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196화>
* * *
정새롬의 생일 파티가 끝나고, 진유성은 상소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니 간만에 일찍 퇴근한 상림과 유혜연이 티비를 보고 있었다.
“엄마, 나 왔어.”
“다녀왔습니다.”
“왔어? 밥은?”
“먹었지.”
“집에 왔으면 손부터 씻어. 유성이 너도.”
“저는 손을 안 씻어도 됩니다.”
“왜?”
“세균에게서 제 몸을 지킬 수 있거든요. 상소윤만 씻고 오면 될 듯합니다.”
진유성의 말은 진실이었지만, 유혜연에게 등짝을 얻어맞고 화장실로 향해야 했다.
손을 씻고 돌아와 소파에 앉으니, 상림에게서 전음이 날아왔다.
[근데 교주님.]
[왜?]
[이제 일본 쪽 블랙마켓과는 거래를 안 하는 거죠?]
[그래야지. 김정철 쪽에 물건을 넘기기로 했으니까.]
[그럼 다음이 마지막 거래라고 통보할게요.]
[그래.]
그 뒤로 과일을 먹으며 함께 TV를 보는데, 뉴스 속보가 떠올랐다.
속보는 JC 그룹이 주관하고 한국 정부가 투자한 KPM(Korea Player Market)이 이번 달부터 오픈한다는 내용이었다.
KPM이 오픈과 동시에 자유 각성 국가인 멕시코와 헝가리에 진출한다는 소식도 있었다.
‘생각보다 빠르군.’
김정철 회장의 말로는 올해 8월쯤 오픈 예정이라고 했는데, 사정이 조금 바뀐 것 같았다.
짐작해 보건대 자유 각성국으로 발돋움하는 헝가리에 진출해 정보를 모으기 위함인 듯했다.
진유성은 그 뒤로 TV를 조금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라마, 영화, 다큐멘터리까지 좋아하는 진유성이지만, 예능 프로그램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온 진유성은 컴퓨터를 켜서 출판사 CMSG에서 날아온 원고들을 읽었다.
험상궂게 생긴 상림의 동생들 덕분에 CMSG와 계약한 작가들은 강제로 성실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덕분에 진유성은 심심할 때마다 읽을거리가 생겨서 좋았고.
그렇게 남들의 소설을 읽은 진유성은 이번에는 자신이 쓰고 있던 소설 파일을 열었다.
<지존천마>.
진유성이 이 소설을 쓴 것은 한 번쯤은 그가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진유성은 더는 글을 쓰고 있지 않았다.
소설 상에서 주인공은 고려에서 도망쳐 명나라로 왔고, 노예상에게 팔려서 멸마대에 입단을 한 시점이었다.
진유성이 여기에서부터 글을 쓰지 못한 것은 멸마대에 대해 서술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사람의 이름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바로, 신주청이었다.
멸마대에 팔려온 이들 대부분은 혼란한 시대에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었지만, 신주청은 아니었다.
그는 하남신가라는 명문가의 자손이었다.
그런 그가 멸마대까지 흘러 들어온 것은 사생아라는 신분 때문이었다.
신주청은 아버지가 죽는 순간 이복형들의 살의에 노출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신주청이 너무나 뛰어난 무재를 타고난 탓이었다.
사생아가 가문의 무공을 대성하는 걸 지켜볼 수 없기에 형들은 그를 죽이려 했고, 신주청은 도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도망은 대담했다.
‘주청이도 난놈이었지.’
신주청은 심산유곡으로 도망치지 않고, 정도맹으로 도망쳤다.
마교주를 죽이기 위핸 사냥개를 자청해 힘을 기르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정도맹은 신주청을 멸마대주로 내정해 놓은 상황이었다.
진유성이란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신주청이 멸마대주였다.
아무튼 진유성은 이러한 신주청의 복잡한 사정들을 전부 알고 있었다.
생존대를 죽이기 위해 열정적으로 추격하던 이들 중에 하남신가가 있다는 것도 알았고.
천마신교가 중원을 통일한 다음에 신주청이 그의 이복형들에게 복수를 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못 쓰겠군.’
차마 소설 속의 신주청을 묘사할 수가 없었다.
신주청이 계속해서 마도사들과 한 배를 탄다면, 진유성은 신주청을 죽일 수밖에 없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미 마음을 먹었다.
그런 신주청과의 추억을 그리는 건 스스로의 결의를 무디게 만드는 일이자, 신주청을 조롱하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진유성은 잠시 고민하다가 모든 소설 파일을 지웠다.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고려의 이야기를 쓰면서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많이 떠올랐으니까.
그 안에는 부모님과의 추억도 있었고.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며 상림이 진유성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교주님, 바쁘십니까?”
“아니, 왜?”
“블랙마켓 때문에요.”
진유성은 문득 상림과 신주청이 만나면 어떻게 될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신주청의 분노는 자신에게 향해 있다.
어쩌면 두 사람은 생각보다 별다른 문제없이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상림도 신주청과 싸워야한다.
신주청이 마도사들의 편에 있다는 것은 전 인류를 죽이겠다는 것과 같다.
설령 상림의 가족은 죽이지 않겠다고 타협해도 마찬 가지다.
모든 사람이 죽어가는 와중에 그들만 살아 있다고 살아가는 게 아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냐, 근데 블랙마켓이 뭐?”
“아뇨. 블랙마켓에 약속한 마정석과 아이템을 그대로 넘기실 건지가 궁금해서요.”
“약속했잖아?”
“KPM에 넘기면 두 배는 더 벌지 않겠습니까?”
블랙마켓은 정상적인 마켓에 비해 물건 값을 싸게 매기는데, 이는 물건을 세탁하는 비용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진유성에게는 한국 각성 마켓이라는 선택지가 생겼다.
KPM에 넘기면 블랙마켓에 넘겨받는 금액의 두 배는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진유성은 고개를 저었다.
“달 때는 삼키더니 쓰다고 뱉을 수 없는 노릇 아니냐? 사람이 신의가 있지.”
그동안 블랙마켓은 진유성의 물건을 성실히 구매해 주었다.
서로 좋자고 하는 거래였지만, 마지막 한 번 남았는데 안 좋게 끝낼 이유가 없었다.
진유성의 말에 상림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가만 보면 억울하다.
남들한테는 신의도 베풀고, 인정도 베푸는데 왜 자신만 괴롭힌단 말인가.
“뭔 생각하는지 다 보인다?”
“예? 아닌데요. 아무 생각도 안 했는데요?”
“머리카락이 좀 많은 것 같네.”
상림이 황급히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아, 근데 교주님. 진짜로 편의점 아르바이트 하실 거예요?”
“왜? 자리 생겼냐?”
“연락이 오긴 했는데……. 교주님은 서비스직이랑 안 맞지 않을까요?”
“왜?”
“서비스 정신이 없으시잖아요.”
“어허, 무엄하도다. 본 교주가 세상에 못하는 건 없다.”
“있어요. 친절, 봉사.”
상림의 말에 진유성이 눈을 부라리며 손을 까딱거렸다.
한 마디만 더하면 한 대 맞는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상림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솔직히 교주님, 존댓말도 간신히 하잖아요?”
상림이 꼬투리를 잡는 것은 진유성이 아르바이트를 못하게 만들려는 건 아니었다.
진유성은 하고자 마음을 먹으면 어떻게든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차라리 자신이 아는 곳에서 하는 게 낫다.
그래야 사고를 쳤을 때도 수습도 가능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림이 진유성을 도발하는 것은, 진유성이 사고를 치지 않도록 수를 쓰는 것이었다.
계속 도발하다 보면…….
“이 자식이? 너 내가 얌전히 일하면 어쩔래?”
이런 말이 나온다.
“얌전히의 기준이 뭔데요? 손님 때리지 않고, 싸우지 않고?”
“오냐.”
“내기하시죠. 얼마 걸까요?”
결국 진유성과 상림은 500만 원짜리 내기를 성사시켰다.
하지만 상림은 알고 있었다.
이 돈은 어느 쪽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일단 진유성이 사고를 치지 않을 리가 없다.
편의점에 진상이 얼마나 많은데, 진유성이 참는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내기에 이겨 500만 원을 받을 수 있냐면, 그것도 아니다.
진유성은 분명 어떤 협박을 해서라도 내기를 무효로 만들 위인이다.
즉, 이 내기는 진유성이 칠 사고를 최소화하는 안전장치였다.
진유성의 행동 패턴을 완벽히 파악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일.
이것이 아메리칸 상림도, 보급형 상림 1, 2도 할 수 없는 오리지널의 위엄이었다.
“얼마나 일하면 되냐?”
“6시부터 10시까지만 하면 돼요.”
“4시간밖에 안 해?”
“네. 낮에는 주인이 가게를 보고, 야간에는 야간 알바가 보니까요. 그사이 잠깐이에요.”
“좋다.”
“언제부터 하실래요?”
“내일부터 하지, 뭐.”
“아내한테는 제가 말해 놓을게요.”
진유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상림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으니, 괜히 방에서 어물쩍거릴 필요가 없었다.
어물쩍거리다가는 ‘생각해 보니까 건방지다’라는 말과 함께 뒤통수를 맞을…….
딱!
“아! 왜 때려요!”
“생각해 보니까 좀 건방진 것 같아서.”
역시 예감은 빗나가질 않는다.
뒤통수를 어루만진 상림이 거실로 내려가서 유혜연에게 내일부터 진유성이 알바를 할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유혜연의 시선이 상소윤에게 향했다.
“편의점 카운터면 둘이 해도 되는 거 아닌가?”
“아, 싫어!”
불안함을 느낀 상소윤이 펄쩍 뛰었지만, 유혜연의 뜻을 막을 수는 없었다.
“너도 돈 귀한 줄 알아야 해.”
“이미 알아!”
“알긴 뭘 알아. 유성이랑 같이 일 좀 해.”
“아, 그럼 알바비가 반으로 줄잖아!”
“혼자 일해서 받는 것만큼 엄마가 채워 줄게.”
“아니, 엄마는 딸의 뛰어난 외모에 대해서 자각할 필요가 있다니까? 내가 편의점 알바를 하면 어떻게 될 거 같아?”
“어떻게 되는데?”
“경국지색 알지? 나라를 무너트리는 미모? 난 편국지색이지. 편의점을 무너트린다고.”
유혜연이 기가 찬 듯이 코웃음을 치자, 불안해진 상소윤이 다급히 덧붙였다.
“사람들이 얼마나 귀찮게 하겠어? 심지어 위험할 수도 있다니까? 내 얼굴이 그래요.”
“옆에 유성이 있잖아.”
“진유성이 뭘 해 주겠어?”
“위험한 놈들을 두들겨 패 주겠지?”
“…….”
할 말이 없었다.
진유성이 감당 못할 사람은 국정원 요원밖에 없을 거니까.
“아, 싫어!”
“이번 달 용돈 없다.”
“수험생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공부도 안 하는 게.”
상소윤은 일하기 싫어서 버둥거렸지만, 결국 유혜연의 협박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진유성과 상소윤의 아르바이트가 결정되었다.
* * *
“친구랑 같이 한다고?”
“네.”
“친구는 언제 오는데?”
“곧 오겠죠.”
진유성의 심드렁한 반응에 편의점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상림 대표의 부탁으로 아르바이트를 채용했는데,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
상림 대표의 말에 따르면 공사장에서 어렵게 일하는 고등학생이라고 했다.
집안 사정이 안 좋은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평일 아르바이트를 주선한 거라고 했고.
본래 편의점주는 야간이 아닌 경우 여자 알바생을 쓰는데, 상림의 부탁이라서 거절하기도 애매했다.
상림 대표가 이 건물의 건물주였으니까.
‘확 쫓아내 버려?’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뭔가 실수라도 하면 모를까, 그냥 쫓아내기는 좀 그렇다.
그렇게 점주가 마뜩찮은 표정을 짓고 있는데, 편의점의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손님에게 인사를 하고 시선을 돌린 편의점주는 깜짝 놀랐다.
그가 실제로 본 사람들 중 가장 예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상소윤이었다.
“왔느냐.”
“왔도다.”
편의점주는 마음에 안 들었던 알바생과 여학생이 대화를 나누는 걸 보고 혹시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혹시, 같이 한다던 친구가……?”
“네.”
편의점주가 활짝 웃었다.
그렇게 짧은 교육 시간 뒤로 일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