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22화>
Quest 38. 기쁜 천마님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던 한 달 동안은 좀 쉬었지만, 진유성은 종종 시간이 나면 게이트를 클리어했다.
보통의 각성자에게 게이트 클리어란 일주일의 정량적인 시간이 소모되는 행위다.
하지만 진유성은 아니다.
그는 게이트가 열리기도 전에 게이트에 들어갈 수 있으며, 미션 종류와 관계없이 보스의 신전을 공략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는 시간에도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남들의 게이트를 마구잡이로 뺏은 건 아니었다.
진유성이 클리어하고 다니는 게이트는 경산 게이트나 천안 게이트 같은 곳이었다.
경산 게이트는 정치권의 표 놀이와 돈놀이를 위해서 폭주가 방치됐던 곳이었다.
천안 게이트는 문제가 있는 각성자들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배당받은 곳이었다.
진유성은 늘 뒤가 구린 게이트를 클리어했기 때문에 이런 소식은 언론에 전해지지 않았다.
구린 짓을 하려던 이들은 게이트가 클리어되면 화들짝 놀라서 모든 것을 덮기 마련이었다.
괜히 언론의 관심이 쏠리면 그들이 하려던 짓이 수면 위로 올라올 수도 있으니.
또한 한국 정부와 한국의 SG는 ‘언노운 엠페러’의 존재를 신경 쓰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각성자에 의해 게이트를 클리어됐다면 언노운 엠페러를 생각해 보기 마련이었다.
이 역시 대외비였으니, 언론에 다뤄지는 법은 없었다.
이런 식으로 진유성은 조용히 몇몇 게이트를 클리어했고, 서울역 이외의 게이트에도 몇 개의 웨이 포인트를 찍어 두었다.
그중 하나가 양도 게이트였다.
양도 게이트는 도(島)라는 이름이 붙은 것처럼 육지가 아니었다.
해남 땅끝마을의 선착장에서 서쪽으로 1.6km만 가면 도착할 수 있는 자그마한 섬.
7명이 그 섬에 살고 있는 모든 인구였다.
상림의 말에 따르면 양도 게이트의 폭주가 결정된 것은 행정 구역 때문에 내린 정치인들의 결정이라고 했다.
양도가 해남의 옆에 있는 섬인데, 행정 구역이 완도라서 일부러 섬을 없애려는 거라고.
그래서 진유성은 양도 게이트를 클리어했다.
클리어를 완료됐음에도 양도는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되었다.
본래의 거주민이었던 1가구가 게이트 예고에 맞춰 해남으로 이사를 갔으니 말이었다.
그렇게 양도는 버려진 섬이 되었고, 지금 그 섬에는 진유성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쏴아아아아-
게이트에서 나온 진유성은 파도 소리를 들으며 바위 위에 앉았다.
그리고는 인벤토리에서 맥주 캔을 꺼냈다.
인벤토리에는 냉장 기능이 없어서 미지근한 맥주가 나왔지만, 진유성이 움켜쥐는 순간 맥주 캔의 온도가 내려갔다.
진유성 정도의 경지에 오르면 내공으로 불을 피우는 삼매진화뿐만 아니라, 반대의 일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다만 이번엔 온도 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맥주 캔이 완전 얼더니, 터져 버렸다.
진유성은 새로운 맥주를 꺼냈고, 이번에는 적절히 시원한 정도로 바꾸었다.
그리고는 바다의 경치를 보며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니, 진녹색을 머금던 멀더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럼 나중에 다시 와. 나만큼 내공을 쌓은 다음에 한 판 뜨자.”
“얼마든지요!”
사실 약속이라고 불릴 만큼 거창한 내용은 아니다.
지나가면서 한 말이다.
진유성이 이 말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멀더가 마력 증진이 막힐 때마다 징징거렸기 때문이었다.
빨리 교주님을 뛰어넘어야 하는데, 마력이 더 이상 늘지 않는다.
그러니 천마신교 본단에 비치된 영약을 좀 내려 주시면 감사하겠다.
이런 식으로 말이었다.
그러나 진유성은 멀더의 죽음에 그 어떤 의미라도 부여하고 싶었다.
진짜 멀더가 아니라, 멀더란 사람의 단면을 잘라 낸 분체라고 하더라도 말이었다.
그래서 열심히 싸웠다.
싸움을 끝내려면 얼마든지 끝낼 수 있음에도, 멀더가 알고 있는 모든 술법을 받아 냈다.
게다가 오늘은 멀더가 진유성보다 많은 마력을 쥐고 있었다.
보스의 신전에서 끊임없이 마력을 제공받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같은 양이라도 진유성의 내공이 압도적인 효율을 내긴 하지만.
“짜식……. 마력이 아무리 많아도 안 되면서.”
괜히 중얼거린 진유성이 맥주 캔을 털고는 새로운 맥주 캔을 잡았다.
사실 진유성은 입멸공의 최종오의 멸(滅)을 쓰고 싶었다.
멸을 써서 모든 것을 깔끔히 지우고 싶었다.
멸은 인과율을 지우는 힘이고, 이는 상실의 공간에서 상실함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멀더의 영혼이 게이트에서 타의에 의해 농락당했다는 사실 자체를 없애고 싶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진유성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을.
그것을 적들이 원하고 있다는 것을.
게이트에 들어가는 순간 진유성을 날아왔던 입멸공은 분명 자신의 것이었다.
중원에 남은 가짜 진유성.
그놈의 짓이었다.
놈만큼 자신의 입멸공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이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진유성이 입멸공을 아낀 것이기도 했다.
물론 멀더와의 약속 때문에 사용하지 않은 것이기도 하니까.
그동안 진유성에게는 적이 없었다.
사전적 의미의 적이 없었다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화전민에게 붙잡힌 노예로 시작해 중원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오르며 어찌 적이 없었겠나.
하지만 영혼을 떨리게 하는 적은 없었다.
사전적 의미로의 적이 아니라, 운명적 의미로의 적이 없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적이 나타났다.
그 적이 자신이 잃어버린 힘 속에서 탄생했다는 것은 지독한 희극이자 비극이지만.
하지만…….
촤아아아-
파도 소리를 들으며 진유성은 확신했다.
그는 상대가 누가 됐든 절대 지지 않는다.
그것이 그가 백 년이 넘도록 쌓아 온 인과율이다.
인간이 신이 되는데 신화가 필요하다면, 진유성의 신화는 승리 신화이다.
지금껏 그는 단 한 번도 패배해본 적이 없…….
“……아니, 잠깐.”
그러나 진유성은 자신이 패배해 본 적이 있다는 걸 깨닫고는 화들짝 놀랐다.
롤을 처음 시작할 때도 패배했었고, 볼링장에서 친구들에게 패배한 적도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상소윤에게 공부를 가르치다가 패배와 같은 포기를 했고, 밤늦게 컴퓨터를 한다고 유혜연한테 매일 혼난다.
그 모든 것이 패배다.
하지만, 결코 기분이 나쁘지 않은 패배다.
진유성은 어느새 자신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는 것을 깨닫고는 시원하게 웃어 버렸다.
그래, 중원의 진유성은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마치 신처럼.
하지만 지구의 진유성은 즐거운 패배를 몇 번이나 맞이했다.
인간답게.
그러나 진유성은 문득 알 수 없는 예감이 들었다.
그가 인간이기 때문에 이기는 순간들이 올 거라는 강한 예감을.
진유성이 맥주 캔을 따서 바다에 천천히 흘려보냈다.
푸른 바다 위로 맥주가 흘러가더니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산산이 부서졌다.
멀더도 저랬으면 좋겠다.
사람이 죽으면 윤회하는지, 아니면 사후 세계에 가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뭐가 됐든 저랬으면 좋겠다.
한없이 넓은 세상을 돌아다니느라 나쁜 기억이나, 슬픔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그냥, 즐겁게.
“나도 그러마.”
멀더의 넋을 기린 진유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한국 각성 마켓.
Korea Player Market.
줄여서 KPM.
동아시아의 국가들의 심기를 건드렸던 KPM은 그동안 꽤 어려운 시간을 겪고 있었다.
심기가 불편해진 국가들이 PPP라는 다국적 전선을 구축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KPM이 꾸준한 역량으로 PPP의 공격을 잘 흘려 넘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긴 했다.
하지만 이는 그동안 PPP가 손해를 보지 않는 정책으로 KPM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PPP가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나오면 KPM도 간담이 서늘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KPM을 만든 김정철 회장은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상했었다.
본래 KPM은 한 번 무너질 계획이었다.
마정석 지급 불능 사태를 감수할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SG의 힘으로 다시 일어날 예정이었다.
이는 의도적으로 KPM의 뿌리에 SG를 섞는 과정이었다.
KPM의 순수한 힘으로는 외부의 공격을 원천 차단할 수 없으니, 준비한 일이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아놀드 벡이 도움이 약조된 이상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SG는 그들의 영향력이 급락하고 있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기도 했고.
하지만 놀랍게도 KPM은 무너지지 않았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세 글자로도 표현할 수 있다.
진유성.
홀로 S급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있는 천외천(天外天 : 하늘 위의 하늘)의 각성자이면서…….
‘JC 편의점의 편의점주지.’
속이 아프다.
진유성이 얼마나 수완이 좋았던지, 각성자들을 총동원해 JC 편의점을 홍보했다.
덕분에 ‘JC’하다라는 말은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공중파 예능에서도 떠들고 있다.
공중파 예능은 점잖게 ‘JC하다’라고 말하지만, 인터넷에서는 거의 ‘정철하다’라고 말한다.
-베를린 S급 게이트를 클리어한 일국의 영웅들이 공항을 통과하는 모습이…….
-독일 총리는 한국의 도움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빚을 졌다고 공식적으로…….
-베를린의 시민 단체는 앞으로 만나는 모든 한국인들에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뉴스가 잘 들어오지 않았다.
‘뭐, 클리어할 줄 알았으니까.’
김정철 회장은 그런 생각을 하며 TV를 꺼 버렸다.
앞으로는 꽤 바빠질 것이었다.
한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각성 강국이자, 세계에서 유일하게 S급 게이트를 클리어할 수 있는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그 국가의 각성 마켓을 자신의 운영하고 있다.
SG의 도움으로 재건하는 모양새는 이제 필요 없다.
KPM은 발목을 붙잡은 PPP를 완전히 뿌리치고, 비상할 것이었다.
수많은 돈을 아귀처럼 JC하면서…….
“미쳤어!”
회장님이 빽 소리를 지르자, 깜짝 놀란 비서가 회장실로 뛰어 들어왔다.
“회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그러자 김정철 회장이 파리해진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데…….”
“예?”
“심연이 나를 보았네…….”
입에 착착 달라붙는 그 말을 쓰지 않으려고 그토록 노력했건만.
전부 허사였다.
“예?”
비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김정철 회장이 손을 휘휘 저었다.
“나가 보게. 아, PPP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고하고.”
“아, 회장님. PPP는 자정을 기점으로 해체했습니다.”
“확실해? 구성원들은?”
“그게…….”
선진국들은 쓰임을 다한 PPP의 구성원들을 한직으로 쫓아내거나, 해임시키는 데 그쳤다.
하지만 사회주의의 색이 남은 국가들은 그 쓰임이 다한 이들을 어떻게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한동안 감금할 수도 있고, 어쩌면 죽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비서가 전해 온 말이었다.
씁쓸한 경쟁 사회의 일면이었다.
김정철은 비록 그들이 KPM을 공격하던 이들일지언정, 목숨을 빼앗기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길고 길었던 KPM와 PPP의 싸움은 끝이 났다.
한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각성 질서가 완전히 개편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