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40화>
* * *
집으로 돌아온 진유성은 삼 일 동안 잠을 잤다.
자다 깨서 음식을 섭취하거나, 생리 현상을 해결하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잠만 잤다.
“저렇게 놔둬도 돼요?”
유혜연은 그런 진유성을 걱정하며 물었지만, 상림도 답을 알지 못했다.
진유성이 신체 반응 현상을 초월했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직접 말한 바에 따르면 교주님은 잠을 자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다만 중원에서는 심심할 때마다 잠을 잤고, 뇌가 수면이란 행위에 익숙해져서 너무 오래 잠을 안 자면 컨디션이 하락할 뿐이라고.
생리 현상 역시 마찬가지다.
진유성은 노화순청의 경지를 초월했다.
노화순청(爐火純靑).
화로의 불이 푸른색으로 변한다.
이는 지극함이 다해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음을 뜻한다.
노화순청의 경지에 이르면 화기와 탁기가 쌓이지 않는 신체가 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반박귀진의 경지에 이르고, 거기서 더 나아가면 환골탈태의 경지에 이른다.
중원 역사상 환골탈태를 경험한 이는 손에 꼽는데, 진유성은 환골탈태를 두 번이나 경험했다고 했다.
환골탈태의 다음 경지가 전설처럼 여겨지던 반로환동이다.
반로환동(返老還童)이란 늙은 모습에서 아이로 돌아간다는 뜻인데, 실제로 아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무공을 발현하기 가장 좋은 신체의 상태를 꾸준히 유지함을 뜻했다.
사실 상림은 중원에 있을 때 반로환동이 그저 전설인 줄 알았다.
환골탈태는 경험한 이들이 있지만, 반로환동은 구전될 뿐이니까.
그러나 진유성은 반로환동을 경험했다.
상림이 중원을 떠날 때만 해도 진유성은 30대 초반의 모습이었는데, 재회했을 때는 훨씬 어려져 있었으니까.
이처럼 진유성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신체를 가지고 있었고, 3일 정도는 뭔가를 먹을 필요도, 생리 현상을 해결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걱정이 된다.
잠을 잘 필요가 없는 몸임에도 저렇게 자고 있다는 것은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게 아닐까.
게다가…….
‘저 엄청난 기운은 뭐지?’
상림도 무공의 고수였기 때문에 진유성이 쥐고 있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재 진유성은 엄청난 기운을 쥐고 있다.
쥔다는 표현이 어색하지만, 이보다 적절한 표현은 없다.
쥔 것과 품은 것은 다르다.
단전에 갈무리해 체화한 게 아니라, 그저 움켜쥐고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진유성이 잠든 이유가 어마어마한 기운을 소화시키기 위함일 수도 있었다.
“일단 내버려 두는 게 나을 것 같아.”
“하지만 아무 것도 먹지도 않았는데…….”
“괜찮아. 교주, 아니 유성이…….”
호칭에 대해 고민하던 상림이 대충 얼버무리고는 말을 이었다.
“저 사람은 한 달 정도는 아무 것도 안 먹어도 사는 데 지장 없으니까.”
상림은 까슬까슬 올라오기 시작한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어색함을 느꼈다.
상소윤이 게이트로 끌려갔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유혜연을 대신해 게이트에 들어간 상소윤이 주검으로 돌아온다는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상림과 유혜연은 결코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었다.
그러니 그때의 상림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진유성뿐이었다.
그래서 소리 높여 구원을 갈망했고, 진유성은 그 갈망에 대답해 주었다.
“나의 품에서 생을 갈망한 이들 중에는 죽음을 맞이한 이가 없다.”
하지만 모든 상황이 끝난 지금.
되게 어색하다.
유혜연 앞에서 교주님이라는 호칭을 쓰려니 어색하고, 평소처럼 유성이라고 부르려니 또 어색하다.
본래는 DDP 게이트 사태 이후 이야기를 나눴어야 하지만, 진유성이 돌아오질 않아서 모든 이야기를 뒤로 미뤄 놓고 있었다.
그런 남편의 어색함을 보고 있던 유혜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유성이는 조카가 아니죠?”
“미안해. 거짓말을 해서…….”
“조카가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어요.”
“어? 진짜? 어떻게?”
“아니, 상식적으로 그런 거짓말을 누가 믿어요?”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된 상림은 충격을 받았다.
분명 완벽한 스토리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상림은 충격 뒤로 의아함을 느꼈다.
“그럼 왜 같이 살게 해 준 거야? 조카가 아니라는 걸 알았는데?”
“당신한테 의미가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건 알 수 있었거든요.”
“혜연아…….”
상림은 유혜연의 말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조카라서 품어 준 것보다 더욱 감동적이다.
역시 유혜연이 최고다.
세상에 이런 여자는 다시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말해 봐요. 당신과 유성이 사이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유혜연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상림이 입을 열었다.
“소윤이는 자고 있나?”
“자고 있어요. 어젯밤에 유성이 방에 늦게까지 있던 것 같은데.”
“밤늦게까지?”
상림이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더는 말하지 않았다.
진유성이 딸의 목숨을 구하지 않았던가.
당연히 상소윤 입장에서는 진유성이 한동안 사라지고, 잠에 빠져있는 게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었다.
“이야기는 소윤이가 일어나면 할게. 어차피 다 같이 들어야 할 것 같으니까.”
“그럼 그래요. 점심 맞춰서 깨우려고 했으니까.”
그때 상도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기저귀를 갈아 줄 때가 됐나보다.
“내가 갈게.”
상림이 후다닥 일어나서 아들에게 향하고, 유혜연은 잠깐 쉬다가 요리를 시작했다.
잠시 뒤, 음식 냄새를 맡았는지 상소윤이 부스스한 머리로 방에서 나왔다.
그렇게 세 사람은 아침 겸 점심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점심을 다 먹고 후식으로 커피를 마실 때, 상림이 운을 뗐다.
“이거 참,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네.”
상림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결국은 있는 그대로 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만 해도 세상에 게이트나 각성자가 없었다.
당연히 상림이 겪은 초현실적인 이야기에 공감해 줄 포인트도 전무했고.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전 세계의 각성자들은 매일 TV에 나오고, 라디오에서도 초현실적인 이야기를 듣는 게 어렵지 않다.
물론 이제 게이트와 각성자가 삶의 일부가 되어서 초현실의 영역이 아니지만, 그래도 처음 한국에 왔을 때보다는 상황이 낫다.
상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어. 그러다가 게이트를 타고 한국으로 건너왔지.”
“아빠……. 몬스터였어?”
“…….”
상림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처음 중원에서의 이야기부터 해야 할 것 같다.
* * *
진유성은 꿈을 꾸었다.
꿈속의 그는 8살 남짓한 고려의 꼬마 왕자였다.
본래 이 시기에 진유성은 무공을 배우지 않았었다.
한데, 꿈속에서의 그는 경천동지할 무공을 알고 있었다.
‘꿈이군.’
진유성은 이것이 꿈이라는 걸 곧장 자각했다.
마음 수양의 경지가 깊은 진유성은 꿈과 현실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었고, 꿈속에서도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유성은 꿈을 꾸는 걸 좋아했다.
중원에서는 모든 1세대 수하들이 죽은 이후에 잠을 굉장히 많이 잤다.
잠을 자면 그들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어마마마와 아바마마도 볼 수 있고, 큰 형님이 통치하는 고려도 볼 수 있고, 상림과 신주청도 볼 수 있고, 주혜미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잠을 많이 잤다.
이번의 꿈도 마찬가지였다.
고려의 궁에는 많은 그리운 사람들이 있었다.
심지어 상림도 있었다.
내시가 된 상림이 비단으로 민둥머리의 땀을 닦자, 옆에서 궁녀의 모습인 유혜연이 비단 손수건을 건넨다.
수라간에는 상소윤 나인이 있고, 상소윤을 훔쳐보는 병졸이 지종수다.
꿈이란 걸 명확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더 재밌었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온 세상이 어두워지더니 검은색 벼락이 줄기줄기 내리쳤다.
꽈광 하는 소리와 함께 궁이 박살나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간다.
8살의 진유성은 병졸의 검을 빼앗아서 벼락을 베었지만, 벼락은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벼락 속에서 첫째의 형태가 드러났다.
[죽어라!]
첫째가 내리는 벼락에 백성들이 고통받고 신음한다.
한데, 그들의 복식이 고려의 것이 아니다.
중원의 것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진유성은 30대의 모습이었고, 주변 배경은 자금성으로 바뀌어 있었다.
진유성은 벼락을 베고 또 베었다.
하지만 수가 너무 많았다.
그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는 천신궁의 뒤뜰로 향했다.
거기에는 여전히 푸른색으로 일렁이는 게이트가 있었다.
진유성은 검을 꼬나 쥔 채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공간이 바뀌더니 상실의 공간을 지키는 위상의 수호자가 나타났다.
진유성은 위상의 수호자와 달포가 넘도록 싸웠고, 결국은 이겨냈다.
그리곤 무의 9할을 포기하는 대신 ‘--’의 9할을 선택했다.
[통과하라.]
[그대는 자신을 온전히 보존한 최초의 통과자이다.]
진유성은 위상의 수호자와의 싸움을 회상할 때마다 뭔가 대화를 더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상림에게 이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뭐, 놈이랑 했던 대화 사이사이에 내용이 더 있었던 거 같긴 한데 자세한 기억은 안 나는군.”
그런데 지금.
위상의 수호자가 뭔가를 더 말하기 시작했다.
[그대가 품은 삼라만상(參羅萬像)은 너무나 거대하고 깊어 나조차 뚫어 볼 수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언젠간 그대의 앞에 전지와 전능을 동시에 품은 존재가 나타날 것이라는 점이다.]
[그대는 잊지 말아라. 무의 9할을 포기하고 ‘--’의 9할을 지킨 그대의 마음을.]
[그 마음에 답이 있을 것이니.]
[그대는 신성을 잃었지만, 신성은 잃는 것이 아니니.]
진유성의 기억 속에 아스라이 남아있던 이야기.
이것은 꿈이되, 꿈이 아니다.
진유성은 문득 위상의 수호자가 보내는 눈빛이 따뜻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윽고, 진유성이 기억하고 있던 마지막 말이 들려왔다.
[그럼, 그대가 문을 닫을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
진유성은 그렇게 상실의 공간을 빠져나왔다.
본래 상실의 공간을 나온 진유성은 서울역 앞에서 미세먼지에 기침을 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고오오오오-
진유성의 눈앞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발하는 이것은, 그의 인생을 가장 극적으로 바꿔 놓은 것이었다.
해남의 이름 모를 섬에 숨겨져 있던 입멸공의 진법.
좀 더 정확히는 전능의 존재가 남기고간 전능의 9할.
“오랜만이군.”
진유성은 진법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2년 동안 진법 안에서 수련을 했다.
이는 원래의 역사와 똑같았다.
진유성은 이 안에서 입멸공을 얻었고, 중원으로 나와서 신화를 썼다.
하지만 그 순간.
‘내가…… 입멸공을 얻었던가?’
문득 진유성은 의아함을 느꼈다.
진유성은 언제나 입멸공을 스스로 빚어 낸 힘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정녕 전능의 존재가 남긴 힘이었다면, 어찌하여 자신은 빚어냈다는 표현을 썼단 말인가.
그 순간, 진유성은 깨달았다.
자신은 입멸공을 계승하지 않았다.
입멸공을 익히고, 배웠지만, 그가 빚어 낸 힘은 스스로의 신성이었다.
[그대는 신성을 잃었지만, 신성은 잃는 것이 아니니.]
위상의 수호자가 말했던 신성이 이것이었다.
그렇다면 중원의 짭유성이 품고 있는 9할은 단순한 무공이 아니다.
진유성이 빚어 낸 신성인 셈이었다.
진유성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첫째를 소멸시켰다.
그리고는 첫째가 품고 있던 막대한 영성을 흡수했다.
록펠러를 죽였을 때 흡수한 영성과는 차원이 다른 어마어마한 양이었고, 심지어 다 흡수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유성은 그 모든 영성을 쥐었다.
이것이 마도사에게 전달되면 안 되니까.
그 엄청난 영성이 진유성의 오성과 기억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진유성의 들숨과 날숨에 엄청난 기운이 휘몰아친다.
진유성이 완성시켰다고 생각한 소우주의 그릇이 점차 커지더니, 첫째가 수백 년간 모아온 영성을 흡수한다.
시간을 잊고, 존재를 잊는다.
이윽고 진유성이 눈을 떴을 때.
“어, 엄마! 엄마! 진유성 일어났어!”
“말만 한 계집아이가 방정맞구나.”
그는 첫째가 품었던 모든 영성을 흡수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