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178화>
* * *
게이트 사태 이후 세계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경제 기저가 바뀌었고, 국방의 논점이 바뀌었으며, 국력의 기준도 바뀌었다.
당연히 거주지의 기준도 바뀌었다.
현 시점에서 거주지를 평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기준은 하나였다.
과연 국가가 이곳을 몇 순위의 클리어 지역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상상도 하기 싫은 끔찍한 가정이지만, 만약 모든 도시에 동일한 A급 게이트가 나타났다고 치자.
그때 국가는 내가 사는 지역을 우선적으로 클리어해 줄까?
아니면 폭주를 선택할까?
이게 중요해진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각국의 국민들은 수도권에 거주하는 것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수도권이 게이트 클리어 우선순위가 높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수도에 살 수 없다면 수도 근처의 위성 도시로 편입되기도 했다.
물론 실제로는 위성 도시보다 지방의 생산시설특수지역들의 우선순위가 높았지만, 대중이 늘 이성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모든 국민들이 수도로의 이주를 바라면서 시작된 인구과밀집이 현재 전 세계의 큰 문제였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에 유일하게 역행하는 국가가 있었다.
바로, 멕시코였다.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시티에는 본래 천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수도권까지 포함하면 이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수도에는 200만 남짓한 사람들만 살고 있었다.
기존에 비해 5분의 1이나 줄어든 인구.
이유는 간단했다.
멕시코의 황제를 자처하는 엔리케 카를로가 멕시코시티를 각성 특수 지역으로 선포했기 때문이었다.
멕시코시티에 거주하기 위해서는 각성자이거나, 각성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했다.
현재 멕시코시티는…….
유흥 도시였다.
각성자로 보이는 이들이 카지노로 들어가고, 여자를 끼고 호텔로 들어간다.
일반 소상공인들은 그 모습을 쳐다보지도 않고 있다.
혹시라도 시비가 붙을까 봐.
“미친놈에다가 멍청한 놈이군.”
진유성은 짤막한 한 마디로 엔리케 카를로에 대한 평가를 끝냈다.
이 자식은 일반적인 독재자가 아니다.
보통의 독재자는 자신의 치세가 영원하길 바란다.
치세가 영원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부유해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를 경영해야 한다.
그러나 엔리케 카를로에게는 국가 경영의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경영의 의지가 있었다면 수도를 이딴 식으로 바꿔 놓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이 자식은 그저 힘을 얻었을 뿐이다.
힘에 걸맞은 품격은 얻지 못하고.
품격을 얻지 못한 강자의 끝은 언제나 뻔하다.
더 큰 힘에 굴복해 사라진다.
* * *
“하하하!”
엔리케 카를로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가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손을 마주 잡았다.
“메히까뜰의 일원이 된 걸 축하한다.”
엔리케 카를로의 눈앞에 서있는 사람은 콜 헨드릭이라는 미국인 각성자였다.
콜 헨드릭은 아놀드 벡 만큼은 아니지만, 아주 유명한 각성자였다.
SS급인데다가 쇼맨십이 아주 강한 타입이라서 영화에 출연한 적도 있고, 토크쇼에도 출연한 적이 있었다.
미국에서 아놀드 벡에 이은 두 번째 SS급 각성자라서 한 때는 콜 헨드릭도 SSS급에 오를 거라는 말이 있었다.
지금은 미국 내 각성 순위가 많이 떨어져서 10위권이지만,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무려 10위권이다.
억이 넘는 미국인들 중에서 선택받은 이라는 소리였다.
그런 그가 멕시코로 귀화를 결정한 것이 엔리케 카를로를 흡족하게 만들었다.
황제처럼 선 엔리케 카를로가 자비롭게 물었다.
“콜 헨드릭. 원하는 바가 있나?”
나이는 엔리케 카를로가 더 어렸지만, 콜 헨드릭은 아랫사람처럼 굴었다.
콜 헨드릭은 알고 있었다.
엔리케 카를로의 비위만 맞추면 멕시코에서 천국처럼 지낼 수 있다는 것을.
“파티를 벌이고 싶군요.”
“파티? 소박하군.”
“그 소박한 걸 SG는 허락해 주지 않았거든요.”
“SG가 허락하지 않는 파티를 하고 싶다는 거군.”
엔리케 카를로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떤 파티를 원하지? 풀빌라를 벌거벗은 여자로 꽉 채우고 싶나? 아니면 마약으로 꽉 채우고 싶나? 여기선 뭐든지 할 수 있거든.”
“둘 중 하나로만 채워야 합니까? 기왕이면 반반이 좋은데요.”
“오, 이런. 내가 멍청했군! 사과의 의미로 어떤 여자들을 원하나?”
“민간인도 됩니까?”
“민간인? 멕시코에는 각성인류와 일반인류만 있을 뿐이야. 민간인은 없지.”
“오, 이번에는 제가 멍청했군요.”
두 사람은 오늘 처음 본 사이면서도 막역한 친구처럼 킬킬거렸다.
두 사림이 한참 음담패설을 나누고 있는데, 멕시코 내의 황실 전용 기자가 다가와 두 사람의 사진을 찍었다.
어깨동무를 하고, 다정하게 선 멕시코 황제와 미국의 유명 각성자.
이 사진은 5분 내로 전 세계 언론에 송출될 것이었다.
SG의 간부들이 걱정했던, SG 체제 몰락의 신호탄이었다.
사진 촬영과 간단한 인터뷰를 끝낸 기자가 사라지자, 엔리케 카를로가 문득 입을 열었다.
“콜 헨드릭.”
“네.”
“넌 아놀드 벡을 만난 적이 있겠지?”
“……물론입니다. 지긋지긋한 놈이죠.”
콜 헨드릭에게서 아놀드 벡에 대한 적개심이 느껴졌다.
적개심이라기보단, 열등감에 가까웠지만.
“그럼 네가 보기에 내가 아놀드 벡과 싸우면 이길 것 같나?”
엔리케 카를로의 질문에 콜 헨드릭은 아무런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확실해?”
“확실합니다. 실례지만 레벨이 굉장히 높지 않습니까?”
콜 헨드릭은 엔리케 카를로를 만난 순간, 그의 몸 주변으로 꿈틀거리는 마력에 놀랐다.
이러한 느낌은 그가 각성을 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고위 각성자에게 받은 것이었다.
SS급 각성자인 자신이 위압감을 느낄 만한 마력이다?
도대체 얼마나 고레벨인지 짐작이 안 갈 정도였다.
“아놀드 벡에게선 느끼지 못했던 감각입니다.”
“역시 그렇군.”
“혹시 아놀드 벡과 싸우실 생각입니까?”
엔리케 카를로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조만간.”
신께서는 아놀드 벡이 그들을 위해 할 일이 있다고 말했었다.
할 일이 뭔진 모르겠지만, 신의 효용 가치가 떨어지는 순간.
엔리케 카를로는 아놀드 벡을 칠 생각이었다.
다음으로는 중국의 월성을 칠 것이었다.
그렇게 세계에서 유일하게 SSS급을 넘어선 EX급으로 인정받는 게 그의…….
엔리케 카를로의 상념은 이어지지 못했다.
난데없이 누군가의 기척을 느낀 순간, 그가 탁상 위에 올려 놨던 권총을 발사한 것이었다.
탕!
권총은 각성자들을 상대로도 여전히 유효한 무기이다.
정면에서 발사한다면 간단히 총구의 궤적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화망을 구성하고 포격한다면 어지간한 각성자들도 견딜 수 없다.
정부가 각성자를 상대로 유일하게 우위에 점하는 부분도 이것이었고.
그리고, 엔리케 카를로는 싸움의 시작을 권총으로 여는 걸 좋아했다.
마피아 시절의 습관이지만, 꼭 그 이유뿐만은 아니었다.
총구의 궤적에서 벗어나는 각성자의 속도를 보면 단숨에 싸움의 레벨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무, 무슨!”
집무실 한쪽에 언제 서 있었는지 모를 동양인 남자가 총알을 잡아 버리기 전까지는.
“총은 처음이군.”
총알을 잡은 진유성은 감탄했다.
이 조그마한 물체에 담긴 운동량이 어마어마하다.
어지간한 무림 고수들의 호신강기도 여러 번 막진 못할 것 같다.
물론 진유성에게는 의미 없는 짓이었지만.
‘아니, 뭐. 다른 이들에게도 의미는 없겠군.’
속도는 빠르지만 지나치게 단선적인 공격이다.
총구를 당기는 근육의 움직임을 읽는다면 눈 뜨고 맞아주진 않을 것 같다.
그사이, 엔리케 카를로가 침을 꿀꺽 삼켰다.
엔리케 카를로도 총알을 잡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건 완벽히 약속된 타이밍에 총이 발사됐을 때 할 수 있는 일이다.
골키퍼가 정면으로 오는 공을 막아내는 것처럼 손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었다.
“……넌 누구냐.”
“나?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황제의 위에 있는 사람이지.”
“뭐?”
“이게 운명인가?”
진유성이 평소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하더니, 질문을 던졌다.
“엔리케 카를로. 왜 국민들을 착취했지?”
“SG에서 왔나?”
“너에겐 죄책감이 없나?”
“난 그들을 착취한 적 없다! 그저 각성의 기회를 줬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삶은 왜 망가졌지?”
“고위 각성자로서 활동할 만큼의 힘이 없었나 보지!”
“그들에게 너만큼의 힘이 없었으니, 네 행동이 정당하단 말이냐?”
“…….”
엔리케 카를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동양인 소년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네 죽음 역시 정당하다. 너에게도 나만큼의 힘이 없으니.”
“이봐, 누군지 모르…….”
엔리케 카를로는 말을 끝까지 뱉는 대신 움직였다.
이는 그가 사람과 싸울 때 즐겨 쓰는 페이크였다.
엔리케 카를로에게는 자부심이 있었다.
SG의 아놀드 벡?
CSG의 월성?
전부 말랑말랑한 몬스터를 상대로 싸웠을 뿐이다.
전 지구상의 각성자들 중에서 자신만큼 대인전의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없다.
죽고 죽이는 각성자들의 싸움에서는 그가 최고이다.
엔리케 카를로는 이런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진유성은 엔리케 카를로가 겪었던 싸움의 수백, 수천 배를 겪은 사람이라는 걸.
EX급 아이템, 엑스칼리버.
전 세계를 도발할 때 사용했던 아이템이 인벤토리에서 튀어나오더니 진유성의 목을 노렸다.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소환하고 곧장 공격으로 연계하는 날카로운 찌르기였다.
‘먹혔다!’
옆에서 지켜보던 콜 헨드릭은 그런 생각을 했다.
저 동양인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좋은 의도를 가지고 나타난 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좋지 않은 의도는 무산된 것 같다.
엔리케 카를로의 공격은 더할 나위 없이 날카로우니까.
이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과연 SSS급.’
쉬이이이익-!
세찬 엔리케 카를로의 찌르기가 진유성의 목을 찌르는 순간.
엔리케 카를로는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했다.
놈이 공격을 끝까지 보고 있었다.
공격을 끝까지 보고 있음에도 한 줌의 두려움도 없었다.
게다가 사람을 찌르는 감각이 없다.
‘위험……!’
엔리케 카를로의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진유성의 목을 찌른 것 같던 검이 뒤로 뻗어 나가고, 어느새 진유성이 엔리케 카를로의 품안으로 들어와 있었으니까.
진유성이 몸을 틀었다.
인간의 근골은 생각보다 섬세해서, 자신의 힘이 자신의 몸을 망치곤 한다.
지금처럼.
“크윽!”
찌르기를 가볍게 피한 진유성이 엔리케 카를로의 팔꿈치를 툭 하고 치자, 뼈가 부러졌다.
엔리케 카를로의 찌르기에 담긴 힘을 그대로 돌려주는 고절한 수법이었다.
진유성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툭.
팔꿈치가 부러져 아귀의 힘이 빠진 엔리케 카를로의 손에서 입멸검을 강탈했다.
그리고는.
핏!
팔꿈치를 베어 버렸다.
뼈와 살이 잘려 나가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그러나 결과는 명확했다.
뼈가 부러질 때까지만 해도 신체 밸런스가 무너질까 봐 고통을 참고 있던 엔리케 카를로가 비명을 지른 것이었다.
“으아아악!”
잘려진 팔꿈치의 단면으로 피가 솟구친다.
엔리케 카를로가 전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라고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흠.”
엔리케 카를로가 비명을 지르든 말든, 진유성은 손안에 들린 입멸검에 집중했다.
똑같다.
질량, 무게 중심, 감촉.
모든 게 그가 알고 있는 입멸검과 완전히 같다.
하지만 완벽한 입멸검은 아니다.
본래 입멸검 안에는 전능의 존재가 남긴 힘이 숨겨져 있다.
그러나 지금의 입멸검에는 그러한 것이 없다.
‘복제품인가?’
이것이 복제품이란 것은, 쌍둥이 마도사들이 중원에 다녀왔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렇다는 건…….
[마도사들이 당신이 남긴 힘을 품어도 이길 수 있습니까?]
“뭔 소리야?”
[저도 알지 못했던 사실이나, 당신은 상실의 공간에서 힘의 9할을 놓고 온 것 같군요.]
“어, 맞아.”
[중원에 남은 힘을 마도사들이 품는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타트바의 말처럼 그들이 자신이 남긴 힘을 얻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가 남긴 힘이 천신궁 뒤뜰에 남았을 수도 있다.
해남의 이름 모를 섬에 숨겨져 있던 것처럼.
“엔리케 카를로.”
“크윽…….”
“이 검은 어디서 났지?”
진유성이 입멸검을 들어서 엔리케 카를로의 목을 겨눴다.
“두 번 묻지 않으마. 이 검의 출처를 밝히면 삶을 이어 가게 허락해 주마.”
물론 그 삶은 지옥에서 시작되는 망자로서의 삶이겠지만.
엔리케 카를로가 지혈을 위해 잘린 팔꿈치를 꾹 움켜쥐더니 물었다.
“저, 정말인가?”
“물론.”
“그 검은…….”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엔리케 카를로의 몸을 둘러싼 마력이 농밀해졌다.
프스스스.
피가 흐르던 잘린 팔꿈치의 단면에서 피가 아닌 무언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새까만 영기였다.
‘이건…….’
록펠러와 마주했을 때 느꼈던 감각이었다.
악의로 똘똘 뭉친 영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우는 순간.
엔리케 카를로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드디어 만났군. 중원의 절대자.”
“넌 누구지?”
“로스차일드.”
“로스차일드?”
“마도사들의 둘째라는 표현이 더 이해하기 쉬운가?”
록펠러 이후, 또 다른 마도사가 진유성의 눈앞에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