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183화>
* * *
고등학생들의 아침은 바쁘다.
잠이 부족한 상태로 일어나 아침을 먹고, 씻고, 등교를 하고.
대정고는 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등교 시간이 9시까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쁜 건 틀림없었다.
“약속이란 게 아주 중요한 거거든.”
하지만 아무래도 가장 바쁜 건 상소윤의 입인 것 같다.
택시를 탄 순간부터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나불대는 것 같았으니까.
“아빠의 일은 자주 있는 일이잖아? 다음 주도 있고, 다다음 주도 있고.”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게냐?”
“네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걸 지적하고 싶은 거지.”
본래 진유성은 지난 주말에 상소윤과 함께 보육원에 갔어야 했다.
두 사람은 봉사 활동을 한 이후 한 달에 한 번씩은 보육원을 가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그게 이틀 전인 토요일이었다.
하지만 진유성은 엔리케 카를로가 입멸검을 가지고 자신을 부른다고 생각해 멕시코로 향했던 거고.
혼자 보육원에 다녀온 상소윤은 생색을 내고 싶은 건지, 비난을 하고 싶은 건지 아침부터 말이 참 많았다.
“보육원에는 별일 없었느냐?”
“어, 별일 없었어. 아, 어떤 신원 미상의 기부자가 마정석을 보내 줬다고 좋아하던데?”
“그래?”
“응. 보육원 애들 중에도 모태 각성자가 있다고 하더라고.”
본래 각성자들이 오랫동안 경험치를 얻지 못하면 고통을 느낀다는 건 기밀이었다.
알음알음 소문이 돌긴 했지만, SG는 늘 신빙성이 없는 찌라시처럼 느껴지도록 손을 썼다.
그러나 모태 각성자들의 등장이 정책을 바꿔 놓았다.
SG는 장시간 경험치 미획득에 따른 각성 고통을 인정했고, 치료제로 마정석을 언급했다.
최근에 발견된 질병이라고 눈 가리고 아웅을 하긴 했지만, 각성 질병을 공식적인 인정한 순간이었다.
당연히 마정석의 가격이 폭등했다.
마정석의 가격은 아직도 정상화가 되지 않고, 상당히 비쌌다.
그러니 신원 미상의 기부자가 마정석을 보내 준 건 꽤 놀라운 일이었다.
높은 금액도 금액이지만, 현 시점에 구하기가 꽤 힘든 물건이 됐으니까.
“마정석을 보내 온 사람은 꽤 멋지구나.”
“그치. 좀 멋있는 거 같아.”
“인품이 고아하고, 인격이 훌륭하며, 선량한 이임이 틀림없다.”
“그러겠지. 그러니까 신원을 밝히지 않고 기부했지.”
“왠지 외모도 출중할 것 같다.”
“외모? 그건 모르는 거 아닌가?”
“아니다. 그 정도로 뛰어난 인품의 소유자라면 분명 외모도 출중할 것이 틀림없다.”
“뭐……. 그럴지도.”
“정말 대단한 위인이로구나.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홍복이로다.”
“그 정도까지……?”
“아니, 전 세계의 홍복이겠구나.”
진유성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신원 미상의 기부자를 끝없이 칭찬했다.
칭찬 퍼레이드의 이유는 간단했다.
보육원에 마정석을 보낸 사람은 진유성이었으니까.
즉, 진유성은 스스로의 얼굴에 금칠을 하고 있었다.
마정석이 비싸다고 해도 진유성이 가진 돈에 비하면 하잘것없고, 마정석이 귀하다고 해도 진유성의 인벤토리에는 차고 넘친다.
아마 개인 마정석 보유량 세계 1위가 진유성일 것이었다.
단신으로 S급 게이트를 두 번이나 클리어한 것만으로도 보통의 각성자가 평생 벌 마정석을 다 벌었다.
사실 진유성이 보육원에 보낸 마정석은 소량이었다.
혹시라도 너무 많은 마정석을 보내면 문제가 생길까 봐, 필요해 보일 때마다 조금씩 보내 줄 생각이었다.
그때 택시가 대정고 앞에 도착했다.
“수고하세요.”
요금을 지불하고 택시에서 내린 진유성의 눈에 차에서 내리는 고인수와 지종수가 들어왔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집이 아주 가까운 이들을 제외하면, 대정고 학생들의 모두 남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등교하니까.
하지만 진유성은 놀랐다.
“이럴 수가……!”
그들이 타고 온 차가 비싼 외제차라서 놀란 게 아니다.
고인수와 지종수가 함께 타고 와서도 아니다.
저 차를 운전한 게, 지종수이기 때문이었다.
“어, 소윤아!”
살짝 늦게 진유성과 상소윤을 발견한 지종수가 후다닥 다가왔다.
지종수가 상소윤에게 말을 걸려는데, 진유성이 끼어들었다.
“지종수, 생일이 지났느냐?”
“뭐? 갑자기 웬 생일?”
“생일이 지나 운전면허를 취득했느냐는 소리다.”
“당연히 했지. 했으니까 차를 몰지. 왜?”
“……아니다.”
그 순간, 지종수의 마음속에서 파란불이 들어왔다.
‘진유성이 날 부러워한다?’
지종수가 슬쩍 물었다.
“왜? 운전하고 싶냐?”
“물론이다.”
진유성은 한국에 와서 즐길 수 있는 많은 문화를 즐겼다.
하지만 진유성이 아직 즐기지 못한 것이 있으니, 바로 운전이었다.
“차는 있냐?”
“있다.”
상림이 주문한 진유성의 스포츠카가 마침내 한국에 도착했다.
유혜연이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상림의 회사 주차장에 놔뒀고, 아직 소유자 명의는 상림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진유성의 것임은 틀림없었다.
상림의 목숨이 두 개가 아닌 이상, 진유성이 면허를 따면 곱게 승계할 테니까.
진유성의 말에 이번엔 상소윤이 놀랐다.
“너 차 있어?”
“있다.”
“또 미드 차라고 하려고?”
진유성이 롤에 빠져 있을 때 지긋지긋하게 들었던 소리다.
커피를 마실 때도, 홍차를 마실 때도 미드 차이옵니다.
덕분에 롤을 해본 적이 없는 상소윤도 미드 차이가 뭔지 알게 되었다.
그러나 진유성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진짜 있다.”
“그래? 어디서…….”
어디서 낫냐고 물어보려던 상소윤이 멈칫했다.
진유성이 또 간첩임을 드러내는 간밍아웃을 할까 봐.
그때 지종수가 입을 열었다.
“면없찐.”
“뭐?”
“있어, 그런 게.”
지종수가 피식 웃으며 3학년 본관으로 향하자, 상소윤이 진유성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면없찐.”
마지막으로 고인수도 똑같은 말을 하고는 본관으로 향했다.
진유성은 도무지 면없찐이 뭔지 몰라서 가만히 서 있었다.
하지만 진유성은 바보가 아니다.
그는 멸마대주로 활동하면서 세작이 배워야 할 것들을 깊이 있게 익혔다.
그 중에서는 적대 세력의 암구호를 해독하는 방법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맥락이다.
모든 암구호를 해독할 수는 없겠지만 맥락을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이번 대화의 맥락에 따르면…….
‘면허 없는 찐따.’
진유성은 지종수가 자신을 비웃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는 분노했다.
분노한 진유성이 오늘의 시간표를 가만히 떠올려 보았다.
지종수에게의 복수는 충분히 가능했다.
* * *
1교시 시작 전, 아침 조회 시간에 연기훈은 늘 그렇듯 잔소리를 퍼부었다.
대정고 학생들에게 진심으로 잔소리를 퍼부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늘 하는 레퍼토리대로 ‘부모 돈이 너희들 돈이 아니다.’로 시작한 연기훈의 잔소리는 결국은 ‘공부를 열심히 하자.’로 끝을 맺었다.
그렇게 아침 조회를 끝내는 듯했던 연기훈이 입을 열었다.
“아, 맞아. 좀 이따 오후 2시쯤 학교에 촬영 팀 오거든?”
“촬영 팀이요?”
“어, 무슨 뮤직비디오 찍는다더라. 운동장이랑 교단에서 찍는다니까 괜히 방해하지 말고.”
“그럼 가수 오는 거예요? 아이돌? 누구에요?”
“몰라. 자자, 1교시 준비해라.”
연기훈이 쿨하게 교실을 나가자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뮤직 비디오는 처음 아니야?”
“아냐. 방학 때 많이 쓸걸?”
“근데 누가 오는 거야?”
“몰라. 기사 검색해도 안 나오는데.”
대정고는 교정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학교였다.
아름다운 정도가 국내 톱클래스가 아니라 세계적인 톱클래스다.
교정의 심미적인 구성에 들인 돈만 어지간한 대학교 교정에 들어간 돈보다 비쌀 것이었다.
당연히 대정고는 방송국에서 침을 흘리는 촬영 장소였다.
재벌 2세들과 관련된 드라마는 백이면 백 대정고에서 찍고 싶어 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외국의 아름다운 대학교의 풍경을 써야 할 때면 대정고의 1학년 본관 쪽을 탐낸다.
1학년 본관 쪽에는 분수를 중심으로 거대한 야외 스탠드가 있는데, 전공 서적 든 외국인 몇 명만 데려다 놓으면 이탈리아의 대학교 풍경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정고가 무조건 촬영 허가를 내주냐면, 그건 아니었다.
촬영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수였다.
하나는 대정고 출신이 연관된 방송.
둘은 흥행 여부.
오늘 뮤직비디오 촬영을 오는 가수들도 대정고 1학년 학생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기획사에 소속된 이들이었다.
“야, 근데 두 시면 우리 체육 시간 아니야?”
“어, 그러네.”
“좀 이따 구경하실?”
“남자 아이돌이면 무시. 여자 아이돌이면 구경.”
“굳.”
대정고 학생들 중에는 연예인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드물었지만, 그래도 호기심은 보였다.
아주 유명한 가수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물론 전혀 관심 없는 이들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진유성은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진유성의 머릿속에는 오직 면없찐뿐이었다.
그때 상소윤이 다가왔다.
“야, 난 누가 오는지 안다?”
“뭐? 뭔 소리하는 게냐?”
“아니, 뮤직비디오 찍으러 어떤 팀이 오는지 안다고. 새롬이가 알려줬어.”
“관심 없다.”
“여자 아이돌인데?”
“관심 없다니까.”
“무려 퍼스널 컬러인데?”
“그게 뭔데, 씹덕아.”
“……뭐?”
“내가 전혀 관심 없는 것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대답하라고 했다.”
“누가! 어떤 자식이!”
“인터넷에는 많은 현자들이 있지.”
“넌 좀 인터넷을 끊어야 한다니까?”
“시끄럽다. 난 바쁘니까 저리 가라.”
“뭐하느라 바쁜데?”
“복수.”
진유성의 말에 상소윤이 어깨를 으쓱했다.
유명한 여자 아이돌이 오는 걸 알려줬는데 관심이 없다.
‘정말 관심이 하나도 없나?’
상소윤이 진유성을 슬쩍 쳐다보다가 자리로 돌아갔다.
* * *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 2시가 됐을 때, 진유성은 운동장으로 나갔다.
대정고의 체육 시간은 일반적인 학교와 다르게 개인의 취향에 따라 체육 활동이 정해진다.
진유성은 역도 이후로 딱히 개인 스포츠를 배우지 않았다.
그저 친구들과 축구를 하거나 농구를 하는 정도였다.
오늘의 종목은 축구였다.
“후후.”
지종수가 입맛을 다셨다.
진유성과 편을 먹고 1학년 학생들을 깨부술 생각을 하니 신이 나서였다.
“진유성. 오늘 꼭 이겨야 해. 1학년한테 질 수는 없잖아?”
“뭐 당연한 걸…….”
“마침 카메라도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니까.”
지종수의 말은 어폐가 있었다.
카메라가 그들을 잡는다기보다는 그냥 배경에 걸린 것이었다.
장소 자체가 학교다 보니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뮤직비디오의 배경으로 쓰는 것이었다.
그래도 지종수의 말이 완전 꽝은 아닌 게, 뮤직 비디오 내용상 축구 경기를 보면서 응원을 하는 씬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진유성은 뭐가 됐든 상관없었다.
복수만 하면 그만이었다.
가볍게 몸을 푼 22명의 학생들이 운동장에 몰렸다.
“괜히 촬영으로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1학년 학생 중 한 명이 진유성을 비롯한 3학년 1반의 학생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늘 촬영 허가를 받은 기획사 대표의 아들인 것 같았다.
지종수가 리더처럼 굴며 1학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신경 쓰지 말고. 재밌는 경기 하자.”
“네.”
그렇게 축구 경기가 시작되는 순간, 진유성이 눈을 번뜩였다.
복수의 시간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