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25화>
* * *
상림은 오랜만에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만났다.
바로, 대정고의 학부모들이었다.
만남의 목적은 학부모 모임이었지만, 다들 회사를 운영하는지라 대화의 시작은 경영이었다.
“우리도 KPM 때문에 돈 좀 잃었죠.”
“저희도요. KPM이 그렇게 잘 버틸지도 몰랐고, 베를린 게이트가 터질지도 몰랐으니까.”
“큰 형님이 운영하는 증권사에서는 몇 명 옷 벗었다고 하더라고요.”
다들 KPM 이야기를 하면서 투덜거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대부분의 대기업들은 KPM이 망하는 쪽에 베팅을 했었다.
그들이 한국을 싫어하거나, KPM이 망하길 바라서가 아니다.
그냥 그렇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회사를 운영할 때는 객관적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지, 사감으로 하는 것이 아니니까.
오늘 모인 이들 중에 유일하게 KPM 관련 투자로 돈을 번 사람은 상림뿐이었다.
‘나야 뭐, 교주님이 KPM 뒤에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렇게 투자에 대한 이야기가 끝날 때쯤, 화제가 전환되었다.
화두에 오른 것은 상림의 LF 건설이었다.
“LF 건설은 요즘 호재죠?”
“뭐, 열심히 하고 있죠.”
“얼마 전에 기사 보니까 수원 쪽 계약 따내신 거 같던데…….”
게이트 테마의 건설사라고 늘 폭주 지역만 복구하는 건 아니다.
게이트 사태 초창기에는 전국에 게이트가 펑펑 터졌고, 그걸 복구할 인력이 부족했다.
그러다보니 급한 대로 대충 복구해 놓은 지역이 아주 많았다.
수도권에서는 대표적으로 수원과 고양이 그랬고, 지방에서는 대전과 춘천이 그러했다.
이런 지역들의 가장 큰 문제는 <지역민 대피소>였다.
최대한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도록 지어 놓은 건물이기에 효용 가치가 제로에 가깝고, 공간을 엄청나게 잡아먹는다.
게다가 게이트가 폭주하면 언제든지 다시 파괴될 수 있다는 전제로 지은 거라서 외관이 흉물스럽다.
철도도 문제가 된다.
폭주 이후 급하게 지어 놓은 철로들이 거주 지역과 맞물린 경우 소음 공해를 유발한다.
대한민국은 게이트 사태 이후 가장 완벽하게 삶의 질을 회복한 국가이지만, 이러한 문제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래서 정부는 예산을 확보할 때마다 이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속초를 생태 공원으로 만들고, 춘천의 명물인 드라이브 도로를 회복하고.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있었다.
이번에는 수원이었다.
수원은 재정비 지역 중에 가장 돈이 되는 빅 파이였다.
정부에서 하는 일이라 수익률이 낮겠지만, 그래도 계약을 따내기만 하면 최소 1~2년은 매출 걱정이 없는 공룡 사업.
당연히 수많은 건설사들이 계약에 입찰했고, 개중에는 LF 건설보다 확실한 비교 우위에 서있는 대기업 계열사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약을 따낸 것은 LF 건설이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LF 건설이 아무리 게이트 테마 건설사의 시초격인 회사라지만, 규모가 너무 작다.
규모가 작다는 것은 로비의 금액도 작다는 것이고, 정치인들의 입맛을 만족시키기도 힘들다는 것이었다.
학부모 모임에서 수원 이야기가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회사의 경영자들은 상림이 어떤 방법을 썼는지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상림은 아무런 방법도 쓰지 않았다.
그저, 김정철 회장과 우산도 멤버들이 LF 건설을 밀어줬을 뿐이었다.
본래 각성자들은 정치에 개입하지 않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한국이 각성 독립국이 되는 순간, 각성자들도 정치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이번 일은 그때를 위한 시그널이 되겠죠. 우산도에게 얼마만큼의 힘이 있는지.”
“LF 건설은 JC 그룹과 우산도에게 비밀스럽게 로비를 하는 형식을 취하시죠. 그게 자연스러우니까.”
김정철 회장과 함께 만난 한지후 소장이 해 준 말이었다.
결과적으로 상림은 포인트를 제대로 잡고 로비한 회사가 되었다.
아직 민간 기업에는 흘러 들어가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그냥 운이 좋았습니다.”
“에이, 사업이 운으로 되나요. 다 능력이죠.”
“정말 운이었어요. LF 건설이 초창기에 복구한 지역 중에 수원과 비슷한 곳이 있어서.”
상림이 의뭉을 떨자 화제는 다시 전환되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사업 이야기를 떠들던 학부모들은 마침내 자식들의 이야기에 당도했다.
오늘 모인 학부모들 중에는 지종수, 고인수, 심도훈, 정새롬, 상소윤의 부모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이게 부잣집이 자녀들을 기를 쓰고 대정고에 보내는 이유였다.
학생들의 친분이 곧 부모들의 친분이 되기도 하니까.
한숨과 함께 이야기의 포문을 연 것은 지종수의 아버지였다.
“이 자식을 진짜 어쩌죠. 기말고사를 코앞에 두고…….”
지종수 아버지를 시작으로 다들 이런저런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불만이 많은 사람은 상림이었다.
“이 자식은 일단 없어요.”
“네? 뭐가 없어요?”
“개념도 없고, 염치도 없고, 예의도 없고. 다 없어. 그냥.”
상림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의 상림은 팔불출이었다.
“소윤이가 그래요?”
“네? 아뇨. 우리 소윤이는 착하고 예쁘죠. 소윤이 말고, 진유성.”
“아, 유성이.”
다들 진유성과 상림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예전부터 친한 집안이었고, 진유성의 부모님이 죽은 뒤에는 부모처럼 돌봐 줬다고.
“그래도 유성이는 공부를 잘하잖아요?”
“공부를 잘하면 뭐해요. 인간이 덜 됐는데.”
상림은 신이 나서 진유성을 욕했다.
인터넷에 몰래 단 댓글도 걸렸고, 각성자들과 했던 뒷담화도 걸렸지만, 여전히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상림이었다.
그렇게 불만 사항을 이야기하던 중 학부모 중 한 명이 상림의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를 꺼냈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면 애들끼리 여행을 가기로 했다는 것에서 출발한 이야기였다.
“여행은 무슨 여행. 수능이 얼마나 남았다고.”
“확 해병대 캠프라도 보내 버릴까요? 고생 좀 하면 정신을 차리려나.”
지나가듯이 나온 말이었고, 본래라면 지나갔을 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상림의 머리에서 전구가 켜졌다.
“좋네요. 해병대 캠프.”
“네?”
“보내죠. 가서 굴러 봐야지 정신을 차리지.”
“여자애들은 좀…….”
“그럼 남자애들만 보내죠. 군대 다녀오면 철들잖아요?”
상림의 적극적인 태도에 학부모들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수능이 얼마 안 남았으니 너무 길게는 좀 그렇겠죠?”
“일주일 정도면 적절할 것 같은데.”
“제가 알아보죠. 최대한 힘든 곳으로.”
상림이 눈을 반짝거렸다.
물론 입신의 경지에 다다른 진유성의 체술을 생각하면 진유성이 육체적으로 힘들 순 없다.
하지만 개차반 같은 성격상 갈굼을 먹을 게 분명하다.
조교들에게 갈굼을 먹는 진유성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신이 난다.
‘신중하게 접근해야 해.’
진유성을 강제로 입소시킬 수는 없다.
본인의 입에서 가겠다는 말이 나와야 한다.
잠시 고민하던 상림이 곧장 문자를 보냈다.
-교주님. 학부모들끼리 모였는데, 애들을 해병대 캠프에 보내려고 하네요. 교주님은 안 가신다고 할게요?
답장은 금방 날아왔다.
-해병대 캠프?
-군대 체험 같은 거예요. 나름의 추억은 되겠지만, 별로 재미는 없을걸요? 안 가시는 걸 추천드려요.
진유성이 상림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상림 역시 진유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진유성은 스스로 판단하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해도 직접 겪어 보기 전에는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게다가 묘한 반골 기질도 있어서, 하지 말라고 하면 꼭 해 보기도 한다.
-하다가 재미없으면 빠지면 되잖아?
-한 번 입소를 하게 되면 일주일을 채울 동안 못 나와요. 그게 규칙이에요. 군대 체험이잖아요.
-한번 해 보지, 뭐.
-진짜 가시게요?
-어. 한 번도 안 해 본 거니.
-재미없으실걸요?
-그래봐야 일주일인데, 뭐.
-알겠습니다.
미끼를 문 진유성의 답장에 상림이 함박 미소를 지었다.
* * *
상소윤은 태블릿 PC에 뜬 기말고사 시험지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 인생에 이토록 열심히 공부를 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니 시험도 잘 보고 싶었다.
‘진유성이 뭐라고 했었지?’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풀 수 있는지 없는지를 빠르게 판단하라고 했던 것 같다.
대정고는 상위권, 중위권, 하위권의 실력 격차가 큰 학교였다.
게다가 중위권과 하위권은 성적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집단이다.
자연스럽게 시험 문제 자체가 상위권과 최상위권을 분별하는 경우가 많았다.
진유성은 상소윤에게 딱 풀 수 있는 것만 풀라고 했다.
중위권과 하위권을 구분하려고 만들어진 문제만 다 잡으면 60등은 될 수 있을 거라고.
상소윤은 진유성의 조언을 믿고 열심히 문제를 풀어 나갔다.
모르는 건 과감히 찍었고, 아는 건 틀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게다가 신기하게도 진유성이 집중적으로 공부하라고 한 내용에서 시험이 많이 나왔다.
‘와, 씨. 공부를 잘하면 출제도 대충 예상하는구나.’
진유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뛰어난 오성을 가진 이였다.
인간이 품을 수 없는 입멸공을 품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 진유성에게 출제 의도를 간파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고, 덕분에 상소윤은 생각보다 쉽게 문제를 풀어 나갈 수 있었다.
시험이 계속되었다.
모든 것이 학생들의 편의로 돌아가는 대정고는 하루 만에 모든 시험이 끝이 난다.
게다가 기말고사가 끝나고 이틀 뒤가 방학이기도 했고.
그렇게 오후 5시가 되었을 때, 마침내 모든 시험이 끝이 났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상소윤이 진유성에게 달려갔다.
“야, 진유성!”
“왜 그러느냐.”
“나 시험 잘 본 거 같아.”
“그래, 잘했다.”
“따라와. 누나가 옷 사 준다.”
“왜 날 괴롭히려고 하지? 난 분명 도움을 줬는데.”
“누가 괴롭힌다고 그래? 옷을 사 준다니까?”
“그게 괴롭히는 것이다.”
서로의 입장차를 좁힐 수 없던 사이, 질투심에 불타는 지종수가 끼어들었다.
“그럼 홍대를 가자.”
결국 그들은 홍대로 합의를 보았다.
* * *
모든 시험을 태블릿 PC로 진행하는 대정고인 만큼 시험 성적이 나오는 데는 하루면 충분했다.
진유성은 이번에도 1등이었다.
사실 지식의 깊이 자체는 최상위권 학생들이 진유성보다 깊을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를 푸는 것에 있어서는 진유성이 이들보다 나았다.
일단 진유성은 실수를 전혀 하지 않는다.
보통 실수가 나오는 것은 시간이 부족하고 마음이 급해서인데, 진유성은 이러한 부분에서 완벽했다.
게다가 진유성은 설령 정확히 모르는 문제라도 풀 수 있는 눈치가 있었다.
보통의 학생들은 문제 자체를 풀려고 하지만, 진유성은 왜 이런 문제를 냈는지를 먼저 파악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실제 지식 자체는 진유성보다 뛰어난 이들이 등수 자체는 낮은 것이었다.
이처럼 진유성의 등수에는 변화가 없었다.
큰 변화를 일으킨 것은 상소윤이었다.
상소윤의 등수는…….
상소윤 [57 / 97]
무려 57등이었다.
유혜연과 약속했던 60등 안쪽에 이름을 올린 것이었다.
등수가 나오자 원하는 바가 있었던 상소윤은 곧장 행동을 개시했다.
“어머니, 소녀와의 약조를 잊진 않으셨지요?”
상소윤의 물음에 출산 예정일이 2달 넘게 남았음에도 만삭에 가까운 유혜연이 대답했다.
“뭘 원하는데?”
유혜연도 기분이 매우 좋아서 어지간한 부탁은 다 들어줄 생각이었다.
사실 유혜연이 기분 좋은 이유는 57등이란 등수 자체는 아니었다.
어차피 상소윤은 공부해서 먹고살 팔자는 아닌 것 같으니까.
그녀가 기쁜 것은 상소윤이 노력했다는 것과 그 노력으로 성과를 냈다는 것 자체였다.
그리고…….
‘내가 사윗감 하나는 잘 뽑았단 말이지.’
진유성이 상소윤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킨 것이 마음에 들었다.
여전히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유혜연이었다.
“사실은 엄마…….”
유혜연의 기꺼운 반응 속에서 상소윤이 자신의 계획을 입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