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51화>
* * *
“야, 이. 또라이야.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어허, 무엄하도다. 나는 피겨의 신이다.”
“어휴, 미친놈.”
상소윤이 또다시 등짝을 가격하려 하자, 진유성이 슬쩍 피했다.
“얼음판 위에서는 맞아 줬지만, 밖에서는 아니다.”
“뭐?”
생각해 보니 그러했다.
상소윤은 그동안 무수히 진유성을 타격하려고 시도했었지만, 정작 그녀의 손이 진유성에 닿은 적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닿은 것도 진유성이 이유가 있어서 맞아 준 것이고.
그러니 아이스링크 안에서 맞아 준 것도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왜 맞아 줬냐?”
“뭘 말이냐?”
“아니, 링크 안에서 평소처럼 피하지 않고 맞아 줬냐고?”
상소윤의 말에 진유성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넌 스케이팅을 못한다.”
“나 잘 타거든!”
“하지만 나보다 못한다.”
“……아빠가 왜 널 욕하는지 알 것 같아.”
진유성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진유성은 오늘 처음 스케이트를 타 봄에도 수십 년을 탄 사람처럼 움직였다.
뒤로 가는 건 물론이고, 심심하다며 한 발의 날 끝으로만 타려고도 했다.
그 모습이 너무 눈에 띄는 것 같아서 상소윤이 말리지만 않았다면, 아마 누군가 동영상을 찍어 유튜브에 올렸을 것이었다.
스케이팅 고인물 같은 제목으로.
그러니 진유성이 상소윤에게 자신보다 스케이트를 못 탄다고 말하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는 대답이 안 된다.
“아, 그래. 너보다야 못 타겠지요. 근데 왜 맞아 줬냐니까?”
“넌 몸치다.”
“뭐?”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동작이 필요하다. 운동 에너지를 만들고, 이동시키고, 적중시키는.”
“뭐지? 이 쓸데없는 정보는?”
“그 세 가지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체를 통제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너는 몸치기 때문에 신체를 통제할 수가 없다.”
상소윤이 발끈하려는 순간, 진유성이 말을 이었다.
“몸치인 데다가 얼음판 위라는 걸 생각해 보았을 때, 내가 피하는 순간 넌 운동 에너지를 제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즉, 넘어질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뭐?”
“또한 얼음과의 반발 마찰력을 최소화하기 위해 날카롭게 벼려진 스케이팅의 날을 생각해 보았을 때, 넘어질 경우 다칠 확률이 매우 높다.”
“…….”
“그래서 맞아 준 것이다.”
진유성의 말에 상소윤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딘지 미친놈 같으면서도 달콤한 느낌이 든다.
아니, 달콤한 것 같으면서도 미친놈 같은 건가?
아빠가 왜 진유성을 욕하면서도 좋아하는지 알 것도 같다.
결국 상소윤은 웃는 것도 아니고, 인상을 쓰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본 진유성이 흠칫 놀랐다.
상소윤이 박색함의 더 높은 경지를 개척한 것 같다.
박색이 입신의 경지에 다다랐다.
진유성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상소윤이 말했다.
“아무튼 막 그렇게 눈에 띄게 행동하지 말라니까? 무슨 대여섯 바퀴를 점프해서 돌고 있어.”
“장로님, 점프 뛰십시오.”
“뭐?”
“아니다. 어떤 무협 소설이 떠올라서 해 본 말이다.”
“아, 뭐라는 거야. 조심 좀 하라고.”
연이은 상소윤의 타박에 진유성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축구를 잘하는 것과 스케이트를 잘 타는 게 무슨 차이냐?”
“스케이팅이 더 화려하잖아.”
“결과만 놓고 보면 고등학생이 외국 프로 선수를 이긴 게 더 요란하지 않겠느냐?”
“음, 생각해 보니 그러네.”
상소윤은 문득 아주 근본적인 호기심이 들었다.
“야, 진유성.”
“왜 그러느냐?”
“왜 이렇게 열심히 주접을 떠는 거야?”
“주접?”
“아니 뭐. 재밌어서 그러면 그러려니 하는데, 막상 보면 엄청나게 재밌어 하는 것 같진 않단 말이지?”
축구가 됐든, 피겨스케이팅이 됐든, 진유성의 입장에서는 아주 쉬운 일인 것 같았다.
그리고 쉬운 일은 열심히 하는 게 쉽지 않다.
한데, 진유성은 매사에 굉장히 열심이다.
진유성이 상소윤의 얼굴을 쳐다보며 잠시 멈칫거렸다.
머뭇거리는 법이 거의 없는 진유성에게는 드문 태도였는데, 이는 진유성이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생각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었다.
아마 상림은 알고 있겠지만, 진유성은 매사에 장난스러운 것 같아도 막상 자신의 이야기를 잘 털어놓지 않았다.
진유성이 가감 없이 속내를 털어놓았던 사람은 신주청과 상림이 유일했다.
아마 평소 같으면 진유성은 이번에도 말을 돌렸을 것이었다.
그러나 왠지 상소윤에게는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이 왜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소윤. 난 내 수명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그걸 누가 알겠어?”
진유성이 100년이 넘도록 살아왔다는 건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사실 와닿지 않는 이야기였다.
19년밖에 살지 않아 세월을 체감해 본 적이 없는 상소윤에게는 더더욱.
“남들과 나는 수명의 개념이 다르다. 토 달지 말고 들어 봐라.”
“알았어.”
“원래 무림인들은 수명이 갑작스레 끝난다. 내공이 선천진기의 누수를 막아 쭉 건강하다가도, 한순간에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대충 이해했어.”
“하지만 나 같은 경우는 내가 언제 죽을지 대충은 알 수밖에 없다.”
진유성은 인체란 소우주를 통제하는 데 있어서 신보다 더한 경지에 도달한 이였다.
일전에 타트바가 진유성에게 환상을 보여 준 적이 있다.
처음엔 당했지만, 두 번째는 아니었다.
그는 타트바가 보여 주는 환상을 거부했고, 이에 타트바는 크게 놀랐었다.
이것 자체가 진유성이란 소우주의 주인이 진유성임을 뜻했다.
그 어떤 초월적인 존재의 간섭에도 견딜 수 있는 독립성을 완성한.
그러니 진유성은 인체란 소우주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완벽히 파악할 수 있었고, 자신이 언제쯤 죽을지도 대충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았다.
진유성이 품고 있는 힘은 너무나 막대하고, 기운에 대한 구속력은 너무 강인했다.
적어도 앞으로 100년 동안 진유성은 죽을 일이 없다.
100년도 최소의 최소로 잡은 것이고, 어쩌면 2, 300년이 흘러도 거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난 10개월이 아마 내가 한국에서 살아가면서 가장 즐거웠던 순간일 거다.”
진유성이 한국에 온지 아직 1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재미있는 기억들이 많다.
처음으로 남들과 다름없는 삶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정고의 친구들이 50살이 되고, 다시 70살이 되어도 진유성은 여전히 10대와 20대 사이의 모습이다.
그때가 되면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서 또 고등학교에 갈 수도 있겠지.
아니면 대학교 생활을 할 수도 있을 것이고.
하지만 지금처럼 즐겁지는 않을 것이었다.
중원에는 추억이 낙엽처럼 쌓인다는 말이 있다.
별로 떨어지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뒤를 돌아보면 발밑에 수북하니까.
그러나 그 낙엽이 발목을 덮고, 종아리를 덮고, 무릎을 덮었을 때.
과연 아름다울까?
너무 많은 추억은 너무나 긴 생을 사는 이에게는 괴로움을 주곤 한다.
진유성은 그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난 지금을 살아가는 것이다. 열심히.”
“…….”
“대답이 됐느냐?”
진유성의 말 속에 담긴 아득함을 느낀 상소윤은 입을 다물었다.
가볍게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이 너무나 무겁다.
또한 동시에 진유성이 불쌍하다.
상소윤은 진유성이 늙지 않고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고 했을 때, 신비하고 신기한 마음이 있었다.
내심으로는 부럽다는 생각도 있었고.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렇다.
20년이 더 흘러 대정고의 친구들이 마흔이 됐을 때, 진유성은 이들을 만날 수 없다.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상소윤과 다르게, 그들에게 늙지 않은 진유성은 이상한 존재일 것이니까.
“그, 친구들한테 살짝 말해 주면 안 되나?”
“그럼 난 그들에게 괴물 아니면 신이 되겠지.”
친구들이 진유성을 두려워하거나, 경배하는 순간 지금까지 쌓아온 추억들은 모두 물거품이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좋고 나쁨은 없으니까.
공유함과 공유하지 않음만 있으니까.
상소윤은 진유성이 생략한 말을 이해했다.
문득 상소윤은 진유성이 안타까워졌다.
100년 후의 진유성은 놀이공원에 갈 때마다 오늘의 일을 떠올릴까?
그 순간, 상소윤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서 진유성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내가 기억해 줄게. 죽기 전까지는.”
진유성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아주 오래 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 * *
그들이 숨어든 화전촌의 화전민 소녀가 물었다.
“오라버니는 왜 그렇게 힘든 거야?”
어린 아이가 보기에도 그들이 힘들고 고되 보였나 보다.
그럴 만도 하다.
이곳에 숨어들기 전까지 생존대는 단 한숨도 자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잠들 수는 없다.
눈꺼풀이 천근보다 무거웠지만, 지금의 잠은 죽음의 친구다.
그저 따뜻한 공기로 몸을 데울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진유성은 간만에 맛보는 온기에 몽롱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잊혀지고 싶지 않다. 이대로 죽음을 맞이해서 세상에서 지워지고 싶지 않다. 적어도 흔적은 남겨야겠다.”
진유성은 그렇게 말하고는 어이없어서 피식 웃었다.
아무리 잠이 와서 제정신이 아니라지만, 이제 여덟 살이나 된 것 같은 아이에게 고해성사를 하다니.
그 순간, 아이가 손을 들어서 진유성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피와 진흙이 엉겨 붙어 딱딱해진 머리카락을 만지며 소녀가 말했다.
“난 어리니까 오래 살 거야.”
“그래. 그러겠지.”
“그러니까 내가 기억해 줄게. 죽기 전까지.”
* * *
진유성이 상소윤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설마……?’
모르겠다.
화전민 소녀의 목소리와 따뜻함은 기억나는데, 막상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스라이 남아있는 형태와 상소윤의 얼굴이 비슷하냐면, 그건 아닌 것 같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상상이긴 하다.
인간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고 그 영성은 다시 온 세상의 생명체들은 윤택하게 만드는 거름이 된다.
그렇게 순환하는 것이 영성이고, 그 영성의 순환 고리의 정점에 서 있는 것이 인류일 뿐이다.
특정 객체가 죽어서 또다시 특정 객체로 환생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러니 화전민 소녀가 죽어서 환생을 해서 상소윤이 됐다는 것은 상상이 아닌, 망상이다.
설령 자신이 모르는 인간의 환생이 있다고 쳐도 이건 불가능하다.
화전민 소녀는 중원의 사람이었고, 상소윤은 지구의 사람이다.
두 세계를 건너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상실의 공간을 건너는 것뿐이다.
신주청이 영혼 상태로 상실의 공간을 건넌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신주청은 둘째와 높은 격을 섞어서 영혼을 보전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소윤의 행동과 눈빛은 그날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백 하고도 수십 년을 살아온 진유성에게 화전민 모녀와 보냈던 일주일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몸이 인과율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때의 일주일이 지금의 진유성을 만든 인(因)이다.
중원 무림에 대한 복수만을 꿈꾸며 도망치던 생존대에게 또 다른 갈망을 심어 준 것이 모녀의 죽음이었으니까.
그 슬픈 갈망이 없었다면 그들은 절대로 해남으로 도망치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 순간, 상소윤이 정신을 차렸다.
그리곤 화들짝 놀라서 손을 뗐다.
상소윤은 빨개진 얼굴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다가 손의 냄새를 킁킁 맡았다.
“머, 머리는 감았냐?”
“당연히 감았다.”
“근데 왜, 그, 안 감은 거 같지?”
“마음에 마구니가 있다. 삿된 냄새를 맡는 걸 보니.”
“뭐, 뭐라는 거야?”
진유성은 웃음을 참았다.
아마 아주 오랫동안 오늘의 놀이공원이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