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37화>
일렁이는 벽면을 배경 삼아 진유성과 첫째가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들의 몸은 단 1mm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석상처럼 멈춰 선 채로 노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대치 상태인 것은 아니었다.
행동은 없지만, 행동보다 흉포한 심동들이 서로의 육신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진유성의 검이 첫째의 심장을 찌른다.
첫째가 진유성의 손목을 잘라낸다.
손목이 잘리지 않기 위해 직선의 운동이 곡선으로 변화한다.
운동 에너지를 차단하기 위해서 첫째가 곡선 운동의 맥을 끊는다.
그 순간 표홀한 심검이 첫째의 심맥을 두드린다.
첫째의 온몸에서 새까만 영기가 피어오르며 심검의 기운을 차단한다.
이 모든 것은 두 사람의 상상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둘은 심즉행의 경지를 이룩했기 때문에 단지 상상이라고 볼 수 없었다.
심동의 영역에서 패배하는 이는 행동의 영역에서도 패배하니까.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심동의 싸움에서 우위를 거둔 것은 진유성이었다.
핏-
작은 파공음과 함께 첫째의 오른손이 잘려 나갔다.
“……대단하군.”
의자에 앉아 있던 첫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감탄했다.
하지만 진유성의 표정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심상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했지만 유효타를 먹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록펠러와 로스차일드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마도사들은 인간의 육신을 뒤집어쓰고 있다.
이들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는 악의의 영기를 뚫고 심검으로 타격을 가해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첫째가 바라보는 것만으로 잘려 나갔던 손이 재생되었다.
“네가 마도사들의 첫째냐?”
“그러하다.”
“셋 중 젤 낫네?”
“그대가 보기엔 그러한가? 둘째와 셋째보다 내가 압도적인가?”
“어. 차이가 좀 많이 난다.”
진유성의 말은 사실이었다.
셋째 록펠러는 상실의 공간을 복사한 신성의 공간으로 진유성을 압박했었지만, 지닌 바 역량은 진유성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신성의 공간의 특수성이 아니었다면 진유성은 손쉽게 록펠러를 소멸시켰을 것이었다.
둘째 로스차일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주청이 합세한 것만 아니었다면, 로스차일드는 멕시코에서 소멸했다.
하지만 첫째는 오롯이 홀로 진유성에 대적할 힘이 있었다.
물론 끝까지 간다면 자신이 이기겠지만, 쉬운 싸움이 아닐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잠시의 소강상태에서 첫째가 손을 휘둘렀다.
진유성을 공격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첫째의 손짓에 벽면의 일렁거림이 사라졌다.
공간을 안정화시킨 것이었다.
“그대가 무르다고 생각했는데, 무른 게 아니었군.”
“오경태를 죽이지 않은 것 말이냐?”
“그렇다. 그대는 단말을 이용해서 나를 추적했군.”
첫째의 추측은 정확했다.
진유성은 오경태에 대한 연민을 품고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오경태를 살려 둔 것은 아니었다.
게이트가 붕괴하는 시점에는 모든 기운이 혼탁해질 수밖에 없다.
그 시점에 오경태를 통해 마도사를 역추적하기 위해서였다.
진유성이 어깨를 으쓱했다.
“난 언제나 범인의 상상을 뛰어넘는 편이지.”
“나를 두고 범인(凡人 : 평범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니. 아주 신선하군.”
“생각해보니 범인(犯人 : 범죄인)도 되겠는데?”
두 사람은 통일된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유성은 중원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첫째는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통이 되는 것은, 두 사람의 심상과 의념으로 초수를 교환한 이후였기 때문이었다.
심상 해석 능력이 극에 달한 두 절대자들에게 언어는 장벽이 되지 않았다.
첫째는 진유성을 쳐다보다가 이내 사무치는 호기심을 느꼈다.
그리고는 퍼뜩 놀랐다.
호기심이란 단어가 주는 약동하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는 수백 년이 넘도록 존재했지만,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구의 진유성을 만나는 순간 메마른 감정이 피어났다.
눈앞의 남자는 정말이지 특별한 존재이다.
결국 첫째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진유성. 그대가 상실의 공간에서 보존한 것은 무엇인가?”
첫째의 질문을 받은 진유성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동안 비슷한 질문을 몇 번이나 받아 봤다.
그리고 그때마다 모두가 상실의 공간에서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하지만 마도사들의 첫째는 보존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고 있었다.
진유성은 언제나 작은 단서로 정답에 접근하는 이였다.
“네 놈, 짭유성과 한패로군.”
첫째는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하지만 중원 진유성의 존재를 반드시 숨겨 줄 필요도 없었다.
첫째가 원하는 것은 두 진유성이 양패구상하는 일이었다.
두 사람이 싸우다 소멸해도 좋고, 한 사람이 간신히 살아남아도 좋다.
그렇게 되면 헐떡이는 승자의 목을 자신이 베어 버릴 것이니.
중원의 진유성은 무의 9할을 품고 있고, 지구의 진유성은 1할을 품고 있다.
그러니 지구의 진유성에게 조금 더 힌트를 줘도 될 것이었다.
“짭유성이라……. 중원의 진유성이 들었으면 입멸검을 휘둘렀겠군.”
“뭐, 그럴지도. 아무튼 놈은 중원을 잘 경영하고 있냐? 날 닮았으면 당연히 잘하고 있겠지만.”
“……이해할 수 없군. 지금 그게 궁금하단 말인가?”
“그럼 뭘 궁금해야 하는데?”
“그대는 중원의 진유성에게 받았던 공격을 잊어버렸는가?”
“아니, 잊지 않았다. 네 놈들이 멀더의 단면을 훔쳐온 것도 잊지 않고 있다.”
“한데 어찌하여 중원의 백성들에 대해서 묻는단 말인가?”
첫째의 반문에 진유성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중원의 백성은 수없이 많고, 난 고작해야 한 명일 뿐이니까.”
“……!”
“수만, 수억의 삶이 분노보다 우선시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멍청한 놈아.”
“……그렇군. 그대는 중원의 진유성과 완전히 다른 존재이군.”
첫째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 혼탁한 무언가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차원을 멸망시키고, 그 잔영을 게이트의 재료로 사용한다. 하지만 차원을 멸망시켰다는 건, 차원의 모든 구성원을 죽인다는 건 아니다.”
하나의 차원에는 수억, 수십억의 생명체가 살아가고 있다.
그 모든 것을 죽여야만 ‘멸망’이란 단어를 붙일 수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 길고 지난한 일이다.
“차원이 멸망했다는 건, 차원이 닫혔다는 것이다. 더 이상 인류의 역량이 성장하지 않으며, 우주의 순환의 에너지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당연한 수순으로 찾아올 사멸을 기다리며.”
첫째의 손아귀에서 소용돌이치던 혼탁한 에너지가 수백, 수천 개의 영상을 만들어 냈다.
거기에는 고통 받고 신음하는 자들이 있었다.
진유성은 그들이 누군지 알진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저곳이 어디이며, 어느 나라의 사람인지는 알 수 있었다.
저들 모두는 그가 나고 자란 행성에 살고 있는, 대명제국의 사람들이었다.
복식과 배경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대가 염려하는 이들은 죽진 않았으나, 죽음과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다. 이미 그대가 나고 자란 차원은 닫혔으니까.”
진유성이 주먹을 꽉 쥐었다.
멀더가 보스 몬스터로 출현했을 때,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멀더란 인간의 단면을 베어 내 보스 몬스터로 만들었다는 건, 그가 나고 자란 세상이 마도사들의 손아귀에 떨어졌다는 것이니까.
아니길 바랐었지만,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원에 남은 나는 그 일에 동조한 거냐?”
“그러하다.”
“빌어먹을 놈이로군.”
“하지만 단언컨대, 중원의 진유성은 그대보다 강하다.”
“내 앞에서 강함을 두고 떠들던 놈들은 수만 명이 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내 앞에 무릎 꿇었다.”
진유성의 온몸에서 심유한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싸움의 시작은 DDP였지만, 결착지는 이곳이었다.
진유성이 그렇게 정했으니까.
진유성의 온몸에서 뿜어지는 기운에 맞춰서 첫째의 몸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인간의 육신을 뒤집어쓴 채 진유성을 상대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백인 남성이 풀썩 쓰러지고, 주변을 넘실거리던 새까만 영기가 형상을 갖췄다.
[고향을 잃고, 지구를 떠도는 가련한 절대자여. 내 이름을 알고 있는가?]
[우리의 성은 룬어의 ‘LR’이지만, 룬마법을 영창할 수 없는 이들은 발음할 수 없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들리는 대로 우리의 이름을 표기하기 시작했다.]
록펠러는 표기상 ‘Rockefeller’지만, 실제는 ‘LRockefeller’였다.
로스차일드 역시 마찬가지이다.
Rothschild가 아닌, LRothschild.
[역사서는 내 이름을 담지 않으나, 그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대명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풀풀 풍기는 악의의 영기 속에서 첫째가 말했다.
[LRord. 이곳의 발음으로는…….]
LORD.
신.
[이미 난 신성을 완성한 존재이다.]
그 순간, 진유성과 첫째가 서있던 건물 최상층의 외벽이 투명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밖에서는 여전히 평범한 건물처럼 보이겠지만,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다.
진유성은 언젠간 교과서에서 봤었던 풍경을 목격했다.
우측에는 백악관이 있고, 좌측에는 미국 의회 의사당이 있는, 워싱턴 D.C의 다운타운 부근.
즉, 그들이 서 있는 곳은 SG의 세계 본부였다.
SG 세계 본부의 최상층.
이곳은 본부장의 집무실이었다.
[난 인간을 구원하는 신이자, 게이트를 만든 장본인이며, 게이트로부터 인류를 지키는 본부장이다.]
[이보다 더한 희극이 어디 있으며, 이보다 더한 비극이 어디 있단 말이냐!]
첫째의 선언과 함께 날아든 기파가 진유성의 몸을 뒤흔들었다.
강했다.
육신을 벗어던진 첫째는 진유성이 가늠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넘실거리는 악의의 영기가 유형화된 힘을 가지며 건물 내벽을 가루로 만들었다.
동시에 쿠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건물이 흔들린다.
SG 본부에서 일하고 있던 이들이 깜짝 놀라며 밖으로 대피하는 게 느껴진다.
[그러니, 길을 잃은 가련한 절대자여. 난 그대와의 결착을 바라지 않는다. 그대를 위한 무대의 커튼은 아직 올라가지 않았다.]
첫째의 말은 타협안이었다.
첫째와 진유성이 결판을 낸다면 둘 중 한 명은 반드시 죽는다.
놀랍게도 진유성은 첫째와 싸운다면 확실히 이긴다고 장담할 수가 없었다.
가능성은 반반.
진유성에게 자신의 모든 힘을 공개한 첫째가 천천히 존재감을 없애기 시작했다.
이곳을 떠나려는 것이다.
그는 진유성과 싸울 이유가 없었고, 진유성과의 싸움은 부담스러웠다.
아마 진유성 역시 부담을 느끼고 있을 것이고.
하지만…….
이는 진유성을 너무 모르는 행동이었다.
첫째가 공간을 이동하려는 순간, 진유성의 입멸검이 가능성을 베어 냈다.
팡!
공기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형체를 잃어 가던 영기가 다시 새까매진다.
[기어코 싸우겠다는 말인가?]
“이미 말했지. 시작은 네가 했어도, 끝은 내가 낸다고.”
[우린 싸울 이유가 없다.]
“네놈들은 하나 같이 거창한 계획이 있는 척하지만, 결국 두려운 것이다. 수백 년간 평화에 찌들어 있었을 뿐이니.”
[오만하도다!]
진유성이 검을 코앞에 세우더니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곤 선언했다.
“네가 정녕 신이라면, 이 힘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 주겠다.”
신살(神殺).
그렇게 워싱턴 D.C의 위성 지도를 바꿔 버릴 싸움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