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34화>
* * *
절정의 경지에 오른 고수들에게는 인지의 영역이 곧 강함의 척도가 된다.
이는 그들의 인지(認知)가 단순히 알고 있음을 뜻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인지하고 있음은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꿰뚫고 있음을 뜻한다.
인지하고 있음은 언제든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뜻한다.
즉, 인지하고 있음은 공간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음을 뜻한다.
무림 역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고수라도 하더라도 인지의 영역이 일장(一長 : 3m)을 넘는 이는 없었다.
진유성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었다.
그그그그극!
게이트에 강림해 공간의 생사여탈권을 움켜쥔 진유성이 압도적인 기운과 함께 시선을 돌렸다.
상소윤에게 비녀를 내지르던 놈이 보인다.
늦지 않게 도착했으니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어도 상소윤이 비녀에 꿰뚫릴 뻔했다.
그것도 자신이 선물한 비녀로 말이었다.
불쾌한 기분의 진유성이 손을 뻗자, 놈의 팔뚝에 박혀있던 입멸검이 휙 하고 날아온다.
“끄아아악!”
진유성은 냉랭한 눈으로 비명 지르는 남자를 바라보다가 의아함을 느꼈다.
피가 흐르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꿰뚫은 검과 꿰뚫린 팔뚝에는 피가 묻어 있지만, 바닥에 흐르지 않는다.
이미 어느 정도 응고가 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중원의 무인들과 달리 지구의 문명인들은 일정 수준 이상의 고통에 취약하다.
사회전체가 폭력을 지양해 신체적인 폭력을 경험할 일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보통 사람이라면 검에 꿰뚫리는 순간 그 고통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놈은 비명을 지를 뿐이지 온전한 이성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독기어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진유성이 눈을 가늘게 떴다.
‘선천진기가 오염되었군.’
인간이 품고 태어난 생명력의 근원에 이상한 것이 끼어 있다.
이상하지만 낯설진 않다.
이미 몇 번이나 목격했던 것이니.
록펠러의 신체를 구성하던 악의의 냄새를 풀풀 풍기는 새까만 영기.
그것이 남자의 선천진기를 오염시킨 상태였다.
즉, 눈앞의 남자는 엔리케 카를로처럼 마도사들의 손이 닿은 자였다.
그 순간이었다.
“죽어!”
비명을 지르던 남자가 갑자기 바닥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놀랍게도 남자는 바닥을 박차고 달려드는 짧은 순간 동안 몸이 커졌다.
원래도 건장하다는 인상을 주는 덩치였는데, 지금은 거대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진유성과 비슷하던 키가 단숨에 2m에 가까워졌으며, 팔뚝의 근육이 급격히 팽창했다.
상처 난 팔뚝이 갑자기 부풀어 오르자 검붉은 피가 허공으로 비산했다.
이윽고 핏방울 하나하나가 총알과도 같은 날렵한 형태를 갖추더니 진유성과 상소윤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쐐애애애액-!
수백 개의 총알과 함께 달려드는 남자의 모습은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진유성에게는 아니었다.
진유성의 등 뒤에 서있던 상소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그저 진유성의 어깨가 살짝 움직였다고 느낀 순간, 총알은 전부 사라지고 남자는 바닥에 꼬꾸라져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기절한 것이었다.
‘지, 진짜로…….’
처음엔 놀라고 당황해서 깊게 생각하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진유성은 간첩이 아니라 각성자인 것 같다.
그것도 아주 강한.
‘북에서 온 각성자인가? 아니면 한국의 비밀 각성자?’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여전히 이상한 것은 각성자들도 이미 시작된 게이트에 진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상식이었다.
한데 진유성은 갑자기 나타나지 않았는가?
상소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게이트 내의 유일한 각성자 장태환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장태환은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힐끔 쳐다보고는 진유성에게 정중히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너 각성자냐?”
“그렇습니다만…….”
“각성자란 놈이 민간인이 죽을 것 같은데도 지켜만 보고 있어? 뒤질래?”
“그, 그게…….”
“이름.”
“네?”
“이름을 말하라고.”
“자, 장태환입니다.”
진유성이 아니꼬운 시선으로 장태환을 쳐다보았다.
물론 장태환이 나섰어도 마도사들의 손이 닿은 놈을 막진 못했을 것이었다.
방금 전의 공격을 보아하니, 어지간한 A급 각성자들도 아차 하는 사이 살해당했을 수준이니.
하지만 막지 못한 것과 막지 않은 것은 다르다.
진유성의 냉엄한 시선을 받은 장태환이 안절부절못하다가 재차 물었다.
“성함이……?”
“문수혁이다.”
“네? 하지만 수혁이 형은…….”
“너 문수혁 알아?”
“어, 그. 고등학교 선배님이십니다.”
“그럼 차정명이다.”
“차정명 각성자님은 이렇게 생기지 않으셨는데…….”
“원래 TV랑 실물이랑 좀 다른 법이니, 닥치고 사람들이나 통솔하고 있어.”
“전 실물도 뵀었는데…….”
“성형했다.”
손을 휘휘 저어 장태환을 치워버린 진유성이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의 상소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상소윤.”
“어, 왜. 어……. 네?”
“드디어 오라버니에 대한 존칭을 쓸 마음이 생긴 게냐?”
“열흘 가지고 언제까지……!”
그렇게 말하던 상소윤이 갑자기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사람마다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는 순간은 다르다.
친한 친구의 죽음을 장례식장에서 인지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게임에 접속해서 인지하는 이도 있다.
늘 같이 하던 친구가 없어졌다는 걸 그제야 깨닫는 것이었다.
이처럼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달랐다.
상소윤도 마찬가지였다.
믿기 힘든 상황을 머리로는 인지했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한데, 진유성과 평소와 다름없는 대화를 나누며 마침내 받아들인 것이었다.
죽지 않았다.
살았다.
진유성이 그녀를 살렸다.
“아주 잘 버텼다. 훌륭했다.”
진유성이 파르르 떠는 상소윤을 안아 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 목소리가 버튼이라도 됐는지, 상소윤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진유성의 품에서 눈물을 흘리던 상소윤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호, 혹시 엄마 봤어?”
“봤다. 외숙모도 외삼촌도 밖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아주 멀쩡하시다.”
“그럼 진짜로 게이트 밖에서 들어온 거야? 어떻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일단 저것부터 알아야겠군.”
진유성이 가리키는 것은 허공에 맺혀 있는 심상이었다.
[00 : 10 : 44]
째깍째깍 줄어들고 있는 제한시간이 뭘 의미하는지 진유성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저것 때문에 사람들이 패닉에 빠지기 직전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그러니까…….”
상소윤이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동대문 DDP에서 있었던 일과 게이트에 들어와서 시작된 미션.
갑자기 시작된 마녀사냥과 남자의 행동, 그리고 상소윤의 행동.
두서없이 시작된 설명이었지만, 상소윤은 생각보다 더 침착하게 정보를 전달했다.
‘과연 상림의 딸이군.’
상소윤이 최대한 빠르게 설명한다고는 했지만 어느덧 5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00 : 04 : 49]
이제 5분도 채 남지 않았다.
그 시간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는지, 웬 여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소리를 질렀다.
“그, 그쪽 각성자죠! 어떻게 좀 해 봐요!”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11명을……!”
“내가 11명을 뽑는다면 그 안에는 네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진유성의 말에 여자가 깜짝 놀라더니 악을 썼다.
“내, 내가 뭘! 난 잘못한 게 없단 말이야!”
진유성의 놀라운 등장과 압도적인 무력 때문에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일순간에 끓어올랐다.
흉흉한 분위기가 맴도는 것이 당장이라도 만만한 누군가를 죽이려는 것만 같았다.
죽음이 5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 불러온 공포와 패닉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진유성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그럼 다른 이들은 잘못한 게 있단 말이냐?”
“그,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렇다면 네가 살아남아야 할 근거도 없지 않느냐?”
진유성의 물음에 여자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 남자의 목소리는 뭔가 이상하다.
공포와 패닉조차 밀어내는 힘이 있다.
진유성은 그 모습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이런 상황이 싫다.
진유성이 상소윤을 보며 상림의 딸이라고 감탄했던 것은 그녀가 침착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소윤이 내렸던 결론이 진유성이 내릴 결론과 같기 때문이었다.
물론 진유성이 없다면, 관리자와 싸우자는 주장은 공허한 이상주의자의 외침일 뿐이었다.
실현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니까.
하지만 그런 희박한 길이 진유성이 걸어 왔던 길이다.
생존대를 죽이려던 정도무림은 태산보다도 높고 바다보다도 큰 존재였다.
생존대를 향한 공격이 늘 무력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진유성의 목을 가져오면 모두를 살려 준다는 회유도 있었고, 진유성을 살려 줄 테니 수하들을 버리라는 타협안도 있었다.
지옥 같은 파상공세 속에서 가끔씩 날아오는 회유와 설득은 엄청난 유혹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견뎌 냈다.
생존대의 의지와 이상이 단 한 번이라도 무너졌다면 결코 견디지 못했을 것이었다.
바보 같은 이상주의자들이 모여서 모든 타협을 거절한 결과물.
그것이 대명제국에 우뚝 선 천마신교였다.
진유성이 모두를 향해 말했다.
“미션은 클리어하지 않는다.”
“미, 미친!”
“그럼 다 죽는다고!”
“다, 당신도 죽는다고!”
참가자들이 아우성쳤지만, 진유성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이 서로를 공격할 수 없도록 모두를 짓누를 뿐이었다.
기묘한 상황이었다.
모두가 두려움을 느끼고 있지만, 두려움보다 진유성이 뿜어내는 압박감이 더욱 크다.
그래서 움직일 수가 없다.
[00 : 00 : 57]
마침내 시간이 1분도 남지 않았을 때, 상소윤이 진유성에게 속삭였다.
진유성을 제외한 사람들 중 유일하게 상소윤은 두려움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진유성을 믿고 있었다.
“야, 근데 저 사람은 저대로 놔둘 거야?”
상소윤이 가리키는 이는 진유성에게 제압당하고 기절한 남자였다.
“죽이길 원하느냐?”
“아니, 그건 아닌데. 뭔가로 묶어 놓던지, 마무리를 짓던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놔둬라. 생각이 있다.”
진유성이 생각하기에 이번 게이트는 마도사들이 많은 투자를 감행한 곳이다.
분명 더 큰 의도가 있고, 궁극적으로 원하는 바가 있을 것이었다.
나름대로 짐작 하고 있는 것도 있고.
그러니 저 남자를 통해 확인할 것이 있었다.
[00 : 00 : 10]
제한 시간이 10초대로 줄어들자, 사람들이 두려운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00 : 00 : 05]
5초 밖에 남지 않자, 상소윤도 침을 꿀꺽 삼키더니 진유성의 팔을 붙잡았다.
시간이 흘렀다.
누군가에겐 영겁처럼 느껴지던 5초.
마침내, 제한 시간이 끝이 났다.
[00 : 00 : 00]
관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모두에게 심상이 전달되었다.
[끝자리 정렬에 실패하셨습니다.]
[참가자 311명, 전원 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