 끝낸 진유성이 어깨를 으쓱하며 상소윤에게 물었다.
“어때? 재밌지?”
“……더러워.”
“더럽다니. 꼴등이라서 이 이야기에 담긴 깊은 뜻을 모르는 게냐?”
“야! 나 이제 꼴등 아니거든? 그리고 황태자가 바지에 지린 거에 무슨 깊은 뜻이 있냐!”
“왜 없느냐. 만민 위에 군림하던 태생부터 존귀한 이들을 생리 현상도 참지 못하는 팔푼이로 만들었는데.”
“어?”
“뭐……. 결과적으로는 내가 만민 위에 군림하게 됐으니 원하던 바는 아니었지만.”
상소윤은 진유성의 말 속에 담긴 뜻을 알 것도 같았고, 모를 것도 같았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진유성은 중원에서도 진유성이었던 것 같다.
문득 DDP 게이트에서 진유성이 해 줬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네가 철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는다.”
“한데, 너는 철이 없는 사람임과 동시에 보육원에 꾸준히 봉사활동을 가는 사람이며, 용돈의 일부를 후원하는 사람이다.”
“그 모든 것이 너이듯, 네가 본 모든 것도 나다. 내 삶은 남들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렇다고 네가 본 진유성이 거짓인 것은 아니다.”
그때 상도윤에게 이유식을 먹이고 있던 유혜연이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뭐 없어요? 재밌었던 일?”
“나? 나는 뭐…….”
상림이 기억을 더듬었다.
사실 자신에게 재미있던 시기는 짧았다.
중원을 일통한 이후, 게이트에 들어서기 이전.
햇수로 따지면 6~7년 정도.
그때를 제외하면 그들은 멸마대에서 지옥 같은 일상을 보냈고, 생존대에서 도망을 다녔고, 천마신교가 되어 정도맹에 복수를 했다.
그 6~7년 동안 뭘 했냐면…….
상림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진유성은 입을 다물 생각이 없었다.
“방탕한 쾌남의 삶을 즐겼지.”
“제, 제가요?”
“한국에선 아니지만, 중원에서는 절세미남이었으니까.”
“오늘따라 농담이 좀…….”
“언제부터인가 상림이 옷에 림(臨) 자를 새기고 다니길래 물었더니, 이래야지 여인들이 천마신교의 3인자인줄 안다고…….”
“제, 제가 언제요!”
“단골 멘트가 그거 아니었나? ‘수천 명의 적 앞에 설 때보다 당신의 눈길을 받는 지금이 더 떨리는군.’”
“아니 무슨 과장을……!”
상림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유혜연의 시선을 피하다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 뒤로는 폭로전이었다.
상림은 진유성의 쪼잔한 행적들을 낱낱이 고했다.
상림의 입을 통해 쏟아지는 진유성의 쪼잔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진유성은 그에 대적해 상림의 허세 가득한 행적들을 고했다.
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의 진유성은 상림이 기어오르면 가차 없이 응징을 했다.
물론 유혜연과 상소윤이 보고 있으니 직접 때리는 일은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으로만 싸우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상림과 진유성은 한참 동안 떠들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들이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을.
가끔은 부끄럽고, 가끔은 민망했던 그 모든 시간을 지나 도달한 게 지금의 진유성과 상림이니까.
그러니 지금.
그들은 처음으로 가족에게 자신들의 100%를 온전히 내보이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그들의 생각일 뿐이었다.
“진유성…… 당분간 나한테 말 걸지 마.”
“당신도요.”
때론 흑역사는 즐거운 추억이 되기도 하지만, 보통 본인들에게만 그런 경우가 많았다.
* * *
대정고 3학년 1반의 담임인 연기훈은 대정고 학생들을 지적하고, 나무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대정고 학생들과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다른 대정고 교사들은 학생들을 어려워하고, 제자라기보다는 갑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이 자식들은 방학을 잘 보내고 있으려나.”
연기훈은 그런 생각을 하며 방학을 보내다가 우연히 TV에서 해 주는 라는 고전 영화를 보게 되었다.
미국의 상위 1%의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는 고등학교에 들어오게 된 서민 선생.
처음에는 학생들에게 무시도 당하고, 조롱도 당하지만, 선생님이 계속해서 학생들을 진심으로 위하자…….
이기적이던 학생들이 조금씩 변하더니, 고민도 털어놓고, 마지막에는 진심을 보일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일련의 과정이 굉장히 그럴듯하면서도 감동적이었다.
전형적인 할리우드 스타일의 영화였으나, 자신이 처한 상황과 비슷해서인지, 연기훈은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
‘그래, 우리 반 아이들도…….’
연기훈은 어쩌면 그의 제자들에게 부족한 것이 스승의 사랑과 관심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곧장 인터넷에 접속해 방금 봤던 영화를 다운받았다.
그리고는 영화를 곱씹어 보며 대정고의 아이들에게도 도움이 될 만한 장면이 없을까를 고민했다.
그러다가 하나의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상위 1%의 특별한 삶을 살던 이들이 나도 그저 한 명의 사람일 뿐이라는 걸 깨닫게 되는 장면.
“바로, 이거다!”
연기훈은 곧장 핸드폰을 들어 3학년 1반의 학생들에게 단체 메시지를 보냈다.
[무더운 여름이 한풀 꺾이고, 너희들의 미래처럼 싱그러운 날이 반복되고 있는 여름과 가을의 사이 어디쯤에서.]
[나의 제자들아,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구나.
[다름이 아니고, 선생님이 너희에게 한 가지 방학 숙제를 내어 주려고 한단다…….]
메시지를 전송한 지 1분도 지나지 않아서 지종수에게 답장이 왔다.
[안 하면요?]
[뒤진다.]
[네…….]
연기훈은 자신이 영화 속의 선생님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 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