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176화>
* * *
정의와 생존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가치이다.
정의롭기 위해 목숨을 포기할 필요는 없고, 생존한다고 정의를 지키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둘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보통의 상황에서 정의는 목숨을 담보로 지켜야 하는 것이다.
미국이 노예 해방 운동을 위해 전쟁을 벌여야 했던 것처럼.
한국이 독립 운동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것처럼.
이는 늘 정의의 반대편에 누군가 서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는 꽤 많은 사람들이 정의의 반대편으로 넘어가기 마련이었다.
엔리케 카를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인류 최초의 SSS급 각성자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황제 아놀드 벡이 인류 최초의 SSS급 각성자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UN에서 아놀드 벡에게 ‘인류를 대표하는 각성자’라는 상징성을 부여한 것이었다.
시기적으로 큰 차이는 없지만, 실제로 가장 먼저 SSS급에 올라선 것은 엔리케 카를로였다.
마피아 출신이었던 엔리케 카를로는 각성 이후 1년 정도 힘을 쌓는 데 집중했다.
그리곤 자신이 멕시코에서 가장 강하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 멕시코의 마피아들을 평정했다.
아즈텍 신화의 태양신.
멕시코란 국명의 어원.
현재는 멕시코 각성 단체명.
메히까뜰(Mexicatl)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엔리케 카를로는 메히까뜰의 힘으로 멕시코 정부를 집어삼켰고, 멕시코의 헌법을 수정해 멕시코의 영원한 황제로 집권했다.
“뜻을 이뤘군.”
지금 와서는 누구도 믿지 못할 소리지만, 당시의 엔리케 카를로에게는 나름의 정의가 있었다.
멕시코의 정부는 무능하고, 마피아는 활개를 친다.
시민들은 정부에 세금을 내면서도 마피아들에게 수탈을 당한다.
정부는 마피아들을 견제하려고 하지만 이는 신통치 않고, 마피아들은 정부를 거슬려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인적, 물적 손실이 발생한다.
마피아 출신인 그는 멕시코가 얼마나 많은 자원을 낭비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 모든 역량을 한곳에 집중할 수 있다면?
멕시코가 전 세계 패권을 다투는 국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 선두에는 자신이 서 있을 것이고.
어떻게 보면 진유성이 가졌던 정의와 비슷한 구석도 있었다.
그러나 진유성의 정의가 고결하고 순수한 신념에서 탄생했다면, 엔리케 카를로의 정의는 자기 과시와 허영심에서 탄생했다는 차이가 있었다.
진유성의 정의는 죽음 앞에서도 꺾이지 않을 것이지만, 엔리케 카를로의 정의는 쉽게 꺾였다.
멕시코의 황제로 취임한 다음 날.
“으음…….”
술에 취해 잠들었던 엔리케 카를로는 서늘한 기분이 들어서 눈을 떴다.
분명 몇 명의 여자들과 함께 침실에 들어왔는데,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실이 온통 새까맸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 누군가 있었다.
“날 찾아온 거냐? 여자들은 어디 갔어?”
엔리케 카를로는 당황하지 않았다.
습격이나 암살 따위 두렵지 않다.
그러나 이는 엔리케 카를로의 착각이었다.
[현재 인류에서 가장 강한 각성자가 이딴 놈이라니.]
[인류를 경영하는 아카샤의 의지가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지능 수준도 처참하군.]
세쌍둥이 마도사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엔리케 카를로는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공포가 끓어오르기 시작한 탓이었다.
“다, 당신들은 누구요?”
[알 필요 없다.]
[너는 선택해야 한다.]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우리의 말을 따를 것인지.]
세쌍둥이 마도사의 요구는 간단했다.
멕시코를 각성 중심의 국가로 만드는 것.
모든 사람들이 각성자가 되길 원하며, 가난에서 벗어날 유일한 희망이 각성자이며, 각성자와 비각성자가 차별받는 세상.
각성자는 우월한 신인류이고, 비각성자는 열등한 존재라는 이데올로기가 당연시되는 세상.
그리고 이러한 이념을 멕시코에서 시작해 중남미와 남미까지 퍼트리는 것.
이것이 그들의 요구였다.
엔리케 카를로는 무식했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이들의 요구가 이루어진다면 국가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알 뿐이었다.
이들의 요구를 반대하기 위해 목숨을 걸 생각은 없었다.
“무, 무조건 협조하겠소!”
엔리케 카를로가 마도사들에 의해 정의의 반대편으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마도사들은 엔리케 카를로에게 얼마든지 방탕한 삶을 살아도 좋다고 허락했다.
멕시코 각성자들의 정점에 서있는 그가 방탕하고 쾌락적인 삶을 산다면, 휘하의 각성자들도 비슷한 삶을 살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일반인들은 각성자의 삶을 동경할 것이고.
그때, 마도사 중 한 명이 충격적인 말을 꺼냈다.
[매달 새로운 각성자를 100명씩 만들어 내라. 그들이 얻는 경험치의 일부를 너에게 보내 주도록 하지.]
“예?”
[이 정도 말귀도 못 알아듣는다면 우리가 널 이용할 필요가 있나?]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어떻게 경험치를……?”
[닥치고 우리의 명령을 수행해라. 죽고 싶지 않으면.]
그들은 그렇게 사라졌다.
엔리케 카를로는 겁에 질려서 수많은 민간인들을 F급 게이트에 쑤셔 넣었다.
당연히 무수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100명이 넘는 각성자도 탄생했다.
그리고…….
“이, 이럴 수가.”
정말로 경험치가 들어왔다.
이 말인즉슨,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들이 게이트와 시스템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생각해보면 그들이 원하는 건 각성자 중심의 사회이다.
어쩌면 전 세계의 모든 인구가 각성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은 각성자들의 신일까?
엔리케 카를로는 착실히 마도사들의 명령을 수행했다.
딱히 어려운 것도 없었다.
너무 늙거나, 너무 어린 이들만 아니라면 순서대로 게이트에 쑤셔 넣으면 그만이었다.
물론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서 멕시코의 실물 경제는 망가졌다.
사회를 떠받치는 수많은 직종이 무너졌고, 이제는 일차산업까지 위협을 받고 있었다.
‘때가 된 건가.’
각성자들의 수는 넘쳐나지만, 일반 산업을 지탱할 물적, 인적 자본이 없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전쟁뿐.
미국을 침공하는 건 부담스러우니 국경을 마주한 벨리즈와 과테말라 먼저.
그 다음으로 온두라스를.
인류 최초의 ‘각성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엔리케 카를로 앞에 마도사들의 둘째가 나타났다.
둘째는 엔리케 카를로에게 첫째가 가져다준 입멸검의 복사품을 주었다.
그리곤 전 세계 각성자를 향한 도발을 명령했다.
“신이시여!”
엔리케 카를로가 둘째에게 공손한 예를 표했다.
“이 검으로 인해 수많은 각성자들이 몰릴 터인데,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말해라.]
“제가 인간 중에 가장 강한 것입니까?”
레벨로만 따지면 엔리케 카를로는 압도적이다.
아놀드 벡조차 엔리케 카를로와 레벨을 비교할 수는 없다.
이는 엔리케 카를로가 마도사들의 배려로, 새로이 탄생하는 각성자들의 경험치를 일부 흡수하기 때문이었다.
힘의 총량이 전부는 아니지만, 아마 엔리케 카를로는 각성자들 중 가장 강할 것이었다.
둘째와 손을 잡고 있는 중국의 월성을 제외하면.
[그러하다.]
“아놀드 벡보다 우위에 있습니까?”
[그렇겠지.]
“하면, 아놀드 벡을 죽여도 되겠습니까?”
엔리케 카를로는 아놀드 벡이 황제라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현재 지구상에서 황제에 직위에 오른 것은 자신뿐이다.
아놀드 벡은 그저 얼굴에 분칠을 하고 TV에 나오는 광대다.
이번 기회에 아놀드 벡과 싸울 생각이었다.
[불허한다.]
그러나 둘째는 고개를 저었다.
[그를 죽이는 건 미뤄 두도록. 그는 우리를 위해 해 줄 일이 있으니까.]
둘째의 말에 엔리케 카를로가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다음 날, 엔리케 카를로가 전 세계의 SS급 이상 각성자를 향해 선포했다.
자신을 이기면 EX급 아이템을 주겠다고.
* * *
“지금 이럴 때가 아닙니다.”
“드벡아, 세상에 정해진 때는 없다. 때는 사람이 정하는 거야.”
“그러니까 지금이 제가 정한 때라고요!”
“어허. 어디 어른이 말하는데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
“고작 이런 이유인 줄 알았으면 한국에 오지 않았을 겁니다.”
“고작……?”
진유성의 몸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살벌한 기운에 아놀드 벡이 찔끔했다.
사실 20분 전까지만 해도, 아놀드 벡은 진유성에게 감탄하는 중이었다.
진유성을 만나자마자 엔리케 카를로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였다.
즉, 진유성이 자신을 부른 것은 엔리케 카를로와 관련 있을 것이다.
어쩌면 진유성은 모든 일을 예측하고 있던 게 아닐까?
시기가 너무 공교로웠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한 것이었다.
그래서 질문을 던졌다.
“저를 부른 이유가 엔리케 카를로 때문입니까? 그가 노리는 바는 무엇입니까?”
“몰라?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예? 그럼 절 왜 부르신 겁니까?”
“유투브 때문에.”
“유투브요?”
“그러니까…….”
이어진 진유성의 설명을 들은 아놀드 벡은 어이가 없었다.
유투브를 찍었는데 사람들이 김정철 회장만 봤다고?
그래서 새롭게 영상을 하나 찍어야겠다고?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이게 신화적인 영역의 힘을 가진 남자가 할 소리란 말인가!
아놀드 벡은 진유성을 질책했다.
아무리 진유성이라고 하더라도 이건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한데, 진유성의 전신에서 풍기는 끔찍한 기운 때문에 무슨 말을 못하겠다.
아놀드 벡은 마력을 끌어 올려서 간신히 진유성의 기운에 대항했다.
그리고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전 미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진유성은 아메리칸 상림이 오리지널 상림과는 좀 다르다는 걸 느꼈다.
이 자식은 뚝심이 있다.
하지만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상림이 뭐 처음부터 고분고분했겠는가?
한 10년 정도 갈구다 보면 고분고분해지는 법이지.
“드벡아.”
“예.”
“멕시코 놈은 날 부르는 거다.”
“마스터를 부른다고요?”
“엑스칼리버는 내가 사용했던 검이다. 본래 명칭은 입멸검이지.”
“네?”
“진품인지 가품인지는 모르겠지만, 놈은 저걸 미끼로 날 부르고 있다.”
“하지만 그가 왜 마스터를 부른단 말입니까?”
“멕시코 놈의 뒤에 까만 놈이 있나 보지.”
“마도사들……?”
아놀드 벡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진유성의 말이 맞다면 이건 엔리케 카를로가 인간의 영역에서 벌이는 일이 아니다.
보다 복잡하고 위험한 일인 셈이었다.
그러나 진유성은 오히려 반가웠다.
‘마도사들이 활동을 하려나 보군.’
타트바는 분명 마도사가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고 말했고, 이건 그 징조이다.
“내가 멕시코에 가서 놈을 만날 거야. 넌 출국기록 없이 날 멕시코에 보낼 방법이나 생각해.”
출국 기록이 없어야지, 서울역 게이트를 통해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
출국 기록이 있으면 입국 기록도 필요하다.
“그러니까, 일단 영상부터 찍자.”
진유성의 말에 아놀드 벡은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정말 마도사가 벌인 일이라면, 진유성이 나서는 게 정답이니까.
“아니, 이런 맛이…….”
“야! 좀 더 역동적으로 안 해? 몬스터를 눈앞에 뒀을 때처럼 열정적으로 하란 말이야!”
“맛있군.”
“야! 동화책 읽냐?! 너 바보야?!”
“죄, 죄송합니다.”
아놀드 벡은 그 뒤로 한참이나 진유성의 갈굼을 먹으며 영상을 촬영해야 했다.
뭔가, 회의감이 들었다.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하지만 반항하기도 애매했다.
멕시코는 진유성이 갈 거니까.
상림이 수십 년 전에 걸었던 길을 그대로 걷고 있는 아놀드 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