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171화>
* * *
“흐음.”
진유성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간 공을 들였던 소설의 1권이 마침내 완성됐기 때문이었다.
사실 말만 소설이지, 거의 수필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자신이 고려의 왕자로 태어나 무신들의 반란을 겪고, 명나라로 도망치는 내용이 적혀 있으니까.
본래는 노예로 멸마대에 팔려 가는 내용까지 쓰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내용 전개가 더뎠다.
진유성이 기억하는 고려와 무신들의 반란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들어가서 그런 것 같았다.
물론 무신들의 역성혁명이 일어날 당시 진유성은 어린 소년이었다.
정치적인 식견도 없었고, 통찰력도 거의 없었다.
그저 허겁지겁 국경으로 도망치기 바빴을 뿐이었다.
그러니 그가 소설에 쓴 반란에 대한 묘사는 지금 시점에서 해석한 것이었다.
소설은 완성한 진유성은 상림에게 먼저 보여 주었다.
“음…….”
소설을 본 상림의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
“교주님, 이거 너무 어려운 거 아닙니까?”
“어렵다고?”
“네. 중원에서 태어난 저만 해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들이 많은데, 여기 사람들은 더하겠죠.”
“뭘 모르겠는데?”
“여기 고려의 복식을 지칭하는 단어들이나, 궁을 묘사하는 단어들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음, 하긴 고려에서 쓰던 말이니까.”
“좀 더 쉽게 쓰셔야 할 것 같아요. 진도도 팍팍 빼고. 한 권 내내 도망치기만 하니까 좀 답답한 것 같아요.”
상림의 말에 진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공감이 간다.
하지만 상림의 말에 공감하는 것과 혼을 내는 건 다르다.
“지금 내가 답답하다는 소리냐?”
“네? 아뇨, 그게 아니라. 여기 주인공이…….”
“주인공이 나다.”
“어…….”
“지금 내가 답답하다는 소리지? 계속 도망치기만 하니까?”
상림은 불안함을 느꼈다.
이 미친 교주 놈이 또 삐진 거 같다.
“아뇨, 아뇨. 저는 너무나 재밌었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이 보기에 그럴 수 있다는 거였죠.”
“왜?”
“아무리 무신들이 수도 많고 강하다고 해도, 반격도 좀 하고, 시원한 장면을 기대할 것 같아서요.”
“압도적인 힘 앞에서도 반격하는 주인공을 원한다는 거냐? 기지를 발휘하고, 노력해서?”
“그, 그렇죠.”
불안한 상림의 표정을 본 진유성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네가 해 봐.”
“네?”
“압도적인 힘 앞에서 반격해 보라고, 이 자식아!”
눈앞에 있는 진유성이 갑자기 사라졌다.
빡!
그리곤 상림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컥!”
상림이 깜짝 놀라서 뒤를 봤는데, 뒤에 진유성은 없다.
다시 앞을 보는 순간.
짝!
이마에 손바닥이 날아왔다.
상림은 깜짝 놀랐다.
‘이, 이게 무슨?’
진유성과 상림의 무공이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이건 이상하다.
지금처럼 어떻게 움직이는지조차 알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반격을 해 보라고, 이 자식아!”
상림은 그 뒤로 실컷 얻어맞았다.
진유성의 손길이 잦아들 때쯤 상림이 물었다.
“교주님. 혹시 무공이 오르셨습니까?”
“뭐?”
“옛날에 교주님이 저한테 한 말이 있잖아요. 이형환위는 애들 장난이라고.”
“어, 맞지.”
이형환위(移形換位).
흔히 눈앞에 있는 상대가 순식간에 등 뒤를 잡는 것을 뜻했다.
물론 꼭 등 뒤로만 이동해야 하는 건 아니고, 상대의 사각을 완벽하게 잡아 내면 그만이다.
진유성이 이형환위를 애들 장난이라고 부른 것은 실리의 문제였다.
경신법으로 상대의 사각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은 실력 차이가 엄청나게 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구태여 등 뒤로 돌아갈 것도 없다.
전면에서 공수를 겨뤄도 충분하다.
그런데도 상대의 등 뒤로 돌아간다는 것은 죽일 의사가 없이 기만 꺾겠다는 것인데…….
그게 애들 장난이 아니고 뭐겠는가.
한데 상림은 분명 진유성의 움직임을 보지도 못했고, 느끼지도 못했다.
진유성에 비하면 하잘것없다지만 상림도 어느덧 초절정의 경지를 회복했다.
각성자 등급으로 따지자면 SSS급인 셈이었다.
그런 자신을 상대로 이형환위라니?
말도 안 된다.
상림의 반응에 진유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너 내가 등 뒤로 돌아가는 거 전혀 못 느꼈어?”
“네. 못 느꼈습니다.”
“왜?”
“모르겠습니다. 정말 허깨비처럼 사라졌어요.”
“뭐지?”
진유성은 상림이 알고도 반응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림은 몰랐다고 한다.
속도가 느려서 반응하지 못한 것과, 움직임을 느끼지 못한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이 경우에는 둘 중 하나였다.
상림의 실력이 줄어들었거나, 진유성이 실력이 늘었거나.
얼마 전에 상림과 진유성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교주님. 제 수준은 어디일까요?”
“너? 무공은 초절정이나 무위는 절정 이하일걸?”
무공에 대한 깨달음은 초절정.
실제 몸으로 할 수 있는 위력은 절정.
21세기적으로 생각하자면 소프트웨어는 초절정이나, 하드웨어는 절정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상림은 하드웨어도 초절정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진유성의 지도 아래 계속해서 신체와 무공을 단련해 왔기 때문이었다.
진유성이 보기엔 다 고만고만해 보이겠지만, 사실 초절정은 엄청난 경지다.
무인이 밟을 수 있는 최고의 경지라고 봐도 무방했다.
상림이 괜히 천마신교의 3인자이자, 전 중원을 놓고 봐도 서른 명 안에 드는 강자가 아니었다.
물론 초절정 무인들 간에도 격차는 존재한다.
그리고 무림인들은 그 격차를 깨달음의 영역으로 구분해 삼화취정, 오기조원, 등봉조극 등으로 나누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초절정이 무공의 끝이었다.
중원이 탄생한 이래로 초절정 너머의 경지로 나아간 건 진유성이 유일하니까.
그나마 초절정 너머를 가로 막고 있는 벽을 느낀 유일한 사람 정도가 신주청이었고.
‘주청이는 끝내 벽을 넘진 못했지만.’
물론, 전설 속의 달마대사나 장삼봉 같은 이들의 무공 경지를 진유성이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그들의 무공 수위도 초절정이었다.
달마대사는 ‘벽’을 느꼈고, 장삼봉은 느끼지 못했고.
‘내가 더 강해졌을 것 같진 않고, 상림이 약해진 건가?’
진유성이 상림에게 말했다.
“야, 공격해 봐.”
“교주님을 공격하라는 말씀이죠?”
“어. 검 필요하냐?”
“저는 도였죠.”
진유성이 인벤토리에서 제일 좋아 보이는 도를 꺼내서 상림에게 건넸다.
상림은 본래 도객(刀客)이었으니까.
다만 지금까지는 어쭙잖게 무기를 다루느니, 신체를 단련해 무위를 회복하는 데 집중했을 뿐이었다.
상림은 진유성에게 조심하라느니, 전력으로 가겠다느니 같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
누가 누구를 걱정한단 말인가?
“스으으으…….”
도를 꼬나 쥔 상림이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의념이 요동친다.
무위와 무공이 합치되면서 상림이 의념지경을 회복한 것이었다.
다만 진유성은 의념을 손발처럼 다룰 수 있다면, 보통의 무인들은 의념을 내공과 함께 다룰 수밖에 없었다.
즉, 진유성처럼 자유롭게 의념을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니라 내공을 보조하는 개념으로 이용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아놀드 벡이 대단한 재능을 타고난 것이었다.
장난으로 말했던 사이타마식 훈련법을 듣고 의념을 깨우쳤으니 말이었다.
‘나쁘지 않은데?’
진유성은 초절정 고수의 전력이 담긴 일격을 앞에 두고도 태연했다.
그는 상림의 기세와 의념을 확인하며 공격을 기다렸다.
마침내.
번뜩!
반개했던 상림의 눈이 커짐과 동시에 일도가 날아들었다.
쉬이이익-!
진유성은 좀 놀랐다.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림의 공격이 훨씬 강맹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캉!
진유성이 손날이 도면을 후려치는 순간, 상림의 모든 내공이 일거에 해소되었다.
딱 한 수로 초절정 고수의 공격을 무력화시킨 것이었다.
게다가 내공을 흘리거나 받아친 게 아니라 해소시켰다.
공격자인 상림이 순식간에 몰려드는 탈력감에 다치지 않도록 손을 쓴 것이었다.
이럴 때보면 교주님은 참 따뜻한 사람이다.
이래서 진유성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상림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진유성이 입을 열었다.
“약해지지 않았네.”
“저 말입니까?”
“어, 오히려 좀 강해진 것 같다.”
상림은 중원에서 얻었던 무공의 9할까지 근접한 것 같았다.
물론 상실의 공간에서 잃어버린 ‘가슴 속에 품은 칼’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훌륭하다.
당장 지구상에 상림과 겨룰 수 있는 이가 거의 없을 것이니까.
문제는 상림이 약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강해졌다는 것.
왜?
어째서 내가 강해졌을까?
진유성은 그런 의문을 품었지만 답을 알 수 없었다.
물론 이런 경험은 중원에서도 있었다.
진유성이 품고 있는 무에 대한 재능은 거대해서, 딱히 뭘 하지 않아도 강해지던 일이 많았다.
어제까지는 풀리지 않던 무공 구결이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갑자기 이해됐다는 식으로.
하지만 이건 ‘벽’을 넘기 전의 이야기다.
벽을 넘은 뒤부터는 더 강해질 구석도 없었으니까.
잠시 고민하던 진유성은 결론을 내렸다.
“모르겠다.”
“뭐가요?”
“내가 왜 강해졌는지.”
“제가 무공을 회복하는 것처럼 교주님도 잃어버린 무공을 회복하는 게 아닐까요?”
“아닐걸?”
진유성은 상실의 공간에서 무의 9할을 잃어버렸지만, 이건 상실이 아니었다.
본래 상실의 공간에서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모두 잃어버려야 한다.
완전히 상실한다는 것은 흔적이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림만 해도 스스로의 가슴에 품은 칼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모르고 있으니까.
하지만 진유성은 상실의 공간을 극복했고, 무를 증명해 법칙을 회피했다.
9할을 잃어버리긴 했지만, 1할이 남아 있다.
진유성은 그 1할을 통해서 과거의 무공 수위를 전부 회복했다.
내공이 조금 부족하긴 했지만, 그건 게이트에 들어가면 얼마든지 쌓을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진유성은 어깨만 으쓱했다.
왜 강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강해져서 나쁠 건 없으니까.
* * *
진유성은 상림을 실컷 두들겨 팼지만, 충고 자체를 무시한 건 아니었다.
상림의 말처럼 현대인들에게는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고려의 고유 명사들을 쉽게 고쳤다.
그와 동시에 무신들에게 쫓겨 도망가는 내용을 많이 줄였다.
그 결과 1권 말미에 진유성이 명나라에 도착하는 내용이 삽입되었다.
“흠.”
마음에 든다.
상림한테 화풀이를 하긴 했지만, 나름 괜찮은 조언이었다.
진유성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설을 쓰면서 깨달은 게 있었다.
본래 진유성은 남들보다 시간을 아껴 쓸 수 있었다.
생사결의 상태에 돌입하면 인지 시간이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드라마를 보거나 시험을 위해 교과서를 외울 때 유용한 기능이었다.
하지만 창작에서는 이것이 별 소용이 없었다.
1초간 고민하나 8초간 고민하나 속도는 비슷한 것 같았다.
물론 계속해서 생사결의 상태를 유지하면 글 쓰는 시간을 줄일 수야 있겠지만, 내공이 아까웠다.
그럴 바에는 잠을 안 자고 말지.
그렇게 진유성은 완성된 소설을 연재 사이트에 업로드했다.
CMSG의 사장이 알려 준 사이트였다.
소설을 올리고 나니 문득 며칠 전에 학교에서 업로드했던 유투브가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그 뒤로 영상에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다.
진유성은 내친김에 채널 [진유성]에 접속했다.
“응?”
그리곤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