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24화>
* * *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본래 야당 정치인들은 여당의 반대에 서고, 여당 정치인들은 야당의 반대에 선다.
정치인들이 정말 바보들이라서 바보 같은 말들을 내뱉는 게 아니다.
상대방의 말이 맞다는 걸 알면서도 반대쪽에 서야 하니 무논리를 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베를린 S급 게이트 같은 경우는 야당과 여당에게 모두 호재였다.
자국의 문제가 아니라, 타국의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다들 이 꿀을 자신들이 좀 더 많이 핥고 싶을 뿐, 전혀 불만은 없었다.
그런데…….
“오 장관님부터 박 차관님까지……. 대체 뭐가 불만이십니까?”
“네?”
“무슨 불만이 있으니까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신 거 아닙니까?”
“그런 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닙니까. 어디 말씀을 해 보세요.”
삭발을 하고 나타난 4명의 국회의원들 때문에 회의의 분위기는 썩 좋지 않았다.
대충 삭발을 한 것도 아니고, 거뭇한 부분을 완전히 지워 버렸다.
어떤 강건한 뜻이 있지 않고는 하기 힘든 수준이다.
‘게다가……. 복잡한 관계들이군.’
삭발을 한 네 명은 정치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은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한마음 한뜻을 먹었다는 건 아주 의미심장하다.
“말씀을 해 보시라니까요! 대체 뭐가 불만이신지.”
그러나 대머리로 나타난 정치인들은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들은 삭발을 한 게 아니라, 삭발을 당한 것이니까.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다.
당장은 상황을 모면할지 몰라도, 긴 정치 생활을 생각해 보면 절대 해서는 안 된다.
이 바닥에서 이미지는 지독하게 오래간다.
진실을 말할 수도 없고, 영원히 침묵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꾸며낸 진실을 말해야 하는데…….
시기적절한 것이 하나 있었다.
이는 임기응변이 아니라, 정치인들이 꽤 오랫동안 생각하던 것이기도 했다.
“이제 때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때요?”
“캘리포니아, 멕시코, 헝가리, 그리고……. 대한민국.”
완연한 살색의 두피를 꿈틀거리며 던진 정치인의 말은 묵직했다.
말만 묵직한 것이 아니다.
모습에도 기묘한 무게감이 있었다.
대한민국이 각성 독립국이 되는 건 정해진 수순이지만, 그 타이밍이 참 어렵다.
너무 빠르게 독립하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는 방파제가 될 수 있었고, 너무 늦게 독립하면 후발주자로 손해를 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모두들 누가 총대를 멜 것인지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단호한 결의를 다진 4인의 국회의원들이 총대를 멘 것이었다.
삭발까지 감행하면서.
물론.
‘머리를 잘라서 화를 내야 하나, 고자로 안 만들어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나 말고 세 명이 더 언노운 엠페러의 뒤를 쫓고 있던 거였군?’
‘내 풍성한 머리가…….’
그들의 속마음은 외부의 시선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렇게 대한민국은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 * *
진유성은 상소윤과 함께 공부를 시작했다.
진유성이야 생사결의 상태에 돌입하면 시험 공부를 단 몇 시간 만에 끝낼 수 있지만, 상소윤은 아니다.
괜히 상소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진유성은 상소윤과 함께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시늉을 해 주었다.
“야, 진유성.”
“왜 그러느냐?”
“이게 무슨 소리야?”
“몰라도 묻지 말고 끝까지 읽어라. 다 읽은 다음에 물어보고.”
“뭐? 왜?”
“전체를 알고 부분을 탐구하는 것은 쉬우나, 부분으로 전체를 잇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진유성의 말은 무공을 수련할 때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었다.
무공을 수련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초식을 완전히 외우는 것이었다.
초식 안에 담긴 의(意 : 의미)와 용(用 : 용법)은 염두에 두지 않고 형(形 : 형식)만 익힌다.
그렇게 형을 외우고, 연습하고를 반복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용법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의 횡베기는 적을 실제로 벤다기보다는 물러나게 만드는 것이구나.
횡베기 이후로 이어지는 보법은 물러난 상대의 전면으로 파고드는 것이구나.
이런 식으로 짐작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무공의 초심자들은 용법을 오해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오해조차 소중하다.
추후에 상승 무리를 공부할 때는 오해에서 파생되는 궁리들이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용을 알게 되면 다음으로는 의를 깨우칠 수 있었다.
진유성이 보기엔 공부도 비슷하다.
그러니 지금의 상소윤은 무공의 초심자처럼 무식하게 외워야 했다.
하지만 진유성은 상소윤이 지난하고 지겨운 초심자 과정을 견뎌 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저번에 포기할 때도 그랬지만, 상소윤의 집중력은 너무나 하찮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상소윤이 입을 다물고 열심히 책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물론 버릇은 쉽게 못 고치니 중간 중간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집중하려고 마음을 다잡고, 어떻게든 잡생각을 떨쳐 내려고 노력한다.
‘흐음.’
진유성은 처음으로 상소윤에게 기특함을 느끼고는 조금 도와주기로 했다.
내공을 움직여서 상소윤의 시각을 제외한 오감을 둔하게 만든 것이었다.
사람은 집중하면 주변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반대로 주변 소리가 잘 들리지 않으면, 본인이 집중했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인체란 워낙 오묘한 것이라서 결과가 원인을 지배하기도 한다.
두려움이나 긴장 때문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상태에서 이성을 보면 사랑에 빠지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본래는 사랑에 빠져서 두근거리는 것이지만, 두근거리기 때문에 사랑에 빠질 수도 있었다.
스터디 카페에서 처음 공부를 알려 줄 때는 이 방법을 쓰지 않았는데, 그때는 상소윤에게 전혀 집중할 의지가 없었다.
집중할 마음이 없는데 갑자기 오감이 둔해지면 병원에 가야겠다고 난리를 피울 것 같았다.
그러나 오늘은 꽤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
진유성은 꽤 기꺼운 마음으로 상소윤이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확실히 유혜연이나 상림과 닮았군.’
전체적인 이목구비는 유혜연을 닮았으나, 눈과 눈썹은 상림을 쏙 빼닮았다.
상림이 한국에서는 험상궂은 대머리 깡패로 여겨지지만, 중원에서는 전혀 아니다.
호방하며 호쾌한 미남자의 대명사가 상림인 시절이 분명 있었다.
천마신교 3인자란 후광 효과도 있었겠지만, 그런 것 없을 때도 상림은 인기가 많았다.
상소윤에게서 그런 상림의 눈과 눈썹이 보이니 참으로 신기하다.
자신을 닮은 자식을 낳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그는 알지 못하니까.
‘흠. 그래도 이렇게 보니까 심각하게 박색하진 않군.’
지구에 온지 시간이 제법 지났으니, 진유성의 기준도 중원에 있을 때와는 시선이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상소윤의 집중이 흐트러지는 게 느껴졌다.
1시간 이상을 집중하는 건 쉽지 않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진유성이 상소윤의 오감을 둔하게 만들던 내공을 치우자, 때마침 상소윤이 기지개를 켜며 입을 열었다.
“와, 나 엄청 오래 집중한 것 같은데.”
“그래 보이더구나.”
“약간 그, 괴리된 느낌이었어. 소리가 잘 안 들리고 좀 붕 떠 있는?”
“약이라도 먹은 게냐?”
“네가 이 기분을 알 리가 없지.”
“모를 리가 없지 않겠느냐? 난 일등이고, 넌 꼴등인데.”
“아, 너는 진짜 다 나쁜데 그 잔망스런 주둥이가 제일 나빠.”
“하지만 난 일등이지.”
진유성과 상소윤은 투닥거리는데, 말소리가 들렸는지 유혜연이 과일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오늘 진유성과 상소윤이 공부를 하고 있는 곳은 상소윤의 방이기 때문이었다.
유혜연이 책상에 과일을 내려놓으며 진유성에게 입을 열었다.
“유성아.”
“네?”
“외숙모가 인생을 살면서 보니까, 안 되는 건 안 되더라.”
그리고는 상소윤을 쓱 보더니 말했다.
“안 될 것 같으면 빨리 포기해.”
“아, 엄마!”
“왜.”
“딸이 의욕을 가지고 공부 좀 해 보겠다는데!”
“의욕이 있다고 다 되면 세상에 어려운 게 어디 있겠니.”
“엄마 나빠!”
“아니야, 엄마 착해. 엄마가 얼마나 착한데.”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하는 엄마의 모습에 상소윤은 말문이 막혔다.
가끔 보면 엄마도 진짜 4차원이다.
“우리 유성이, 너무 고생하지 말고. 손절할 거면 빨리 하고.”
“엄마! 딸한테 손절은 너무……!”
“엄마 병원 다녀온다.”
유혜연이 휙 하고 방을 나가자, 분노한 상소윤이 유혜연이 가져다준 사과를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야, 진유성.”
“왜?”
“나 진짜 60등 만들어 줘.”
“근데 뭘 하고 싶은 게냐?”
“뭐가?”
“외숙모가 도발하기 전부터 공부를 하려고 하지 않았느냐. 뭔가 부탁할 게 있는 눈치였고.”
“아, 그거?”
상소윤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돈 좀 빌리려고.”
“돈을 빌려? 용돈도 많이 받는 게?”
“아니, 좀 큰 돈.”
“돈은 어디다가 쓰려고 그러느냐?”
“아무래도 내 재능은 여기 있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한 상소윤이 꽤 낯이 익은 노트 한 권을 내밀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할 때 열심히 사용하던 것.
옷 그림으로 가득 차 있는 노트였다.
“옷 가게를 차리려는 것이냐?”
“아니, 인터넷 쇼핑몰.”
“흠.”
진유성은 별말 없이 어깨만 으쓱했다.
그는 인터넷 쇼핑몰에 대해서 잘 몰랐지만, 경쟁자가 많은 직군이라는 건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가게를 구해야하는 것도 아니니 진입 장벽이 낮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약간은 철없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진유성은 상소윤을 타박하지 않았다.
상소윤이 꽤 진지한 마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기 싫은 공부에 집중하면서까지 이루고자 하는 바니까.
“뭐지? 내가 아는 진유성이면 지금 타이밍에 그 잔망스러운 혀를 가만히 둘 리가 없는데.”
“그렇지 않다. 때론 인생의 실패를 경험하는 것이 더욱 큰 성공일 때가 있으니.”
“아니 실패를 왜 깔아 두는데.”
“성공만 있는 인생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실패를 알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니, 그러니까 실패를 왜 당연시하냐고.”
“열심히 해라. 그래서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날 힘을 키워라.”
“야!”
소리를 버럭 지른 상소윤이, 갑자기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표정을 바꿨다.
그리곤 사근사근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유성아, 넌 완벽하잖아?”
“뭐?”
“키도 크고, 몸도 좋고, 얼굴도, 뭐 나쁘지 않고, 머리도 좋고?”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이냐.”
“아아아주우 완벽하단 말이지.”
“용건을 말해라.”
“그런 너에게 한 가지 결여된 것이 있고, 난 그걸 채워 줄 수 있어.”
상소윤이 주먹을 내밀며 말했다.
“남자 모델 어때. 옷은 협찬으로 준다.”
상소윤은 진유성이 은근히 관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진유성을 모델로 섭외하는 건 갑자기 떠올린 것이지만, 거절당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싫다.”
“뭐 왜?”
“알 거 없다. 아무튼 싫다.”
진유성으로서는 거절할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진유성은 자신의 얼굴이 마도사들에게 드러나면, 상림의 가족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타트바는 마도사들이 자신을 찾을 수 없다고 말했고, 상림을 찾아온 신주청도 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고 한다.
하지만 진유성은 상황은 언젠간 역전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지금은 아카샤의 힘이 마도사들의 눈을 속일 수 있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때가 되면 자신이 찍은 사진 한 장이 상소윤과 유혜연의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다.
본래 관계의 역전은 가장 큰 위험을 초래하는 법이니까.
그래서 유투브에서도 가면 요리사인 것이었다.
그사이, 진유성의 단호한 거절에 당황한 상소윤이 절충안을 내놓았다.
“그럼 얼굴을 감추면?”
“감춘다?”
“모자이크도 되고, 선글라스도 되고, 아무튼 감추면 어때?”
“그렇게나 내 완벽한 신체의 황금 비율이 탐이 나느냐?”
“……그러게. 탐이 나서 참을 수가 없네.”
“고민은 해보마. 하지만 60등 안에 못 들면 고민할 가치도 없는 것이다.”
“당연하지!”
상소윤이 다시 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진유성은 슬쩍 웃고는 상소윤의 시각을 제외한 오감을 둔하게 만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