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30화>
Quest 39. 구하는 천마님
하마, 아니 상도윤이 태어나고 일주일이 지났다.
이 말인즉슨, 오늘이 해병대 캠프에 참여했던 이들이 돌아오는 날이라는 것이었다.
“이곳이 서울인가? 변한 것이 하나도 없군.”
“그리운 냄새야, 큭큭.”
“만 년 만에 귀환한 기분이군.”
정신이 반쯤 나간 심도훈, 지종수, 고인수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귀찮아하는 진유성을 억지로 불러냈다.
사실 불러낸 것도 아니었다.
진유성이 나올 생각이 전혀 없자, 그들이 압구정으로 찾아온 것이었으니까.
연락을 받고 카페로 들어서던 진유성은 세 사람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랐다.
원래도 못생겼던 놈들이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리니 더욱 못생겨졌다.
역시 군대는 위험한 곳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빼야 한다.
“진유성……!”
“배신자!”
“너 때문에 우리가!”
진유성을 발견한 세 사람이 후다닥 달려들어서 그동안의 고충에 대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사실 세 사람이 겪은 고생은 진유성 때문에 더욱 힘들어진 것이 맞다.
EASY.
네 글자로 조교들을 도발하고는 도망쳤으니까.
한동안 진유성을 타박하며 군대 썰을 풀던 지종수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 생각 없이 진유성이 있다는 압구정으로 오긴 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이상하다.
“야, 근데 너 왜 압구정에 있냐?”
“집에 있었으니까.”
“너희 집이 압구정이라고? 아니라지 않아?”
지종수의 말에 진유성이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까 집이 압구정이 아니라는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한 게 아니라, 상소윤이 했었다.
진유성의 집이 좀 멀어서 유혜연이 태워 주는 거라고.
본래 거짓말은 더 큰 거짓말을 불러오기 마련이라, 진유성도 자신의 설정과 관련된 모든 내용을 기억하지 못했다.
특히 상소윤이 멋대로 말한 내용들이 헷갈린다.
진유성이 태연하게 말했다.
“잠깐 상소윤네 집에 와 있는 중이다.”
“뭐? 왜! 네가 왜 소윤이 집에 있어!”
“아이가 태어나서 손 들어가는 일이 많다. 상소윤의 아버지는 출근을 해야 하니 내가 도와주고 있는 거다.”
얼마 전에 사촌 동생이 태어났었던 심도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벌써 애가 집에 있다고? 병원이나 산후조리원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본래는 심도훈의 말이 맞았지만, 유혜연은 예외였다.
진유성이 도와준 덕분에 컨디션이 더할 나위 없이 좋기 때문이었다.
상도윤 역시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하고.
“병원에 있을 필요 없이 건강해서 집으로 왔다고 들었다.”
“그래? 다행이네.”
“잘됐다.”
그저 친구 어머니의 무사 출산을 축하하는 심도훈, 고인수와 달리 지종수는 집요했다.
“그거랑 이건 다른 문제지! 네가 왜 소윤이 집에 있냐고! 직접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했잖느냐. 손이 부족하다고.”
“나도 손 있는데, 혹시 보탤 수 있을까?”
“네 손은 너무 더럽다.”
“뭐? 깨끗이 씻었거든!”
“죄는 씻는다고 씻어지는 게 아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데!”
“꾀죄죄.”
“…….”
지종수는 카페 유리창에 비춘 자신을 쳐다보았다.
훈련을 받다가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과 난생 처음으로 겪은 고난 때문에 상접한 피골.
캠프에서 잘 때 입고 잤던 트레이닝복은 잔뜩 구겨져있고, 머리도 정돈하지 못해서 삐죽삐죽하다.
옷에서 땀 냄새와 흙냄새도 나는 것 같다.
추레하고, 꾀죄죄하다.
그에 반해 진유성은 어떠한가?
말끔한 옷차림에 맑은 피부.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귀공자가 따로 없다.
소윤이 어머니의 마음에 쏙 드는 그런 남자.
“제길……!”
심도훈과 고인수가 순정 만화의 주인공이 된 지종수를 혐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데, 진동 소리가 들렸다.
진유성의 핸드폰이었다.
“무슨 일이냐, 상소윤. 아, 그래? 알겠다. 바로 들어가지.”
진유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이만 들어가겠다.”
“어디 가는데.”
“소윤이 어머니가 찾는다.”
그렇게 진유성이 떠나고, 심도훈과 고인수는 시선을 교환했다.
본래 친구의 불행은 그들의 기쁨이 아니던가?
“역시 소윤이 어머니는 진유성을 사윗감으로 점찍은 거 같지?”
“당연하지. 누구랑 다르게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꾀죄죄하지도 않고.”
“소윤이 동생이 그거 하지 않을까? 결혼식에서 꽃 뿌리는 아이들 있잖아.”
“갑자기 무슨 결혼식?”
“뭐긴 뭐야. 진유성이랑 상소윤 결혼식이지.”
그들은 움찔움찔 반응하는 지종수를 보며 강한 만족감을 느꼈다.
이래서 조교들이 그들을 갈궜나 보다.
세 사람이 카페에서 주접을 떨고 있는 사이, 진유성은 마트에 들러서 상소윤이 말한 물건들을 구매했다.
그리곤 가장 중요한 아이스크림을 사서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향하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지종수의 말이 맞긴 하다.
상도윤과 그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그저 수하의 아들이자, 친우의 동생일 뿐.
하지만 만약 자신이 지구로 넘어오지 않았다면 상도윤이 태어났을까?
운명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니었을 확률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상림 같은 대머리가 되진 않아야 할 텐데. 걱정이군.”
자신이 상림의 모발을 강제로 밀어 버렸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진유성이 중얼거렸다.
* * *
[……이에 대한민국은 각성 독립 국가로 나아갈 것을 천명합니다.
향후 대한민국은 SG와의 새로운 연대를 형성해 좁게는 한국을, 넓게는 아시아를, 드넓게는 전 세계의 게이트 안전을 도모하는 방파제가 될 것을 약속합니다.]
한국의 결단이 전 세계를 강타했다.
베를린 S급 게이트를 클리어한 이후 자신감이 붙은 한국이 마침내 각성 독립국으로 발돋움한 것이었다.
모든 국가들이 예상하고 있던 수순이긴 했으나, 시기는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이런 속도는 단호한 삭발로 결기를 보인 네 명의 정치인들이 때문이었다.
각성 독립의 진통은 거의 없었다.
우산도가 베를린 게이트를 클리어하기 전이라면 국민들이 불안해할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불안하지 않다.
한국은 SG의 도움을 받는 국가가 아니라, SG에게 도움을 주는 국가니까.
한국은 이에 멈추지 않고 SG와 새로운 연대를 형성했다.
지금까지는 한국이 SG의 소속 국가였다면, 이제부터는 대등한 협력 관계가 되었다.
이건 SG가 원한 것이었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S급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있는 한국과 연대를 형성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한국은 캘리포니아, 멕시코, 헝가리에 이은 네 번째 자유 각성 지대가 되었다.
국가로만 따지자면 멕시코, 헝가리에 이은 세 번째 각성 독립 국가였고.
각성 사회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지만, 막상 한국 각성자들의 삶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지부의 오더에 따라 게이트에 진입하고, 클리어를 진행했다.
명령을 내리는 단체의 이름이 SG가 아니라 KSG일 뿐이었다.
심지어 SG와 KSG는 지부의 구성 인원도 95% 이상 동일했다.
원만한 협의를 거쳤기 때문에 KSG는 한국 SG 직원들을 그대로 흡수했다.
드물게 SG에 남기를 원하는 몇몇을 제외하면 말이었다.
그렇게 평범한 일상이 흘렀다.
우산도 멤버들은 상림의 출산을 축하했고, 진유성에게 계속해서 무공을 배웠다.
SG의 프로젝트 팀이었던 우산도는, KSG의 공식적인 팀이 되었다.
이 말은 곧, 우산도가 KSG에 명확한 정치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는 것과도 같았다.
한지후 소장은 SG 서울지부장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좌천은 아니었다.
오히려 영전이었다.
우산도의 비호를 받은 한지후가 KSG 한국본부의 본부장으로 선출됐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각성 독립이 완만하게 진행되자, KPM은 자국의 각성자들에게 수수료를 덜 받는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는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불러왔다.
전 세계의 각성자들 중 상당수가 귀화 가능성에 대해 문의한 것이었다.
사실 모든 각성자들이 국가를 지키겠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주의가 강한 서구 쪽에서는 그저 직업의식으로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들에게 한국은 꿈의 직장이었다.
한국에는 고위 각성자가 넘쳐나서 고위 게이트로부터 안전하다.
심지어 S급 게이트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땅은 상당히 좁아서 업무 환경이 좋다.
최상단에서 최남단까지 파견을 간다고 쳐도, 비행기나 헬기를 타면 1시간이면 충분하니까.
자체적으로 마켓을 운영하고 있으니 수수료에서 이득을 볼 수도 있고, 문화 수준이 낙후된 것도 아니다.
물론 인종과 사회 적응의 문제는 있겠지만, 그것을 감수한다면 아주 훌륭한 선택지가 된다.
게다가 한국은 게이트 사태 이후로 문화를 거의 완벽히 회복한 국가이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B~D 등급 각성자들 중에 한국 귀화를 원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이들은 충분한 대우를 받고 있는 고등급의 각성자나, 어느 국가를 가도 큰 대우를 받지 못하는 저등급의 각성자들을 제외한 부류였다.
귀화에 관대하지 못한 한국은 아직 확답을 내리진 못했지만, 현 상황 자체는 꽤 기꺼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처럼 모든 것이 착착 맞아떨어지는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위기는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이었다.
“본부장님!”
관료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여전히 현장 일을 놓지 않고 있던 한지후는 부하 직원의 다급한 목소리에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문득 불안한 기시감이 들었다.
이와 비슷한 외침을 들어 봤던 것 같다.
“한 소장님! 서, 서울역 GEL 수치가 9를 돌파했습니다!”
서울역 1차 비징후 게이트.
난데없이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언노운 엠페러가 들어가지 않았다면 서울역의 폭주로 이어졌을 위험천만한 순간.
한지후는 억지로 침착함을 유지하며 차분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동대문에, 동대문에 게이트가 생성됐습니다.”
“비징후 게이트인가? 오픈 예정은 언제지?”
“……이미 오픈되었고, 참가 인원을 선별했습니다.”
한지후 소장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한 번 겪어 본 일이다.
그때보다 더 빠르긴 하지만, 답이 없는 것도 아니다.
“등급은?”
“외부에서 관측되지 않습니다. 등급도, 미션도.”
“그게 무슨 말이지?”
“아무래도……. 한 번도 보지 못한 형태의 게이트인 것 같습니다.”
무더운 8월의 어느 날.
대한민국을 시작으로 페이즈2가 시작되었다.
* * *
“아니, 어째 도윤이가 교주님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애도 아는 거지. 보다 훌륭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주 좋으시겠습니다.”
“내가 아니라, 네가 좋아해야지. 아들이 사람 보는 눈이 있는 거니까.”
진유성은 오랜만에 집에 상림과 단 둘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둘이 아니라, 상도윤을 포함한 셋이긴 했지만.
유혜연과 상소윤은 함께 동대문으로 나갔다.
상소윤이 준비하는 쇼핑몰이 영 미더웠던 유혜연이 한 번 지켜봐야겠다면서.
본래 출산 직후의 산모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지만, 유혜연은 너무나 건강했기에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태어난 지 한 달이 될까 말까 하는 상도윤은 벌써부터 몸을 뒤집고 있었고.
진유성은 거실 소파에 앉아서 상림이 아들을 돌보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딘지 상도윤이 상림과 놀아 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평화로운 시간이 흐르는데, 상림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유혜연이었다.
“응, 여보.”
예민한 청력을 가지고 있는 진유성은 본인이 받는 전화가 아니더라도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유혜연은 울고 있다.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당황하고 있었다.
“여, 여보!”
깜짝 놀란 상림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지르자, 놀란 상도윤이 울음을 터트렸다.
진유성은 두 개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리는 울음소리는 두 개지만, 하나의 울음소리를 더 듣는 것만 같다.
상소윤이 게이트에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