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193화>
* * *
상림이 과거의 자신을 보는 듯한 문수혁과 차정명에게 X를 눌러 조이를 표하는 사이, 진유성은 잠시 멈췄던 구타…….
‘아니, 훈련.’
훈련을 재개했다.
사실 진유성이 마구잡이로 이들을 패는 것 같아도 그게 아니었다.
추궁과혈과 비슷한 것을 해 주는 것이었다.
물론 각성자들은 기경팔맥을 통해 단전에 기를 모으지 않는다.
당연히 상림에게 해주는 것처럼 벌모세수라던지 추궁과혈이 통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들 역시 기를 이용하는 이들이다.
단지 기의 원천이 대자연이 아니고, 그 기를 단전에 모은 게 아닐 뿐이다.
즉, 축기(畜氣 : 기를 모으다)의 방법은 다르지만, 기를 쓰는 방법 자체는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마력이 흐르는 길을 원활하게 만들어 주는 것 자체로 이들의 마력 효율성은 크게 향상된다.
하지만…….
‘역시 안 되는군.’
진유성이 입맛을 다셨다.
그럴 것 같긴 했지만, 역시 각성자들은 독립적으로 자생할 수 없다.
각성자들은 모르겠지만, 그들은 게이트 시스템에 연결된 단말 기계다.
단말은 결국 중앙 시스템에 종속되어 데이터를 사용한다.
중앙 시스템에 연결되지 않으면 무용하다.
각성자란 단말.
게이트 시스템이란 중앙 시스템.
마력이라는 데이터.
결국 각성자들이 인외의 힘을 뽐내기 위해서는 단말이 연결된 상태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금 더 쉽게 말하자면 온라인 게임의 캐릭터라고도 말할 수 있었다.
게임 속 캐릭터가 얼마나 강하든, 게임 운영이 종료되는 순간 캐릭터는 무용지물이 되니까.
이렇게만 따지면 얼핏 마도사들이 힘의 총량에서 손해 보는 일을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종의 기운을 연결시켜서 그들을 각성시켰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단말 연결이 이중 계약이라는 것에 있었다.
계약서 앞장에는 ‘마력’이란 단어가 적혀 있지만, 뒷장에는 ‘영성’이란 단어가 적혀 있다.
각성자들이 죽으면 그들이 품은 영성은 필터 몬스터에게 전달되니까.
필터 몬스터를 통해 영성에 섞여있는 ‘자아’를 걸러내면 마도사들이 원하는 신성의 토대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마도사들은 지구의 전 인류를 죽이는 건 정해진 수순이라는 것이었다.
모든 인간의 영성을 흡수하겠다는 말은 그들을 죽이겠다는 말이니 말이었다.
지금이야 아카식 레코드를 오염시키는 단계이기 때문에 각성자들에게 친절을 베푼다.
각성은 무섭지 않고, 게이트는 두려울 때도 있지만 슬기롭게 극복하면 부와 명예를 준다.
고위급 게이트가 등장해 가끔 긴장감을 주지만, 게이트의 80% 이상이 E, F급이다.
정신만 제대로 차리고 있으면 각성자로 살아가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아카식 레코드를 마침내 완전히 오염시키면?
마도사들은 더는 당근을 내밀 이유가 없어진다.
인류의 영성을 착취하기 위해 채찍을 내밀겠지.
진유성은 그때가 머지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각성 상태의 아이들이 태어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쩌면 마도사들이 신중한 것일 뿐, 아카식 레코드는 이미 완전히 오염됐을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각성자들을 마도사의 사악한 술수에 놀아나서 현생 인류를 위협하는 첨병(尖兵)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유성이 아놀드 벡과 한국의 각성자들을 도와주는 이유는 있었다.
마도사들이 아카식 레코드를 오염시킨다고 해서, 아카식 레코드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아카식 레코드는 말 그대로 아카샤가 관찰한 것들을 기록해 놓은 것뿐이다.
땅을 기록하던 카메라를 바다 속에 넣어서 바다를 기록하게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바다 속 자체를 조종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러니 각성자들이 힘을 모아서 마도사들과 대적할 수도 있다.
‘뭐, 솔직히 내가 없으면 어림도 없을 것 같긴 하지만…….’
진유성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순간이었다.
“그만 하십쇼!”
어느새 아혈이 풀렸는지 문수혁이 벌컥 소리를 질렀다.
물론 스스로 푼 건 아니었고, 진유성이 풀어 준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진유성을 노려보았다.
“거 지나치신 거 아닙니까!”
“내가 중구 형 역할이야?”
“네?”
“영화 따라한 거 아니야?”
“뭐라는 겁니까!”
문수혁과 차정명이 꽤 날카로운 눈으로 진유성을 노려보았다.
그 모습을 보던 상림이 내심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문수혁과 차정명이 왜 저러는지 알고 있다.
일견 보면 진유성의 행동이 지나치니까.
진유성이 왜 저들을 혼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리 대단한 이유는 아닐 것이었다.
대단히 혼날 짓을 했으면 진유성은 오히려 혼내지 않는다.
기회를 줄 때는 완전히 믿는다.
탓도 하지 않고, 책을 잡지 않는다.
상림 때문에 생존대의 위치가 발각됐을 때도 그러했듯이.
반대로, 엄히 혼내야하면 확실한 기준을 세운다.
감정에 따라 질책하는 게 아니라, 확실한 기준을 두고 모두에게 각인시키고 혼을 낸다.
그 체벌이 아무리 가혹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 가혹함 속에 일말의 연민을 두는 게 진유성이다.
‘참, 그때는 멋있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멸마대와 생존대 시절의 진유성은 완전무결한 리더였다.
아니, 마교의 잔당을 흡수하고 천마신교를 세운 초창기까지도 그러했다.
대명제국의 일인자가 되고서는 완전히 맛탱이가 갔지만.
아무튼 문수혁과 차정명의 생각은 이러할 것이었다.
대단히 잘못한 것도 아닌데, 가혹하게 혼을 내는 게 아닌가.
또한 그들의 반항(?)이 정당하다고 믿을 것이고.
상림이라고 왜 안 그랬겠는가.
하지만 그건 진유성의 함정이다.
“내가 너무하다고?”
“저희가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수도 있다는 거,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게 저희가 맞을 이유가 되진 않습니다.”
“맞아? 누가 맞아?”
“방금 저희를 때렸지 않습니까!”
“무슨 소리야. 내가 너희를 이유 없이 때리겠냐?”
진유성의 태연한 목소리에 문수혁과 차정명이 멈칫했다.
그러나 멈칫은 짧았다.
누가 봐도 진유성의 행동은 명백했으니까.
“그럼 방금 그건 뭡니까?”
“흐음……. 마력을 끌어올려서 아무 초식이나 써 봐라.”
“예?”
“제일 자주 쓴 초식, 아니 스킬이지? 스킬을 써 보던가.”
진유성의 말에 문수혁과 차정명이 무슨 소리냐는 듯 스킬을 사용했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이 무슨……!”
문수혁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스킬은 대일여래의 금강이었다.
이는 본래 진유성이 부숴 버린 아이템 이지스의 방패의 고유 스킬이었다.
그러나 문수혁은 스킬을 사용하다가 그것을 신체에 사용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는 곧 그의 최고의 공격 스킬이자 방어 스킬이 되었다.
너무나 많이 사용한 스킬이기 때문에 마력이 올라오는 느낌과 발동되는 느낌을 명확히 알고 있다.
한데…….
너무 빠르고, 도도하다.
본래 마력이 흐르는 길이 좁지도 넓지도 않은 애매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대로가 되었다.
마력의 흐름과 스킬 충당량이 1.5배는 빨라진 기분이다.
그만큼 마력이 빨리 닳긴 하지만, 그건 문제가 안 된다.
마력 소모량만큼 단단해졌다는 것을 뜻하니까.
놀람은 문수혁뿐만이 아니라, 차정명도 공유했다.
그도 주력 스킬을 사용해본 것이었다.
“결국 모든 기운은 양에서 음으로 흐르고, 고에서 저로 흐르기 마련이다.”
진유성이 말을 이었다.
“한데 너희들은 몸에는 탁기가 끼어서 애매하게 양강(陽剛)했고, 제어하지 못하는 기운이 많아서 애매하게 고위(高位)했다.”
“그거랑 때린 거랑…….”
“때린 게 아니라. 탁기를 없앤 것이며, 제어하지 못하는 기운을 날려 버린 것이다. 마력은 시간에 따라 충전 되냐?”
“그, 마력 재생량에 비례합니다.”
“그럼 모든 마력이 재생되기 전에 비어 있는 지금의 상태를 관조하는 게 좋을걸?”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상림은 역시나라는 표정을 지었다.
보통 이 정도 오면 열에 절반 정도는 진유성이 정말로 자신을 위해서 때렸다고 오해한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좀 더 객관적으로 파고든다.
“하지만, 분명 화가 난 상태 아니었습니까?”
“반대다. 너희들의 화를 돋우기 위해서 연기를 한 거다.”
“예?”
“사람이 화가 나면 어떻게 될 것 같냐?”
“그, 글쎄요?”
“기가 끓는다. 흔히 말하는 울화병의 울혈을 중심으로 탁기와 양기가 모여든다. 좋은 기운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몸에 좋진 않지.”
진유성이 이것이 스트레스의 근원이라는 말을 덧붙이고는 말했다.
“울혈을 자극시킨 다음에 탁기와 잡기를 한 번에 날린 것이다.”
“그…….”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너희를 가짜로 도발하고 있다는 걸 들키면 무용한 일이니.”
진유성의 말에 문수혁과 차정명의 얼굴에 미안함이 어렸다.
덤덤하게 말을 잇는 진유성의 표정에서 진심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는 보급형의 오해였다.
오리지널은 진유성의 습관을 명확히 알고 있는데, 진유성은 그럴 듯한 이유를 가져다 붙일 때면 일부러 있어 보이는 말을 쓴다.
양강이니, 고위니, 무용이니.
저런 말은 평소에 잘 안 쓴다.
하지만 이 같은 진유성의 언행은 확실히 효과가 있다.
“그, 죄송합니다.”
“저희가 오해했습니다.”
이제 다음 단계는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 것이다.
진유성의 간장 종지보다 작은 그릇에 삐짐이 찰 때마다 저 둘은 갈굼을 먹는다.
그리고 처음에는 몇 번 반항한다.
하지만 알고 보니 진유성에게 그럴 듯한 이유가 있어서 사과를 하게 된다.
그 다음에는 갈굼을 먹어도 ‘뭔가 이유가 있겠지.’란 생각이 절로 떠오른다.
그렇게 길들여지는 것이다.
문수혁과 차정명의 사과를 받아준 진유성이 상림에게 손짓했다.
그제야 문수혁과 차정명이 상림에게 주목했다.
정신없을 때 상가로 들어온 언노운 엠페러의 지인인 것 같은데, 험상궂게 생겼다.
키도 크고, 어깨도 떡 벌어진 데다가 이목구비가 부리부리했다.
못생긴 건 아니지만, 일반인들이 보기엔 꽤 무섭게 생긴 인상이다.
‘대머리였으면 딱 중국 깡패 느낌인데.’
대머리가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머리가 굉장히 풍성하다.
차정명이 그런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이 분은 누구십니까?”
“선배.”
“언노운 엠페러의 선배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너네 선배라고.”
진유성이 상림에게 손을 까딱하자, 상림이 다가왔다.
“근데 진짜 저는 왜 부르신 겁니까?”
“어차피 이야기 들을 거면 직접 보는 게 낫잖아.”
진유성은 상림에게 대부분의 이야기를 공유한다.
이는 신뢰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무슨 일이 발생하면 상림에게 뒤처리를 맡기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리고 JC 그룹이랑 마켓 만들 때 얘들도 같이 하잖아?”
JC 그룹의 김정철 회장이 각성 마켓을 만들기로 결심한 계기는 진유성의 정체를 알아서였다.
하지만 그 전에 아놀드 벡과 팀 우산도가 서포트를 약속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왕 그렇게 되면 서로 알면 편하지.”
“그렇군요.”
상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편하다는 건 상림이 편하다는 게 아니라, 지가 편하다는 것이었다.
상림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으면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러나 상림은 진유성의 뜻을 알면서도 꽤 만족스러웠다.
그는 LF 건설사를 운영하는 대표다.
그리고 LF 건설의 주요 업무는 게이트 재해 복구 사업이다.
대한민국에서 한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각성자들을 알아 둬서 나쁠 게 없다.
“그리고 겸사겸사 싸우는 법 좀 가르쳐 줘. 너무 약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