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04화>
* * *
상림이 중원을 떠난 건 진유성이 입신의 경지에 오르기 전이었다.
물론 천마신교주로 중원을 일통할 때도 중원인들은 진유성의 무공을 신의 경지라고 여겼다.
하지만 당사자인 진유성의 생각은 좀 달랐다.
자신에게는 아직 다듬고 보완해야 할 부분들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실제로 그때의 진유성은 환골탈태도 경험하지 않았고, 더디긴 하지만 분명 늙고 있던 상태였다.
그때의 진유성은 초인지경이었다.
신에 이르진 못했으나, 인간은 초월한 정도.
초인지경이란 단어는 진유성이 만든 것이지만, 스스로에게 퍽 잘 어울리는 표현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진유성이 초인이던 시절, 상림이 전력으로 도망치면 그는 다섯에서 열다섯 호흡을 써야했다.
공간이 협소하면 다섯 호흡.
공간이 광활하면 열다섯 호흡.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진유성은 단 두 호흡 만에 상림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컥!”
키는 진유성보다 상림이 더 컸지만, 상림은 뒷덜미를 붙잡힌 채 허공에서 대롱대롱 매달렸다.
상림의 목에 입멸검을 가져다 댄 진유성이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물으마. 오른손이냐, 왼손이냐?”
“두, 두 손을 다 썼는데요?”
“호오, 교주께 속죄하는 마음으로 두 손을 다 자르겠다는 말이지?”
“아, 아뇨!”
“그럼?”
“그, 어…….”
상림이 눈을 뒤룩뒤룩 굴렸다.
하지만 이 난관을 타개할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처음으로 교주님을 이겼다고 좋아하던 과거의 자신이 떠오른다.
그러나 과거의 자신은 멍청했다.
정말 완벽한 승리를 원했다면 자동 로그인을 풀었어야지.
이대로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자동 로그인 때문에 죽은 놈은 처음이군.’이라고 말할 것만 같았다.
물론 진유성이 정말로 자신을 죽이진 않을 것이었다.
아무리 진유성이 개차반이라도 이 정도로 사람을 죽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진유성의 온몸에서 풍기는 엄청난 살기를 느끼면, 정말로 죽을 것 같다.
신의 경지에 올랐고, 상실의 공간에서 신까지 베어버린 고금제일의 무인.
그가 내뿜는 살기란 그런 것이었다.
결국 상림은 정공법을 택했다.
이래도 답이 없고, 저래도 답이 없으면 방법은 딱 하나 뿐이다.
“살려 주세요.”
비는 것.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것도 아주 납작 엎드려서.
대롱대롱 매달린 상림의 말에 진유성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뭐든지?”
“넵. 뭐든지.”
“흐음.”
진유성이 목에 댔던 입멸검을 슬며시 내렸다.
“신성의 맹세를 해라.”
“네? 그게 뭔데요?”
“어제 무슨 판타지 소설을 봤는데, 신성의 맹세를 어기면 믿는 신이 직접 죽인다고 하더구나.”
“저는 신을 안 믿는데요?”
“걱정 마라. 대신해서 내가 죽일 거니까.”
“…….”
뭐라도 있는 것처럼 거창하게 말했지만 그냥 맹세를 어기면 죽인다는 소리.
무슨 마피아가 따로 없다.
하지만 상림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맹세합니다! 진짜로요!”
“너, 나중에 내가 시키는 거 무조건 해야 된다.”
“뭘 시키실 건데요?”
“모르지, 나야.”
“그, 회사와 관련된 건 좀……. 회사가 저 혼자 일군 것도 아니고…….”
“걱정 마라. 물질적인 뭔가를 탐하진 않을 테니.”
상림은 진유성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두려웠지만, 더는 토를 달지 못했다.
여기서 더 조건을 걸면 고자가 될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상림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유성이 손을 풀었다.
허공에 매달려 있던 상림은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비틀거렸다.
“어라?”
진유성의 손에 붙잡혀 있었으니, 허공이라고 해 봤자 30cm 남짓 떠 있던 것에 불과했다.
일반인도 30cm를 착지하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무공의 고수인 상림에겐 아주 손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상림은 그 쉬운 걸 하면서 술에 취한 사람처럼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진유성이 무슨 수를 썼는지, 균형 감각이 완전히 마비된 것이었다.
“교, 교주님!”
당황한 상림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그 순간, 검기가 가느다란 실처럼 흘러나오며 상림을 스쳤다.
스스스슥!
상림은 진유성의 검기가 벌이는 사악한 행위를 깨달았다.
점점…….
머리가 시원해진다.
“교, 교주님!”
상림이 빽 비명을 질렀지만, 진유성의 손길은 거침이 없었다.
잠시 뒤, 진유성이 상림의 눈앞에 입멸검의 검면을 내밀었다.
“검면에 비춘 네 모습이 보이느냐?”
“…….”
“그것이 네가 날 만나지 않았을 때의 미래다. 대머리 고자.”
“…….”
“고자는 시각화할 수 없으니, 대머리를 시각화했다.”
진유성의 말처럼, 입멸검의 검날에 비친 상림은 대머리였다.
손으로 만지니 까끌한 느낌 하나 없이 맨들맨들하다.
도대체 얼마나 섬세히 검기를 다룰 수 있어야 검기로 면도를 한단 말인가?
그것도 이리저리 휘청거리는 사람을 대상으로?
상림이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혀 있는데, 진유성이 말을 이었다.
“머리카락이 다시 자랄 때까지 매일 거울을 보면서 반성해라.”
“다, 다시 자라긴 하죠? 막, 모근을 없애 버리고 그런 거 아니죠?”
“자르기만 했다. 하지만 한 번 더 이런 일이 있다면?”
진유성은 더는 말 하지 않았다.
그저 심유한 눈길로 상림의 머리와 상림의 하반신을 내려다보았을 뿐이었다.
상림이 입을 다물었다.
머리카락이야 다시 자라는 것이다.
교주님의 말처럼 어쩌면 원래 이런 모습이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지금은 내공을 되찾아 풍성한 모발을 가지고 있고.
상림은 간신히, 아주 간신히 자기합리화를 끝냈다.
하지만 도저히 지금 이 모습은 합리화가 되지 않는다.
“……교주님.”
“왜?”
진유성은 상림에게 복수를 끝냈다고 여겼는지, 다시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아내한테는 뭐라고 하죠……?”
“몰라. 뭔가 묻어서 다 밀었다고 하던가.”
“대체 뭐가 묻어야 머리를 밀까요……?”
“글쎄? 교주님에 대한 불경?”
“…….”
그렇게 약간의 소동 뒤로 상림이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워낙 진유성에게 많은 괴롭힘을 당해 본 터라 크게 마음에 담아 두지 않는 상림이었다.
“근데 왜 회사에서 보자고 하신 겁니까? 무슨 일이 있나요?”
“꼭 회사일 필요는 없었고, 그냥 애마를 보러 온 것이다.”
“그럼 왜요? 무슨 일인데요?”
“너 토요일에 우산도랑 만날 거냐?”
상림은 얼마 전부터 문수혁과 차정명에게 마력을 쓰는 법과 무기를 다루는 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처음엔 문수혁과 차정명도 긴가민가했다.
아무리 언노운 엠페러가 보증했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대한민국 1위와 2위의 각성자였으니까.
하지만 상림은 두 사람을 아주 잘 가르쳤다.
어떤 의미에서는 진유성보다 나았다.
진유성은 적당히 가르쳐 보고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화를 내지만, 상림은 친절했으니까.
즉, 진유성은 고수를 초고수로 만드는 건 쉽지만 하수를 중수로 만드는 건 잘 못하는 사람이었다.
워낙 높은 곳에서 노니는 존재라서 발이 얼마나 무겁고, 땅이 얼마나 질척거리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문수혁과 차정명이 위력으로만 따지면 하수는 아니지만, 공력으로만 따지면 하수였다.
시스템 때문에 편하게 강해졌으니까.
문수혁과 차정명은 상림과 진유성의 가르침을 받아 보고는 상림이 우산도에 더 도움이 되는 스승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림을 초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상림은 진유성의 질문이 뜬금없다고 생각했다.
진유성은 이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글쎄요. 수혁이랑 정명이는 오라고 하던데…….”
“갈 거야, 말 거야?”
“가지 말까요?”
“그거야 네가 정하는 거지.”
“근데 왜 신경을 쓰고 그러십니까? 교주님답지 않으십니다.”
상림의 말에 진유성이 입을 다물었다.
상림의 말이 맞다.
평소의 그답지 않다.
결국 지금의 대화 끝에 신주청이란 이름이 나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진유성이 입을 열었다.
“상림아. 네가 우산도에게 무공을 가르치겠다는 것은 결국 각성 사회에 얼굴을 드러냄을 뜻한다.”
“어, 그런가요?”
“나만 해도 그래. 난 본래 각성자들에게 내 모습을 보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때? 드벡이도 그렇고, 우산도도 그렇고. 결국은 인연이 닿았지.”
“음…….”
“입멸공에 이런 말이 있다. 인과율을 조작한다고 해서, 인간을 조작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인연이란 그리 무거운 거야.”
“대오(大悟)는 눈빛에서 흐르고, 대성(大成)은 초식에서 흐르고, 대기(大氣)는 몸에서 흐른다는 말씀이시죠?”
“그래. 낭중지추.”
“교주님이 저한테 송곳이라고 하니까 이상한데요?”
“날카로움은 상대적인 거니까.”
진유성은 상림을 하급무사처럼 대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무에 대한 순수한 깨달음만 견주어 보면, 상림은 지구상에서 손꼽히는 강자였다.
“우산도와의 인연으로 인해 너도 언젠간 편을 나눠야 할 수도 있고, 누군가의 반대쪽에 서야 할 수도 있다.”
“그렇겠죠. 당장 KPM만 봐도 그렇긴 합니다.”
진유성은 KPM과 나름의 관계를 맺었고, 거기에는 상림도 관여가 되어 있다.
진유성이 검토해야하는 서류적인 부분을 전부 상림이 검토하기 때문이었다.
한데 지금 동아시아 국가들은 KPM을 망하게 하기 위해서 안달이 나 있다.
일본을 중심으로 KPM을 마정석 지급 불능 상태의 마켓으로 만들 자금을 모으고 있으니까.
“하지만 교주님이 말씀하시는 편은 이런 말랑말랑한 게 아니라, 목숨이 걸린 편을 말씀하시는 거겠죠?”
“그래.”
상림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럼 전 교주님 편에 서겠습니다.”
“왜? 내가 강해서?”
상림은 오늘의 진유성은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막힘없이 대답했다.
“그것도 있긴 한데, 그보다는 다른 이유가 더 크죠.”
“뭔데?”
“제 목숨을 아홉 번 정도 구해 주셨으니까요.”
“내가 널 살려 준 게 그거 밖에 안 되나?”
“아홉 번 맞을 걸요? 죽을 뻔한 건 잘 안 까먹잖아요?”
“그럼 주청이는 널 몇 번이나 살려 줬지?”
“주청이 형님이요? 글쎄요. 세 번 정도 됐던 거 같은데.”
진유성이 말했다.
“확실히 세 번보다는 아홉 번의 편에 서는 게 맞겠네.”
“그쵸. 무려 세 배…….”
상림이 멈칫했다.
진유성의 말이 꼭, 자신과 신주청을 다른 편으로 두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주청이가 지구에 있다.”
“네? 분명 소천했다고……?”
“소천했지. 추측이긴 한데, 죽은 뒤 천신궁 게이트를 넘은 것 같다. 그래서 지구에 와서 새로이 태어난 것 같고.”
진유성이 멕시코에서 만났던 신주청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가 기억하는 신주청과 흡사하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특히 육체가 다르다.
깜짝 놀란 상림이 반문했다.
“지구에 있다고요?”
“그래.”
“어디 있습니까? 주청이 형님은?”
“모르겠다. 각성 사회에 있는지, 아니면 나처럼 숨기고 있는지.”
“그럼 어디서 보셨습니까?”
“멕시코에서.”
“아…….”
상림은 멕시코를 다녀온 이후 합천에서 만난 진유성이 평소보다 저기압이란 느낌을 받았었다.
그게 아마 신주청 때문인 듯했다.
상림이 진유성을 쳐다보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마도사들의 편에 붙은 겁니까?”
이번엔 진유성이 놀랐다.
별다른 말을 해 주지도 않았는데 거기까지 추리했으니까.
“교주님이 멕시코에서 마도사를 봤다고 하셨으니까요.”
“아마, 주청이가 상실의 공간에서 잃어버린 것은 나에 대한 마음인 듯하다. 천마신교의 시절을 미혹이라고 했으니까.”
“그럼 전 교주님이 패배하면 주청이 형님 편에 붙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아홉 번을 살려 준 편에 붙는다며?”
“아니, 일단 아홉 번 쪽에 붙었다가, 아홉 번이 지면 세 번으로 가는 거죠.”
“뒤질래?”
“죽기 싫으니까 여기까지 생각한 거 아닙니까?”
상림의 농담에 진유성이 피식 웃었다.
약간의 침묵 뒤에 상림이 입을 열었다.
“교주님, 생각해 보면 중원은 참 생명 경시 사상이 만연하지 않았습니까? 조금만 수틀리면 죽이고, 죽을 줄 알면서도 싸우고.”
“굶어죽거나, 죽여서 밥을 뺏거나의 시대였으니까.”
“전 그래서 교주님을 존경했습니다. 사람을 가급적 죽이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니까요. 물론 교주님이 무공이 조금만 약했으면 요즘 말로 발암 유발자였을 텐데.”
“그래도 내가 적들은 살려둔 적은 없을걸? 확실한 적이면 다 죽였는데?”
“그래서요.”
상림이 말했다.
“주청이 형님이 적이라고 생각되면 죽이십쇼. 다만, 확실한 적이라고 생각되면.”
상림은 진유성의 편에 서겠다고 말을 한 것이지만,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상림도 알고 있었다.
진유성은 이미 신주청을 죽이기로 마음먹었을 것이었다.
그가 마도사들에게 붙었다는 것은 전 인류의 영성을 착취하겠다는 것과 같으니까.
하지만 상림은 한 가지 의아함을 느꼈다.
상실의 공간에서 잃어버린 게 교주님에 대한 마음뿐이라면…….
백성들을 사랑하고 더 나은 세상을 추구하던 마음은 남아 있어야 하지 않은가?
‘교주님과 함께했던 시절에 품었던 모든 의지까지 전부 미워하게 된 걸까?’
하지만 그럴 수가 있나?
상림은 고민했지만, 답을 알 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