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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242화 (242/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42화>

* * *

상림은 모든 관계에 연속성과 관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회사도 그러하고, 인간도 그러하다.

한 번 일을 못하는 것으로 낙인찍힌 부하 직원은 어지간해서는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기 힘들다.

실제로는 본인이 노력해서 꽤 유능해졌음에도, 그 유능함이 인정받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쁜 관성을 깨려고 노력한다던가, 좋은 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대체 이 개족보 관성은 왜 이리 끈끈하단 말인가!’

상림은 요 며칠 뭔가 잘못됐음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당장 오늘 아침만 해도 그러하다.

“유성아! 도윤이 기저귀 좀 가져다줘!”

바쁘게 아침을 차리고, 도윤이를 보고 있던 유혜연이 소리를 친다.

그러자 진유성이 상림에게 눈빛을 보낸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찌개를 떠먹으려던 상림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는 유혜연에게 기저귀를 가져다준다.

그때 아침부터 약속이 있어서 씻고 나온 상소윤이 진유성에게 화를 낸다.

“야! 너 내 고데기 고장 냈지!”

“아니다. 내가 고장 낸 것이 아니다.”

“그럼 누가 고장 냈는데!”

“상림이 마지막으로 만졌다.”

“아빠가 고장 냈어?!”

상소윤이 상림을 노려보자, 상림이 기억을 더듬는다.

분명 15분쯤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온 진유성이 자신을 부르더니 갑자기 두 손 위에 상소윤의 고데기를 올려 주었다.

“고데기는 왜 주십니까?”

“이게 어디 있던 물건이지? 제 자리에 돌려놓으려는데 어딘지 모르겠구나.”

“여기 있었지 않아요?”

상림은 별 생각 없이 화장실의 벽면 거치대 위에 고데기를 올려놓았다.

고데기에 왜 물기가 묻어 있는지 잠깐 의아해하면서.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자신이 만진 것은 맞다.

하지만 고장 낸 것은 아니다.

“소윤아, 아빠가…….”

“상림이 분명 마지막에 만졌다. 내가 봤다.”

“아니 교주님이 줬잖아요!”

“내가 만질 때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상소윤이 상림과 진유성을 쳐다보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다행히 그녀의 딸은 진유성의 수작에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영리했다.

“그러니까, 진유성이 고장 내고 아빠한테 마지막에 만지게 했다는 건가?”

“……나는 갑자기 호기심이 동했을 뿐이다. 고데기가 열기를 만들어 내는 회로의 원리가 삼매진화와 동일한 것인지에 대해.”

삼매진화(三昧眞火)란 내공을 이용해서 불을 피우는 경지로, 어지간한 고수들도 쉽사리 할 수 없는 행위였다.

무형의 기운이 유형의 현상을 일으키는 경지의 시작으로, 흔히 말하는 무형지기의 출발선이었다.

하지만 상소윤이 이런 걸 알 리가 없었다.

“그걸 왜 내 고데기로 하냐고! 아빠아!”

“응?”

“진유성 좀 어떻게 해 봐! 요즘 막 나가잖아!”

상림은 딸의 말에 적극 공감했다.

요즘 진유성은 막 나간다.

쇼파에 앉아 TV를 보면서 아이스크림은 허공섭물로 꺼내 온다.

냉동실 문이 열리더니 아이스크림이 둥둥 날아오는 걸 보면 도윤이가 좋아 죽는다.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솔직히 한 소리 하고 싶다.

하지만 이제 상림은 대외적으로 유지하던 ‘외삼촌’의 직위가 해제된 한없이 나약한 남자일 뿐이었다.

그때 상도윤의 기저귀를 새로 갈아입힌 유혜연이 거실로 나온다.

“당신, 밥 안 먹어? 출근해야죠.”

“어, 먹어야지.”

시계를 본 상림이 후다닥 식탁에 앉았다.

그렇게 아침식사가 시작되었다.

상림은 밥을 먹으며 유혜연, 진유성, 상소윤의 대화를 들었다.

세 사람의 관계는 DDP 게이트 이전과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가끔 유혜연이 장난을 치며 진유성을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것 말고는 말이었다.

그때마다 상소윤이 기겁을 하는데, 유혜연은 아무래도 상소윤의 그런 모습을 즐기는 듯했다.

사실 이러한 관계는 유혜연의 노력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진유성이 긴 잠에서 깨어난 날.

유혜연과 상소윤은 진유성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고, 진유성은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었다.

그가 중원에서 어떠한 삶을 살았고, 어떠한 마음으로 게이트에 넘어왔는지.

한국에서 지금까지 어떤 일이 있었고, DDP 게이트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유혜연과 상소윤의 입장에서는 믿기 힘들고, 신비한 이야기일 것이었다.

그리고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진유성에게 거리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

유헤연과 상소윤이 평범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멸마대에서부터 동고동락하며 중원일통을 꿈꿨던 수하들 중에서도 이런 이들이 있다.

처음에는 진유성과 친했지만, 중원을 제패하는 과정에서 점점 거리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았다.

부정적인 거리감은 아니다.

존경, 경외, 신격화…….

하지만 어떤 감정이 됐든 이렇게 되면 개인적인 관계는 끝나는 것이다.

더는 진유성과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진유성은 어쩌면 유혜연과 상소윤도 이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혜연의 반응은 진유성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모든 이야기를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난 유혜연이 갑자기 진유성을 안아 준 것이었다.

“고생했어. 우리 유성이.”

유혜연의 행동은 앞으로도 그들이 외숙모와 외조카라는 관계를 지속하겠다는 의지였다.

진유성은 한국에 온 지 얼마 안됐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유성아.”

“너무 늦게 온 거 아니니? 외숙모가 내내 걱정했잖아.”

“어렵거나 힘든 거 있으면 외숙모한테 얘기하고. 알겠지?”

그때도 그를 꼭 안아 주던 유혜연의 체온에서 잔잔한 울림을 받았었다.

진유성은 고개만 끄덕였고, 옆에 있던 상소윤이 말을 보탰다.

“완전 고생했어. 진유성.”

그렇게 세 사람은 원래의 관계로 돌아왔다.

깨질 수도 있었던 관계의 관성을 이어 가게 된 것이었다.

문제는, 유일하게 관계가 바뀐 상림이었다.

아내의 조카와 딸의 친구가 보스인 이상한 인생을 살게 되었다.

“하아…….”

상림이 계란말이를 먹다 말고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자, 진유성이 타박한다.

“밥상머리에서 한숨 쉬지 마라. 열심히 만든 사람은 뭐가 되냐?”

“그래, 아빠. 너무해.”

“지금 맛이 없어서 그러는 거예요?”

상림은 고개를 떨궜다.

* * *

워싱턴 D.C에 위치했던 SG 세계본부에 가해진 테러는 SG의 위상을 더욱 낮게 만들었다.

안 그래도 각성 독립 국가들이 늘어나며 SG의 영향력이 꺾이고 있는 추세였다.

테러는 사실상 SG의 시대가 끝났음을 고하는 것이었다.

SG 세계본부장이 사망한 것이 가장 치명적인 일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미국은 자체적으로 운영하던 CIA-PP를 대폭 강화시켰다.

CIA-Player Personal.

이는 국가정보기관 CIA 최고의 요원들로 구성된 각성자 대상의 정보기관이었다.

각성자 개개인의 인적 사항을 파악하고, 각성 세계의 변화에 대한 긴밀한 정보망을 구성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

당연히 현 시점에서 그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대상은 언노운 엠페러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는 CIA-PP에서 언노운 엠페러를 추적할 단서가 없었다.

한국의 고위 각성자 집단인 우산도는 지나치게 끈끈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다.

섣불리 정보를 캐내려고 시도하다가는 역풍을 맞기 좋다.

그러나 DDP 게이트에서 언노운 엠페러의 얼굴을 본 이들만 300명이 넘는다.

더군다나 그들은 각성을 하지 않았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CIA-PP에서 충분히 접촉해 볼 만한 인물들이었다.

그렇게 몇 주간 공을 들인 결과 CIA-PP는 언노운 엠페러의 외모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겠다는 한국인들을 제법 섭외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대가는 큰돈이었고.

“하지만 이상하군. KSG가 너무 조용해.”

“이 정도 정보는 내어준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기엔 언노운 엠페러에 대한 정보 차단이 너무 견고하던데…….”

그런 대화를 나누던 한국에 파견된 CIA-PP의 요원 둘이 호텔방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초조하게 방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 이거 불법은 아니죠?”

“위법이지만 불법은 아닙니다. 국가의 정보전이나 언제나 발생하는 것이고, 외교적인 트러블은 있을지언정 정보 제공자에 대한 법적 제재는 가할 수 없습니다.”

백인 남자에게서 청산유수로 쏟아지는 한국어는 여성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그럼, 빨리 해요.”

“여기 앉으시죠.”

여자가 의자에 앉자 요원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요원은 정신계 각성자였고, 지금부터 Imagine Montage 스킬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이매진 몽타주는 대상이 목격했던 이의 몽타쥬를 최대한 정밀하게 추출하는 스킬이었다.

“마음을 편히 먹고, DDP 게이트에서 봤던 남자의 얼굴을 명확히 떠올려 주십시오.”

“네.”

“외모의 특정 부분에 집중하기보다는 전체적인 상을 떠올리는 게 더 도움이 될 겁니다.”

“알았어요.”

“시작하겠습니다.”

요원이 손을 뻗어 30대 여성의 손을 붙잡았다.

신체가 접촉한 순간, 스킬이 발동되었다.

이제 요원의 머릿속으로 여자의 기억이 이미지화될 것이었다.

이매진 몽타쥬 스킬의 문제는 스킬술사가 얻어 낸 몽타쥬를 외부로 출력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몸에 프린트가 있는 것도 아니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스킬술사가 얼굴을 직접 손으로 그리는 수밖에 없었기에, 그렇게 효용도가 높은 스킬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신계 각성자인 요원은 인간의 얼굴을 정밀 묘사하는 훈련을 받았다.

그가 머릿속으로 받아들인 얼굴을 95% 흡사하게 그려낼 수 있다.

사각, 사각.

미술용 연필이 종이 위를 스쳐 지나가는 소리가 쉬지 않고 울려 퍼졌다.

스킬을 유지해 머릿속의 이미지를 보관한 채로 그림을 그려나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들은 CIA-PP였다.

이 방면의 프로페셔널.

약 30분이 흘렀을 때, 요원은 언노운 엠페러의 얼굴을 완벽하게 그려 냈다.

정신 집중에 방해될까 싶어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요원들이 다가온다.

그들은 그림을 보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뭡니까?”

“뭐가요?”

심상을 공유했던 30대 여성이 반문했다.

시키는 대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건……. 당신이잖습니까. 머리만 짧아진.”

“네?”

여성이 요원이 내민 그림을 받았다.

그림 속에는 정말로 자신이 있었다.

머리도 짧고, 이목구비도 강해져서 얼핏 남자처럼 보이지만, 분명 자신이다.

쌍둥이인 남자 형제가 있었다면 이런 얼굴이지 않을까?

“이, 이게 뭐죠?”

“저희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이게 뭡니까?”

“저는 분명 그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단 말이에요!”

요원들의 얼굴에 난감한 표정이 피어올랐다.

아무래도 언노운 엠페러가 손을 쓴 것 같다.

강한 정신 암시를 걸어놓아서 몽타쥬를 추출할 수 없게 만든 것 같다.

그러나 그림을 그려 냈던 요원이 고개를 저었다.

“대상에게 상위의 정신계 스킬이 걸려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저항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럼 이건 뭐지?”

“일단…… 다른 팀의 결과를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정말 이런 얼굴일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며칠 뒤.

CIA-PP요원들은 모든 정보원들이 비슷한 결과를 도출해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매진 몽타쥬 스킬로 추출된 모든 얼굴은 정보 제공 대상의 것이었다.

소름이 돋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타트바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그들로서는 끝까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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