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202화>
* * *
봄에 가깝던 5월의 날씨가 끝이 나고, 더위가 빼꼼 고개를 내미는 6월이 다가왔다.
게이트 사태는 인류의 대부분을 망쳐 놓았다.
지금이야 20년이 지나서 문화 수준이 대부분 회복되었다지만, 당시에는 정말 처참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람들에게는 게이트 사태로 좋아진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사계절이었다.
가면 갈수록 여름과 겨울밖에 남지 않았던 한국에 봄과 가을이 길어졌다.
게이트로 인해 지구의 자연 환경이 꽤 많이 회복되었고, 친환경 에너지원이자 에너지 저장소인 마정석이 산업의 메인스트림으로 올라온 덕분이기도 했다.
“흐아아암.”
덕분에 진유성은 마지막 봄 내음을 맡으며 교실에서 하품을 했다.
역시 하품은 신기하다.
신체의 100%를 조절할 수 있는 고수라고 하더라도 방심하면 부지불식간에 입이 벌어진다.
“야, 입 찢어지겠다.”
그때, 누군가 진유성의 책상에 아이스크림을 툭 하고 던졌다.
어느덧 아이스크림 셔틀이 익숙해져, 이제는 자신이 셔틀인지 아닌지 의식조차 하지 않는 물아일체의 경지에 오른 상소윤이었다.
“이걸 거의 아트의 경지에…….”
“뭐?”
“아니다.”
“야, 진유성. 너 가끔 혼잣말하는데 그거 되게 등신 같아.”
상소윤의 타박에 진유성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수 없다. 버릇이라서.”
“그러니까 버릇을 고쳐야지. 대학교 가서도 그럴 거야?”
“너무 오랫동안 혼자 있다 보니 생긴 버릇이다. 그만큼의 시간이 흐르면 고쳐지겠지.”
1세대 수하들이 전부 죽고 그들의 아들과 손자가 진유성의 옆을 채웠을 때.
그들은 경외감 때문에 진유성에게 감히 말을 걸지 않았고, 진유성도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런 긴 시간을 견디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불쑥불쑥 말이 튀어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뭐, 나 정도 되니까 그 시간을 제정신으로 견딘 거지.’
아마 보통 사람이었으면 주화입마에 걸렸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매일매일 새로운 자극을 찾아다니는 진시황의 재림이 됐겠지.
진유성은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만, 상소윤은 아니었다.
진유성이 북한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불쑥불쑥 나올 때마다 괜히 불쌍했다.
“야, 내가 옷 사 줄까?”
“옷?”
“준비가 좀 된 거 같거든? 실험을 해 봐야겠어.”
편의점에서 늘 붙어 있기에 진유성은 상소윤이 말하는 ‘준비’가 뭔지 알고 있었다.
요즘 상소윤은 새로운 취미가 생겨서 손님들의 옷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지금은 취미의 영역이지만, 꽤 진지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진유성은 고개를 저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상소윤이 옷을 사 준다는 말은 같이 쇼핑을 하자는 말이고, 쇼핑을 하자는 말은 그를 괴롭히겠다는 소리다.
진유성은 상림과 달리, 사서 괴롭힘을 당하는 취미는 없었다.
“필요 없다. 난 옷을 잘 입는다.”
그 순간, 컥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방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진유성이 옷을 잘 입는다고?”
“……정새롬.”
수학여행 장기자랑에서 1위를 빼앗아 간 정새롬의 도발에 진유성은 금방 불타올랐다.
진유성은 4위였음에도 여전히 정새롬에게 1위를 빼앗겼다고 옹졸하게 믿고 있었다.
“야, 진유성. 너 옷 더럽게 못 입어. 교복을 입을 때랑 비교하면 거의 극과 극이야.”
“…….”
“그나마 비율이 좋아서 그 썩은 옷들이 덜 썩어 보이는 거지.”
이번엔 옆에서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던 고인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하긴. 저번에 무슨 카고 바지에 분홍색 목 폴라 입고 왔을 때 미친 줄 알았는데.”
“에이, 그건 그냥 우리 웃기려고 입고 온 거겠지.”
“아, 그런가?”
“그걸 진심으로 입은 거면 거울을 본 눈을 뽑아야 하지 않을까?”
“재능이 없는 거지. 옷을 보고 입는 재능이.”
진유성은 당황했다.
그는 옷에 별다른 관심이 없지만, 이 정도 비난을 받을 정도로 못 입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난의 강도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다들 진심인 것 같았다.
게다가 문득 스치는 몇몇 기억들.
“유성아. 그러고 나가게?”
“왜요?”
“음, 아니. 아직 날씨가 추운데…….”
종종 유혜연이 자신의 옷을 바꿔 줄 때가 있었다.
날씨를 이유로 댔지만, 막상 바꿔 주는 옷들도 두께는 거의 비슷했다.
그때는 별생각 없었는데, 왠지 유혜연의 의도가 보인다.
‘이럴 수가……?’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되어 당황하는 순간.
옆에서 엎어져서 자고 있던 지종수가 대화를 듣고 깼는지, 잠긴 목으로 입을 열었다.
“진유성이 확실히…….”
지건.
지종수가 말을 하다 말고 다시 풀썩 쓰러진다.
“뭐야? 잠꼬대야?”
“종수 어제 뭐 했냐?”
편의점의 평화를 지키던 지건으로 마음의 평화를 지킨 진유성이 상소윤을 쳐다보았다.
상소윤이 어깨를 으쓱한다.
“엄마가 몇 번을 말하더라.”
“외, 어머니가?”
“어. 네 옷 좀 같이 사 주라고.”
“흠…….”
진유성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이런 취급을 받는 건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진유성은 절대 재능 없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100여 년이 넘는 시절 그래왔던 것처럼.
‘생각해 보면 교도들은 다 나랑 비슷하게 입으려고 했던 거 같은데.’
진유성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중원에서 진유성이 입었던 의복은 그가 골랐던 것이 아니었다.
천마신교주의 의복을 만드는 황실 기구에다가 신주청의 손길이 닿아 있던 것이었다.
과정은 쏙 빼놓고 결과만 기억하는 진유성을 보았으면 상림이 어이없어 했을 것이었다.
그때 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진유성은 거의 다 먹어 가는 아이스크림을 쭉 빨아 먹고는 쓰레기통에 넣었다.
자리로 돌아오니 핸드폰에 메시지가 와 있었다.
한국행 스케줄이 잡혔다는 아놀드 벡의 메시지였다.
* * *
-한국 시간으로 금요일 오전 중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그래?”
-네. 금요일에는 청와대와 JC 관련한 일정이 있고, 우산도를 만나는 건 토요일이 되겠군요.
“좋네. 금요일에는 내가 일하느라 바빠서.”
-일이요?
“타트바의 조언을 따르고 있었지.”
-…….
아놀드 벡은 이제 진유성을 알 만큼 알기 때문에 ‘타트바의 조언’이 마법의 단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쓸데없는 일을 할 때면, 타트바가 이것저것 해 보라고 했다며 핑계를 댄다.
그것을 알기에 아놀드 벡은 더 캐묻지 않았다.
들어서 뭐 하겠는가.
마음만 답답하지.
-대외적으로도 KPM과 관련해서 팀 우산도를 만나러 가는 것이니, 만남 자체는 숨기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마스터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겠죠.
“그래.”
-이제 문제는 각성자들에게 어디까지 말하냐인데…….
진유성은 이미 아놀드 벡에게 자신이 문수혁, 차정명과 조우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설명을 아놀드 벡에게 맡겼다.
하지만 아놀드 벡도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를 꽤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적당히 둘러대자면 진유성을 사전 각성자라고 말하면 된다.
실제로도 게이트 사태가 시작되기 전에 각성한 사전 각성자들이 있었고, 정부는 그들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전 각성자들은 먼저 각성했다는 것 외에는 그리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각성은 했지만, 게이트를 통해 경험치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기본 마력 스탯을 이용해서 염동술 따위의 초능력과 비슷한 행위를 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니, 마스터를 사전 각성자라고 둘러대면 어느 정도 납득은 될 겁니다.
“뭔가 꺼림칙해 보이는데?”
-결국 거짓말이 아닙니까?
“납득시키기 위함이라며?”
-하지만 나중에 어떤 일이 벌어질 줄 모릅니다. 마도사들과 싸우다가 마스터의 정체를 각성자들이 알게 될 수도 있죠. 그럼 신뢰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겠습니까?
아놀드 벡의 말을 듣고 있던 진유성이 피식 웃었다.
확실히 이 자식은 괜찮은 놈이다.
눈앞의 쉬운 방법보다 보다 깊은 곳을 통찰한다.
“그럼 다 말해 줘.”
-그들이 믿을까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믿고 말고는 본인의 몫이지.”
아놀드 벡은 계란의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하는 진유성을 보고는 경악했다.
그리고 이건 ‘평범한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확신했다.
이는 아놀드 벡이 진유성의 강함을 이해할 수준이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팀 우산도는 그 정도 수준이 못 된다.
문수혁과 차정명을 제외하고는.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재단하고 미리 단정지어 버리는 것만큼 잔인한 일은 없다.
진유성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냥 말해 줘 버려.”
-알겠습니다. 이야기가 상당히 길어지겠군요. 마스터의 과거를 전부 이야기해야 하니까요.
“어, 생각해 보니까 그건 내가 좀 도와줄 수 있겠는데?”
-어떻게요?
이어진 진유성의 말에 아놀드 벡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런 게 있었습니까?
* * *
팀 우산도의 일원이자, 대한민국 여성 각성자들 중 가장 랭킹이 높은 유은혜는 트레이닝 센터에 있었다.
사실 각성자들은 그들의 힘을 연습할 공간이 별로 없었다.
게이트는 실전의 영역이지, 연습의 영역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높은 힘을 추구하는 각성자들은 SG가 만든 트레이닝 센터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유은혜도 마찬가지였다.
‘스킬이 발동되는 순서를 믿지 말라고 했지?’
독도 게이트에서 만났던 언노운 엠페러는 그녀에게 그런 조언을 했었다.
대부분의 각성자들은 스킬을 발동시키는 ‘감각’을 알고 있다.
말로 표현하긴 힘들지만 마력을 끌어올려서, 그것을 용광로에 넣고, 철을 뽑아내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언노운 엠페러는 그런 과정이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멈췄다고 정적인 건 아니고, 움직인다고 동적인 건 아니다…….’
트레이닝 센터에 앉아서 이런 스킬도 써 보고, 저런 스킬도 써 보며 고민하던 유은혜가 자리에서 일어난 건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렇게 자리로 돌아온 유은혜는 핸드폰에 스팸 메시지가 와 있는 걸 확인했다.
별생각 없이 스팸 메시지를 무시하려는데…….
“응?”
뒤늦게 스팸 메시지의 발신자가 문수혁이라는 걸 발견했다.
‘뭐야?’
유은혜가 핸드폰 메시지를 다시 한번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
팀 우산도 멤버만을 위한 놀라운 혜택을 경험하세요.
준비 1. URL에 접속한다.
준비 2. <지존천마>를 검색한다.
준비 3. 소설 <지존천마>의 모든 연재 분량을 읽는다.
준비 4. 독후감을 써서 추천 게시판에 올린다.
모든 과정을 끝낸 팀 우산도 멤버들에게는 엄청난 혜택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
유은혜는 꽤 심각한 표정으로 스팸 메시지를 읽었다.
메시지 내용 자체는 우습지만, 문수혁의 핸드폰이 해킹당했다는 것이 문제다.
문수혁의 핸드폰이 해킹당하면 우산도 멤버들 전원의 연락처가 넘어간다.
안 그래도 KPM이 오픈된 이후 동아시아 국가들의 견제가 심해지는데, 이는 큰 문제였다.
결국 유은혜는 차정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문수혁과 차정명이 붙어 다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잠시 뒤, 전화가 연결되었다.
수화기 너머의 차정명의 목소리는 꽤 지쳐 있었다.
-스팸 아니야.
“네?”
-스팸인지 물으려고 전화한 거잖아. 수혁이 형의 핸드폰이 해킹당했는지랑.
“스팸이 아니라고? 그럼 진짜 그걸 하라고요?”
-어.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조건이었어.
“무슨 조건이요?”
-우산도와 만나서, 가르침을 주겠다는 조건.
유은혜의 머리에 스친 것은 아놀드 벡이었다.
우산도 멤버들은 토요일에 아놀드 벡과 만날 예정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더 이상하다.
미국인이 무슨 무협지를 보라는 조건을 내건단 말인가?
“아놀드 벡이에요?”
-아놀드 벡이 내건 조건은 아닌데, 아놀드 벡도 동의한 일이지.
“그럼 누가 걸었는데요?”
유은혜는 이어지는 말에 깜짝 놀랐다.
-그 사람.
그 사람이란 단어는 진유성이란 이름을 입에 담는 대신 쓰는 우산도의 대명사였다.
“독도 게이트의……?”
-맞아.
차정명이 말했다.
-언노운 엠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