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36화>
진유성을 제외한 사람들은 허공을 수놓는 최종오의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들과 진유성 간에는 하늘과 땅보다 먼 수준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무언가가 있다’라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은 굳이 보지 않더라도 하늘에 태양이 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태양을 본 경험 때문이 아니다.
경험이 없더라도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태양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태양은 무시하기엔 너무나 거대한 힘을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
진유성의 최종오의 역시 그러했다.
육안으로 볼 순 없지만, 무언가가 존재하며, 무슨 일인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이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사이, 진유성의 눈에는 게이트 내의 모든 공간이 바둑판처럼 나눠지기 시작했다.
조각 난 공간들이 진유성의 심장 고동에 맞춰 약동한다.
그동안 진유성은 입멸공의 최종오의를 생, 사, 입, 멸 네 가지의 힘으로 나누어 사용했다.
생은 삶의 인과율이고, 사는 죽음의 인과율이다.
입은 존재함의 인과율이고 멸은 사라짐의 인과율이다.
하지만 이 순간.
진유성은 새로운 최종오의 연(緣)을 만들어 냈다.
연은 잇닿은 것들에 간섭하는 힘이다.
어떻게 보면 인과율의 법칙 그 자체인 셈이다.
인과율은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것인데, 연은 잇닿은 무언가에 원인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 죽어!]
새로운 깨달음을 만끽하는 찰나의 시간 뒤로, 오경태의 심상이 뿜어졌다.
고도의 집중력 덕분에 정지한 것처럼 보이던 오경태의 공격이 다시 뻗어져 나갔다.
진유성이 입멸검을 휘둘렀다.
바둑판처럼 나눠진 공간 중에는 오경태가 서 있는 곳도 있었다.
진유성은 그 공간을 구부리는 것만으로 엄청난 일을 행할 수 있었다.
오경태가 내지른 공격이 그대로 되돌아오며 오경태를 공격한 것이었다.
터터터터텅!
쇠북을 두드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예상치도 못한 반격에 큰 충격을 입었는지 오경태가 비틀거렸다.
그 순간, 진유성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정말 이 같은 일을 겪는 게 처음일까?’
진유성은 천재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불가해한 재능을 타고난 존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유성이 무에서 유를 단숨에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무공이란 분야를 배우고, 그 분야를 확장시켰다.
검기니, 검강이니 떠들어 대는 무인들을 심동으로 농락했으며, 상승 무공이니 보급 무공이니 떠들어 대던 이들 앞에서 삼적보로 소림의 백보신권을 파훼했다.
그 뒤로 삼적보는 삼적천능보가 되었고.
하지만 이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존재한 무공의 한계를 깬 것이었다.
그러나 최종오의 연은 다르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최종오의란 이름으로 묶고는 있지만 생, 사, 입, 멸은 모두 다른 힘이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법칙이며, 그것을 사용하는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진유성이 아무리 굉장한 재능을 가지고 있더라도, 새로운 최종오의를 단숨에 구현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했고, 실제로 이루어 냈음에도 말이었다.
게다가 진유성은 묘한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과거의 자신이 최종오의를 만들어 본 적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내가 상실의 공간에서 잃은 것은 무의 9할이 아니었나?’
진유성에게 힘의 총량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10할을 모두 잃었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약해진 게 문제가 아니라, 진유성이란 사람이 가진 연속성이 없어진 것이니.
하지만 진유성은 분명 자신을 온전히 보전한 통과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독히 밀려오는 이 기시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던 진유성이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문제긴 하나, 추후에 생각해 볼 문제였다.
지금의 상황에 집중해야 했다.
더군다나 그의 옆에는 상소윤도 있지 않은가.
진유성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상소윤, 집에 돌아갈 시간이다.”
“어? 지금?”
“그래. 지금.”
“저 남자는 어떻게 하고?”
“글쎄. 그에게 달렸지. 끝까지 저 힘을 붙들고 있다면 죽을 것이고, 새로운 의지를 품는다면 살 것이다.”
상소윤은 진유성의 말을 들으며 낯섦을 느꼈다.
그가 아는 진유성은 매번 자신이 사 온 아이스크림을 훔쳐 먹으며, 재미없는 영화 대사나 따라하는 이였다.
지종수를 괴롭히는 걸 좋아하고, 은근히 남들의 시선을 받는 걸 좋아하며, 이상한 주관이 뚜렷한.
그러면서도 징징거리면 해 달라는 걸 대부분 해 주는.
그런 친구, 아니 남자였다.
한데 지금 게이트를 굽어 살피는 진유성의 모습은 빈말이라도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툭툭 내뱉는 말투는 똑같으나, 그 내용도 예사롭지 않았다.
상소윤은 이런 걸 물어볼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궁금함에 참지 못했다.
“이게 원래의…… 진유성인가?”
그때 상소윤을 쳐다보던 진유성이 빙긋 웃었다.
“소윤아.”
지금껏 진유성이 자신의 이름에서 성을 떼고 부른 적이 있었던가?
상소윤은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대답했다.
“어, 응?”
“나는 네가 철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는다.”
“…….”
“한데, 너는 철이 없는 사람임과 동시에 보육원에 꾸준히 봉사 활동을 가는 사람이며, 용돈의 일부를 후원하는 사람이다.”
“그건 그냥…….”
“그냥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구체적인 의도가 없는 네 모습이니까.”
진유성이 말을 이었다.
“나는 네가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너는 얼마 전에 꿈을 위해서 열심히 책상 앞에서 인내했었다.”
쇼핑몰을 열기 위해 등수를 올리던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진유성이 말했다.
“그 모든 것이 너이듯, 네가 본 모든 것도 나다. 내 삶은 남들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렇다고 네가 본 진유성이 거짓인 것은 아니다.”
진유성이 오른손을 내밀어 상소윤의 손을 잡았다.
지금부터 게이트를 부숴 버릴 것이니 신체가 접촉한 상태인 것이 좋다.
신체가 접촉해 있으면, 상소윤의 몸에 외부의 기운이 침입한다고 해도 곧장 걷어 낼 수 있다.
상소윤이 왠지 부끄러운 표정을 짓다가 변명처럼 말했다.
“좀 부끄럽다. 우리 이야기를 남들이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걱정 마라. 저들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다.”
“응?”
“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할 수 있다.”
상소윤은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어느새 진유성의 시선이 게이트 내부의 하늘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꽉 잡고 있어라.”
진유성이 왼손에 들린 입멸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천둥과도 같은 소리가 공간 전체를 울렸다.
쿠-쿵!
소리는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상소윤이 9를 세고, 다시 10을 세는 순간 변화가 일어났다.
쩌저저저적-!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게이트 전체를 타고 퍼져 나가는 것이었다.
소리뿐만이 아니었다.
하늘과 허공에 금이 가고 있었다.
상소윤은 알지 못했지만, 진유성은 최종오의 연을 통해 게이트의 점유율을 훔쳐 온 것이었다.
이는 공간의 주인이 마도사에서 진유성으로 바뀌고 있음을 의미했다.
패스워드를 입력하는 것은 잠깐 동안 게이트를 운용할 수 있음을 뜻한다.
진유성은 줄곧 그 방법으로 보스 몬스터의 영성을 빼앗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방법은 잠깐 동안 게이트를 운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강탈하는 것이었다.
쩌저저저적-!
게이트 전체로 퍼지던 실금이 마침내 하나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상소윤은 저 금이 모두 이어지면 왠지 거대한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굉음에 대비해 진유성의 손을 꽉 잡는데, 금이 이어졌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자, 집으로.”
진유성의 나지막한 목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진유성은 무너지는 공간 속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오경태를 보았다.
그가 마도사들의 힘을 포기하면 평범한 사람으로 DDP에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마도사들의 힘을 포기하지 않으면 공간과 함께 붕괴할 것이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 몰랐다.
다만 진유성은 작은 ‘연민’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전자이길 바랄 뿐이었다.
마침내 모든 공간이 붕괴했다.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던 상소윤이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DDP의 광경과.
“소, 소윤아!”
“상소윤!”
달려오는 엄마와 아빠였다.
* * *
“믿기 힘들 만큼 강하군. 하지만 또한 무르군.”
오경태의 눈을 통해 DDP의 페이즈2 게이트를 지켜보고 있던 첫째가 혀를 찼다.
진유성이란 존재는 정녕 이해할 수 없다.
중원에 남은 9할의 진유성도 그러하고, 한국에 있는 1할의 진유성도 그러하다.
게이트의 소유권을 통째로 훔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다.
첫째가 아쉬운 것은 아무래도 DDP 게이트에 진유성의 지인이 들어간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는 타트바가 만든 아카샤의 의지 때문에 진유성의 주변 인물들을 인식할 수 없다.
단지 얼굴을 보지 못하고,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게 아니다.
그와 관련된 그 어떤 상황도 인지할 수 없다.
당연히 상황을 통해서 정체를 추측할 수도 없고.
하지만 진유성의 행동을 역순으로 추측하면, 분명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게이트로 들어온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토록 빠르게 게이트에 나타날 수가 없다.
만약 진유성이 단 30분만 게이트에 늦게 들어왔다면 첫째가 원하는 모든 일은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증오와 복수심으로 멸망한 차원의 잔영을 받아들인 오경태를 통해 막대한 영성을 흡수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룬 바가 없냐면, 그건 아니었다.
이로서 확실해졌다.
아카식 레코드는 오염되었다.
더 이상 아카식 레코드는 마도사들이 품은 이종의 기운을 배척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멸망한 차원의 잔영을 지구와 직접적으로 연결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 그들이 사회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종의 기운이 아카식 레코드에 새겨졌을 뿐이지, 마도사들의 존재가 아카식 레코드에 새겨진 건 아니니까.
그러나 결국은 시간문제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결코 길지 않을 것이었다.
그들은 수백 년의 세월을 인내해 온 존재들이고, 몇 달 정도를 견디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중원의 진유성과 지구의 진유성이 싸우는 순간.
그들의 강함을 생각해 보면 분명 아카샤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었다.
지구의 진유성이 아카샤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그러니 마도사들이 원하는 아포칼립스는 해가 지나기 전에 이루어질 것이었다.
중원의 진유성이 지구에 강림하는 것이 올해로 예정되어 있으니 말이었다.
“그렇다 한들, 너무 많은 소모가 있었군.”
제르메크 대륙은 이렇게 일회성으로 버릴 패가 아니었다.
진유성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소유권을 앗아 가지만 않았다면 아포칼립스의 도래에 맞춰 다시 이용됐을 패였다.
첫째가 약간의 아쉬움을 담아 손을 휘둘렀다.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오경태와의 단말을 끊기 위해서였다.
그때였다.
첫째가 앉아 있는 사무실의 벽면이 온통 일렁이기 시작했다.
난데없는 일에 첫째가 흠칫 놀라는 순간.
일렁이는 벽면 한쪽에서 지독히 짙은 존재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신주청의 옆에 있던 놈이 아니군?”
남자가 거대한 힘을 품은 검으로 첫째의 목을 겨냥했다.
“싸움의 시작을 네가 정했다고, 끝도 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도사여.”
진유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