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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233화 (233/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33화>

관리자의 심상이 퍼져 나가자, 사람들 사이에서 기묘한 침묵이 맴돌기 시작했다.

본래 침묵은 고요하다.

하지만 지금의 침묵은 전혀 고요하지 않았다.

꾹 다문 입과 힐끔거리는 시선 속에서 요동치는 감정들.

불신, 경계, 생존 의식, 공포…….

다양한 감정의 찌꺼기들이 침묵 속에서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그 속에는 상소윤도 있었다.

국가에서는 게이트에 대한 기본적인 사안들을 교육한다.

초중고 정규 교육은 물론이고, 예비군, 민방위, 직장 훈련에서도 게이트 관련 교육이 필수였다.

그러니 비각성자인 상소윤도 지금의 게이트가 뭔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게이트는 인간 대 몬스터의 싸움이었지만, 페이즈 2란 단어에서 느껴지는 느낌은…….

‘인간 대 인간.’

그것을 의도하는 느낌이 든다.

상소윤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00 : 59 : 21]

[00 : 59 : 20]

[00 : 59 : 19]

제한 시간이 째깍째깍 줄어들기 시작한다.

침묵이 순식간에 깨진다.

“어, 어떻게 좀 해 봐요!”

“뭘 어떻게 해! 11명이 죽어야 한다는데!”

“가, 각성자. 각성자는 이런 경험이 있을 거 아니야?”

장태환이 흠칫 놀라서 고개를 저었다.

“이, 이런 게이트는 저도 처음입니다. 사람을 죽이라니…….”

“군필자 거수! 일단 군필이랑 미필이랑 나누고…….”

“왜? 왜 나눠요? 군필자들끼리 힘이라도 합치게요?”

“어차피 11명이 죽어야 한다면 조금이라도 몬스터랑 잘 싸우는 사람들이 살아야지!”

“내가 아저씨보다 잘 싸울 거 같은데! 키도 작고 말라 가지고! 군대만 다녀오면 다야?!”

“아니, 이 미친 여자가!”

“차, 차라리 나이가 어린 순으로 살죠. 어린 사람들이 각성을 해도 적응도 빠르다고……!”

“개소리 집어치워!”

혼란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특정 조건’에 맞는 300명이 살아남아야 한다고 울부짖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그들이 주장하는 ‘특정 조건’은 본인을 포함하는 조건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떠들어 댔지만, 모두가 입을 놀리는 것은 아니었다.

개중 몇몇은 떠들기보다는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관리자의 심상 속에서 중요한 힌트를 얻었다.

[여러분은 서로를 살해해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으며, 살해에 도움을 주는 경우에도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게이트 내에서의 살인은 아무런 메리트가 없었다.

경험치는커녕 아이템조차 얻을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사람이 사람을 죽여도 경험치를 준다.

‘나 혼자 11명을 전부 죽이면?’

그럼 단번에 11명분의 경험치를 얻을 수 있다.

게다가 관리자는 이게 첫 번째 미션이라고 했다.

첫 번째라는 건, 두 번째도 있다는 게 아니겠는가?

지금 11명을 죽여서 경험치를 잔뜩 얻어 놓으면, 두 번째 미션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얻을 수 있다.

또 모른다.

두 번째 미션이 최후의 100인이 살아남을 때까지 싸우라는 내용일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첫 번째 미션에서는 방관자가 되서는 안 된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TV에 나오는 고위 각성자의 부유한 삶도 먼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문명인들은 살인이란 행위에서 엄청난 심리적 거부감을 느낀다.

그때였다.

동그란 안경을 쓴 유약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유를 찾는 건 어떻습니까?”

“이유?”

“여기서 11명이 죽어야 한다면 악한 사람들이 죽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이를 테면…….”

동그란 안경의 남자가 흠칫 놀라는 40대 후반의 남성을 가리켰다.

“저 살인마 같은 놈이요.”

의외의 단어에 사람들이 동그란 안경을 쓴 남자와 40대 후반의 남자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기 시작했다.

동그란 안경의 남자가 한숨과 함께 바지 주머니를 더듬거렸다.

그러나 집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게이트에 들어온 이들 중에는 의복을 제외하면 그 어떤 소지품도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분증이 없지만, 전 종로 경찰서의 최석민 경사입니다. 그리고 저놈은 강도 살인으로 감방에 다녀온 놈이고요.”

최석민 경사의 말에 40대 후반의 남자가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나, 나는 죗값을 치렀다고! 내가 죽인 것도 아닌데……!”

남자가 스스로를 변호했지만, 공기는 순식간에 냉각되었다.

죗값을 치렀다는 말을 한 것 자체가 범죄를 인정하는 꼴이기 때문이었다.

최석민 경사가 대중들을 향해 말했다.

“저는 우리 중에 죽어 마땅한 11명이 있다면, 저 남자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상소윤은 옆에서 이야기를 듣다가 퍼뜩 놀랐다.

‘죽어 마땅한’이라는 수식어가 가진 힘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마녀재판을 시작할 것이다.

여기 모인 사람들 중 조금이라도 접점이 있는 이들은 상대방의 허물을 들춰 낼 것이고, 그것을 죽어 마땅한 죄로 포장할 것이다.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

마땅히 없어져야 할 것을 없앴다는 자기 합리화를 위해.

끔찍한 일이다.

사람들을 말려야 한다.

‘하지만……. 내가 나서는 게 맞는 걸까?’

상소윤은 딱히 죄를 지은 적도 없었고, 나쁜 짓을 한 적도 없었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상황이 전개된다면 그녀는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가만히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상소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아니나 다를까 마녀재판이 시작되었다.

“저 남자! 소매치기라고요!”

“이 미친 아줌마가 뭔 개소리야! 난 회사원이야!”

“김밥집에서 내가 지갑 훔치는 거 봤는데!”

“나 아니라고!”

마녀사냥의 무서운 점은 무죄를 증명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죄를 지목당하면 화형대 위에 올라야 한다.

불에 타 죽어야지 무죄이고, 불을 피해 도망치면 마녀다.

사람들이 온갖 곳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내용들이 화마가 되어 넘실거리고, 죄를 지었다고 추측되는 자가 속출한다.

‘이건 아니야.’

상소윤은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상황이 틀렸다는 것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나서서 11명을 선정할 수도 없잖아.

유일한 각성자인 장태환도 팔짱을 낀 채 마녀사냥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일이 어떻게 진행되든 유일한 각성자인 자신은 살아남을 거라는 걸.

그러니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곳에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유독 덩치가 좋아 어쩌다가 게이트에 들어왔는지 이해할 수 없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럼 11명이 추려진 건가?”

“무, 뭐?”

“여기는 흉악범이 많네. 나 같은 잡범은 축에도 못 끼게.”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사람들에게 사기꾼으로 몰리던 한 아주머니의 등을 냅다 걷어찼다.

악, 하는 비명과 함께 아주머니가 쓰러진다.

“꺄아아악!”

근처에 있던 젊은 여자가 소리를 지르자, 남자가 히죽 웃었다.

“왜 그래? 다들 이 여자를 죽이자고 소리쳐 놓고선.”

남자가 놀라 쓰러진 아줌마의 멱살을 움켜쥔다.

그러더니 손 모양을 바꿔서 목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사람이 말이야. 생각보다 참 쉽게 죽거든. 목만 몇 초 졸라도.”

남자의 갑작스러운 폭력에 모두가 당황했다.

하지만 말리는 이는 없었다.

[00 : 28 : 11]

어느덧 제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커, 컥!”

아줌마는 숨을 꼴딱거리며 남자의 팔뚝을 붙잡았지만, 그걸 걷어 낼 힘은 없겠다.

“각성자 양반, 안 할 거 같아서 내가 하는 건데. 괜찮죠?”

남자의 물음에 각성자 장태환이 외면했다.

각성자인 그는 일반인에 비하면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사람을 죽여 본 적은 없었다.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지면 반격해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겠지만…….

무방비의 사람을 죽이는 건 너무나 힘든 일이다.

각성자의 암묵적인 허락을 받아 낸 남자가 히죽 웃으며 본격적으로 힘을 주려는 순간이었다.

“그만해!”

힘껏 달려온 상소윤이 남자의 어깨를 밀어 버렸다.

균형을 잃고 넘어진 남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분노한 얼굴로 상소윤에게 다가갔다.

“이런 미친년이……!”

남자의 손이 상소윤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놀랍게도 상소윤은 반사적으로 손을 막아 냈다.

하지만 체급 차이가 너무 컸다.

힘을 이기지 못한 상소윤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쥐고 있던 비녀가 바닥에 떨어졌다.

남자가 재빨리 비녀를 움켜쥐었다.

제법 날카로운 무기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쓸모가 있는.

비녀를 챙긴 남자가 상소윤을 보며 비아냥거렸다.

“왜, 씨발? 가슴 아파서 못 보겠어? 아니면 네가 대신 죽으려고?”

“…….”

“다른 방법 있어? 있냐고!”

남자의 고함에 상소윤이 입을 열었다.

“관리자랑 싸우면 되잖아.”

“뭐?”

“이딴 일을 시킨 놈이랑 싸우면 되잖아!”

상소윤은 자신의 방법이 이상주의자의 그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아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모든 일의 원흉인 관리자와 싸우는 것이 낫다.

상소윤은 어려운 말을 잘 모르지만, 서로를 음해하고, 비난하고, 외면하는 것보다는 힘을 합쳐 싸우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설령 그 끝에 죽음이 있다 하더라도, 그 죽음에는 의미가 생긴다.

‘그래, 존엄성.’

상소윤은 몰랐지만, 이것은 그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려준 불꽃이었다.

제 아무리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본질을 찌르며, 핵심을 향해 달려 나가는 뜨거움.

가슴 속에 품은 날카로운 검과 뜨거운 불꽃.

하지만 상림의 이러한 불꽃은 진유성이 존재했기에 타오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진유성이 없었다.

“뭐라는 거야? 관리자랑 싸우자고? 다 죽고 싶어?!”

“다 죽는 게 낫지! 이럴 거면!”

“미친년!”

남자가 상소윤의 비녀를 움켜쥐었다.

인간은 참으로 우스운 존재이다.

목을 조를 때는 거부감이 없었는데, 비녀로 찌르려니 거부감이 든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앙다물었다.

자신은 신의 부름을 받았다.

우발적으로 친구를 죽이고, 수배 명단에 올라 도망치던 와중에 신을 만났다.

새까만 연기를 흩날리는 신은 그에게 명했다.

[동대문으로 가라. 거리낌을 버릴 수만 있다면, 새로운 삶이 널 기다릴 것이다.]

그러니 그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고위 각성자가 되는 것.

고위 각성자가 되면 각성 이전에 저지른 일반 범죄에 대한 면책권이 주어지니까.

“죽어!”

남자가 고함을 지르며 상소윤에게 달려들었다.

상소윤은 그 모든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행동하지도, 그렇다고 동조하지도 않는 주변의 사람들.

남자의 우악스러운 손에 들려 있는, 진유성을 졸라서 받아 낸 진녹색의 비녀.

그 뒤로 번지는 남자의 번들거리는 눈동자와 눈빛.

시시각각 다가오는 폭력의 공포.

죽음의 악취.

상소윤을 그것을 보며 움직였다.

이것이 그녀의 끝이라면 가만히 있다가 죽을 순 없었다.

하지만 슬로우 모션처럼 보이는 남자의 행동보다 자신의 몸이 더욱 느렸다.

비녀가 상소윤의 목을 찔렀다.

푸욱-!

살갗을 꿰뚫는 소리가 그녀의 목에서 들린다.

남자가 뭐라고 소리를 지르지만 들리지 않…….

물속에서 거칠게 꺼내진 것처럼, 상소윤은 모든 정신이 일순간에 튀어 오르는 걸 느꼈다.

죽음의 위협 앞에 느려졌던 시간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남자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

“끄아아아악!”

살갗을 꿰뚫는 소리는 상소윤의 목에서 나는 것이 아니었다.

남자의 팔에서 나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남자의 팔을 꿰뚫은 검의 주인이 비녀를 움켜쥐었다.

“이 물건은 네 것이 아니다.”

비녀를 돌려준 남자가 상소윤을 쳐다보며 말했다.

“예전에는 네가 질색했었지. 하지만 오늘은 다를 것 같구나.”

“진짜…… 진유성……?”

진유성은 상소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일부러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과 목소리로 물었을 뿐이었다.

“이번엔 시켜 주겠느냐?”

“뭘?”

“명예 소방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상소윤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웃고, 웃다가, 울었다.

진유성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안다.

낯설고 두려운 환경에 놓였던 자신에게 안정을 찾아 주기 위해서겠지.

그러니…….

상소윤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고오오오오오-!

진유성의 온몸에서 뿜어지는 압도적인 기운이 공간의 생사여탈권을 움켜쥐었다.

이제 이곳은 마도사들이 만들어 낸 게이트가 아니다.

천마가 강림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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