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186화>
“안녕하세요!”
퍼스널 컬러 멤버들이 인사를 건네자 학생들, 특히 남학생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돈이 많고 적고를 떠나서 그들은 사춘기의 고등학생들이다.
연예인에 대한 환상은 없어도, 이성에 대한 환상은 있다.
게다가 퍼스널 컬러는 멤버 전원이 비주얼 라인으로 불리는 그룹.
좋아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남학생들의 얼굴이 헤벌쭉해졌을 때, 퍼스널 컬러의 리더가 입을 열었다.
“저희가 뮤직비디오를 찍는데, 여러분이 축구하는 모습이 조금 잡혔거든요. 막 얼굴이 나온 건 아니고, 그냥 멀리서 실루엣만.”
“회사 방침상 실루엣에 출연료를 드릴 수는 없지만, 음료수는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체육 시간이었죠? 더운데 이것 좀 드세요!”
연예인들이라서 그런지, 말을 맞춘 것도 아닌데 멘트가 딱딱 맞아떨어졌다.
퍼스널 컬러의 말이 끝나자 MK 엔터테인먼트의 스태프들이 가져온 음료수를 퍼스널 컬러 멤버들이 직접 나눠주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첫 시작은 지종수였다.
눈앞으로 다가온 퍼스널 컬러의 리더를 보며 헤벌쭉한 표정을 짓고 있던 지종수가 흠칫 놀랐다.
축구가 가져다준 슬픔 때문에 미처 모르고 있었는데, 저 옆에 상소윤이 있었다.
게다가 상소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 어쩌지?’
눈앞에는 퍼스널 컬러의 리더가 웃으며 음료수를 건네주고 있고, 멀지 않은 곳에는 상소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이 음료수를 받으면 자신의 일편단심이 훼손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받지 않기도 그렇다.
이렇게 웃는 얼굴로 음료수를 건네주는데 그걸 거부하는 건 쉽지 않다.
지종수가 헤벌쭉한 채로 인상을 쓰는 묘한 얼굴을 짓자, 퍼스널 컬러의 리더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 남자, 얼굴이 이상하다.
“저기, 어디 아프세요?”
“네?”
“아뇨. 그…….”
얼굴이 이상하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는지, 리더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 순간 지종수가 음료수를 받았다.
그리곤 호쾌하게 캔을 따더니, 단숨에 절반을 마셨다.
“절반만 마시겠습니다.”
“네?”
“나머지 절반은…… 쓸 수 없는 마음입니다.”
“그, 왜요?”
“그녀를 위해 아껴 두어야 하니까요.”
“…….”
연예인은 굉장한 인내심이 필요한 직업이었다.
이 상황에서도 욕을 할 수 없었으니까.
리더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지종수는 문득 옆을 보았다.
상소윤과 진유성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한데, 어딘지 상소윤의 표정이 마뜩치 않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
‘설마……? 소윤이가 질투를 하는 건가?’
지종수도 드라마에서 봤다.
일편단심으로 쫓아다니던 남자가 갑자기 다른 이성과 얽히기 시작하면 질투 하는 여자 캐릭터를.
그저 드라마의 과장된 연출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진짜였어?!’
지종수의 머릿속에 폭죽이 터졌다.
드디어 상소윤의 마음을 얻을 방법을 알게 된 것이었다.
약 3초 동안 상소윤과 자신 사이의 손자 이름까지 지어 주고 온 지종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진유성이 자신을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저 미친놈은?’
축구를 하는 내내 괴롭힘을 당해서 진유성만 봐도 몸서리가 쳐지는데, 눈빛도 묘하다.
‘서, 설마?’
진유성도 날 질투하는 건가?
그럼 날 괴롭힌 게……?
지종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종수는 상상은 쓸데없는 것이었지만, 진유성이 지종수를 쳐다보고 있던 건 사실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약간 감탄하고 있었다.
지종수의 멘트가 너무 멋있어서였다.
‘절반은 그녀를 위해 아껴 둔다고?’
수많은 드라마를 섭렵했지만, 저토록 멋진 대사는 없었다.
시켜 줘, 명예 소방관이 그나마 저 대사에 비벼 볼 정도이다.
‘굉장하군, 지종수.’
진유성이 가슴 깊이 지종수를 인정하며 뜨거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는 복수를 조금 더 이어갈 생각이었는데, 너무 멋진 대사를 들려 줬으니 한 번 봐줘야겠다.
그러자 옆에 있던 상소윤이 한심한 듯 혀를 찼다.
“뭐야, 관심 없다며?”
“뭔 소리냐.”
“아주 그냥 좋아 죽네?”
“흠. 좋은 대사긴 했다.”
“대사?”
“못 들었느냐? 저 가슴이 웅장해지는 대사를?”
“뭔 소리야?”
서로 다른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니 대화가 겉돌았다.
그때였다.
퍼스널 컬러의 막내가 진유성과 상소윤 앞으로 다가온 것이.
막내는 진유성을 보며 눈을 빛냈다.
아무래도 팀장님이 말했던 학생이 이 남자인 것 같다.
음료수를 사오기 직전, 팀장님은 이 중 한 명에게 명함을 주고 싶다고 했다.
캐스팅 디렉터들이야 좀 괜찮다싶은 이들에게 명함을 남발하지만, 팀장급쯤 되면 명함의 무게가 다르다.
팀장급이 명함을 줬다는 것은 그 순간 데뷔가 50% 쯤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회사는 사정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팀장급의 실권이 강한 MK 엔터테인먼트는 그러했다.
“명함을 주고 싶으시면 그냥 주면 되는 거 아니에요?”
“얘들아. 여기 대정고야. 우리 대표님이 벌어들이는 돈만큼 버는 집의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라고.”
“아, 대표님 아들도 대정고 다닌다고 했죠?”
“그래. 돈이나 성공으로는 꼬실 수가 없다니까.”
“그럼 뭘로 꼬시게요?”
“호기심.”
고학력자 연예인들 중에는 이런 경우가 많다.
탄탄대로의 인생을 걷고 있다가 호기심에 연예계에 들어선 이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이들이 아득바득 노력하는 사람들보다 더 잘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퍼스널 컬러의 막내가 오늘 부여받은 역할을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이었다.
“어떻게 호기심을 자극해요?”
“칭찬해. 연예인이 될 인상이라고 바람 좀 넣어 봐. 내가 하는 거랑 현직 브랜드 가치 1위 걸그룹 멤버가 하는 거랑은 좀 다르잖아?”
“처음 본 사람한테 칭찬을 하라고요?”
“새삼스럽게 왜 이래? 처음 본 스타일리스트랑 사우나도 가는 주제에?”
“남자랑 여자는 다르죠.”
“뭐가 다른데?”
“잘생겼어요?”
“아마.”
“못 생겼으면 난 못해.”
막내는 그렇게 선언했지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앞의 남자가 잘생겼기 때문이었다.
막 꽃미남처럼 화려하게 생긴 건 아니지만, 어디서 가서 빠지는 외모는 절대 아니다.
아니, 전혀 꾸미지 않아서 그렇지 꾸미면 꽤 멋질 것 같았다.
‘근데…….’
막내는 자신의 시선이 자꾸만 옆으로 향하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남학생도 상당히 잘생겼는데, 그 옆에 있는 여학생은 눈이 돌아갈 정도로 예뻤다.
연예인 동료 중에서도 이 정도 미모는 손에 꼽는다.
기초 화장으로 이 정도인데, 방송 메이크업을 받으면 어느 정도일까?
‘아니, 둘 다 재벌 2세 맞아? 얼굴 재벌 아니고?’
막내는 그런 생각을 했지만, 일단은 성실히 팀장의 부탁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음료수 좀 드세요.”
“음.”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진유성.”
“어, 진 씨에요? 저희 고모부가 진 씨인데. 어디 진 씨에요?”
“……개성 진씨.”
“어머, 저희 고모부도 개성 진 씨인데.”
막내의 말에 진유성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 세계의 고려 왕가는 왕씨였고, 본관은 개성 왕씨였다.
그러나 진유성이 살던 세계에서의 고려 왕가는 진씨였고, 본관은 개성 진씨였다.
당연히 이 세계에는 개성 진씨가 없다.
그런데 이 계집아이의 고모부가 개성 진씨라고?
그렇다는 건 둘 중 하나였다.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하나는 중원에서 건너온 그의 조상이거나.
진유성이 고려 진씨의 마지막 혈족이니, 후손일 수는 없다.
진유성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고모부의 이름이 뭐지?”
“네?”
“이름이 뭐냐고.”
“어, 그게……. 잘 모르겠어요.”
“고모부의 이름을 모른다고?”
“아, 생각해보니까 개성 진씨가 아니었던 것 같네요! 제가 착각했어요!”
억지로 공통분모를 만들어 대화를 이어 가려던 퍼스널 컬러의 막내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시시콜콜 캐물을 줄 몰랐다.
그사이, 상소윤은 옆에서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선을 보는 것처럼 처음 보자마자 본관을 탐색하고 있다니.
그때 다시 퍼스널 컬러의 막내가 입을 열었다.
“혹시 연예인 해 보라는 소리는 못 들어 봤어요?”
“못 들어 봤다.”
“진짜요? 완전 카메라 앞에 서면 장난 아닐 것 같은데.”
“관심 없다.”
“아니, 근데 생각해 보니까 반말을 하시네요?”
반말이 기분 나쁘단 식의 말투는 아니었다.
오히려 친하게 지내 보자는 뉘앙스가 느껴졌다.
물론 막내가 진유성에게 호감을 느꼈다거나, 실제로 친하게 지내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런 상황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것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팀장의 요구로 하고 있는 비즈니스였다.
팀장님은 진유성이란 남자애가 명함을 들고 회사로 오면, 그녀의 스케줄을 하루 빼 준다고 했으니까.
“고등학생 아니에요? 난 스무 살인데?”
막내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진유성은 입을 꾹 다물었다.
상소윤보다도 어려 보이는 계집아이에게 도저히 존대를 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진유성이 입을 다물자 오해한 퍼스널 컬러의 막내가 웃으며 다가왔다.
“뭐야, 혼내는 거 아닌데?”
그 순간, 진유성이 딱 다가온 만큼 물러났다.
“음?”
진유성이 물러나자 막내가 다시 다가왔고, 진유성은 다시 물러났다.
묘한 광경이었다.
퍼스널 컬러의 막내는 슬금슬금 다가오고, 진유성은 슬금슬금 물러나는 것이.
“왜 도망가요?”
막내의 물음에 진유성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초면에 음료수를 받아서 예의를 갖추려고 했건만, 말만 한 계집아이가 말이 너무 많다.
게다가 귀찮게 군다.
“다가오지 마라.”
“왜요?”
“박색함이 옮을까 두렵다.”
“박색? 내가 아는 박색?”
“박색도, 빢쌖도 넘어섰구나.”
진유성은 마땅한 단어를 떠올렸다.
“뺚썎.”
모음까지 겹쳐 버릴 정도의 박색함이었다.
슬림한 귀염상의 막내는 진유성이 보기엔 거의 걸어 다니는 목내이에 가까웠다.
“…….”
막내가 충격을 받는 사이 상소윤은 왠지 모를 짜릿함을 느끼고 있었다.
요즘은 듣지 않으면 허전해진 진유성의 ‘박색하구나’가 꽤 감미롭다.
‘근데 왜 감미롭지?’
상소윤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진유성이 눈이 맛탱이가 갔다는 것이 증명돼서 감미로운 것 같다.
대한민국의 모든 남자들이 열광하는 퍼스널 컬러의 막내를 보고는 진심으로 박색하다고 말하는 걸 보니.
역시 진유성의 눈이 이상한 거다.
‘내가 박색한 게 아니란 게 증명된 거지.’
상소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론, 상소윤이 기분이 좋은 건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긴 했다.
그때, 저 멀리서 막내와 진유성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팀장이 명함을 챙겨들고는 나섰다.
대화도 어느 정도 진행된 것 같으니, 명함을 건네줄 차례다.
그렇게 진유성에게 다가오던 MK 엔터테인먼트 팀장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이게 도대체……?’
진유성이란 학생은 번쩍번쩍 빛나는 금괴였다.
한데, 그 옆에 다이아몬드가 있었다.
가공되지 않은 원석도 아니고, 진흙 속의 진주도 아니었다.
그냥 만천하에 빛을 환하게 뽐내고 있는 보석이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까지 캐스팅 디렉터들에게 명함을 백 장은 받았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장은 홀린 듯이 명함을 빼들었다.
그리곤 진유성과 상소윤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 * *
교실로 돌아온 상소윤이 운동장에서 받은 명함을 살펴보았다.
MK 엔터테인먼트.
그녀도 알고 있는 유명한 회사였고, 평판이 꽤 좋은 걸로 알고 있었다.
물론 상소윤은 지금껏 이보다 더 큰 회사에서도 명함을 많이 받아왔다.
한데, 평소랑 마음이 좀 다르다.
아마도 그녀가 수능을 앞둔 고3이기 때문인 것 같다.
고2때까지만 해도 연예인은 무슨 연예인이냐고 코웃음을 쳤는데, 아무래도 진로가 걱정된다.
그녀는 공부도 잘 못하고,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었으니까.
‘으음…….’
상소윤이 명함을 보며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반 전체가 시끌시끌해지기 시작했다.
또 어딘가 게이트가 열려나 싶었는데, 그런 건 아니었다.
다들 핸드폰이 아닌, 창문 밖을 보고 있었으니까.
“야, 저거 SG 맞지?”
“맞는데?”
“SG가 왜 대정고에 와?”
“몰라? 뭐지?”
학생들의 호기심은 곧 풀렸다.
대정고에 도착한 SG의 직원들이 학년 교감실에 들렀다가, 곧장 3학년 1반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