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168화 (168/337)

<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168화>

황망한 표정을 짓던 진유성은 뒤늦게 모든 사실을 알아차렸다.

알고 보니 다섯 명이 팀을 먹고 자신을 패배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것이었다.

만약 진유성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내공을 사용했을 것이었다.

그가 스포츠를 즐길 때 내공을 쓰고, 쓰지 않는 기준은 간단하다.

공정성.

정정당당한 대결이라면 공정성을 위해 내공과 의념을 제한한다.

하지만 상대방이 공정함을 저버린다면?

내공을 쓰는 거다.

내공을 사용하면 정새롬의 공에 회전을 더 먹여서 아주 자연스럽게 거터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

또한 일부러 거터에 던진 고인수의 공을 끄집어낼 수도 있다.

물론 상림이 이러한 진유성의 생각을 들었다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었다.

정정당당한 윷놀이 대결에서 내공을 사용하다 걸렸던 진유성이니까.

하지만 진유성은 정말로 공정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상림은 존재 자체가 불공정하다고 판단되어 고려하지 않을 뿐이었다.

아무튼 진유성이 가장 놀란 것은 친구들의 연기력이었다.

아무리 방심했다지만,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이는 그 동안 진유성에게 무참히 농락당했던 연합군의 집념이 만들어 낸 일이었다.

결국 패배감에 휩싸인 진유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체 언제부터 계획하고 있던 게냐?”

“연습 경기에서 우리를 농락하려고 할 때부터.”

“……알아차렸나?”

“당연하지. 다른 모든 스포츠를 잘하는 주제에 볼링만 못 친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

상소윤이 당당하게 말했다.

“오늘의 패배는 네가 만든 거야. 처음부터 정정당당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지.”

“……!”

상소윤의 말에 진유성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상소윤의 말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사이, 옆자리에서 볼링을 치고 있던 이용객들은 웃음이 나오는 걸 간신히 참고 있었다.

더 봤다가는 오그라들어서 볼링을 못 칠 거 같았다.

‘웹드라마 같은 거 연기 연습하는 거겠지?’

‘당연하지. 실제로 저런 말을 할 리가 없잖아?’

‘와, 진짜 대단하네.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대사를 치네?’

드라마와 영화로 세상을 배운 진유성에게 물들 만큼 물들어 버린 상소윤이었다.

그나마 진유성과 상소윤의 외모가 출중했기 때문에 연기 연습처럼 보이는 게 다행이었다.

그렇게 볼링이 끝이 나고, 계산을 할 시간이었다.

본래는 패배한 팀에서 돈을 나눠 내거나, 가위바위보로 한 명에게 몰아줘야 했다.

하지만 진유성은 지갑을 열었다.

“내가 내도록 하마.”

“올, 웬일?”

진유성은 돈을 아끼는 타입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펑펑 쓰는 쪽에 가까웠다.

하지만 내기가 걸렸을 때는 지독한 실리주의자로 변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진유성이 자처해서 돈을 내는 이유는 오늘의 일을 기억하기 위함이었다.

이 패배감을 곱씹고, 절대로 패배하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그렇게 만족스러운 승리와 지독함 패배감을 경험한 대정고 학생들이 볼링장 밖으로 나왔다.

“이제 뭐 하지?”

시험이 끝났으니 즐겁게 놀고 싶었지만, 딱히 계획은 없다.

남학생들만 있었으면 PC방을 갔을 확률이 높지만, 상소윤과 정새롬 때문에 애매했다.

“노래방이나 갈까?”

“난 별로다.”

정새롬의 말에 꽤 긍정적인 분위기가 형성됐지만, 지구의 노래를 좋아하지 않는 진유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때 고인수가 버스 정류장에 붙은 포스터를 향해 손짓했다.

“저거, 어때?”

고인수의 손이 가리키는 포스터에는 유명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공연이 그려져 있었다.

워낙 유명한 뮤지컬이다 보니 모두들 레미제라블을 알고 있었다.

또한 레미제라블은 몰라도 장 발장이란 이름은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문제가 있었다.

“저걸 보자고? 지금?”

“어, 왜?”

“예매해야 할걸? 저거 티비 광고도 하고, 유명한 거 아니야?”

고인수가 고개를 저었다.

“배급사 이름 봐 봐.”

고인수의 말에 심도훈이 배급사를 보지도 않고 박수를 쳤다.

“너희 회사가 배급한 거야?”

“제작 투자까지.”

“오. 몰랐네.”

배급사나 투자사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VIP석을 소량 쥐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만약 오늘이 주말이거나 공휴일이었다면 고인수도 VIP석을 여섯 자리나 얻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평일이다.

시험이 끝나서 놀러 나왔을 뿐이었다.

“괜찮은데?”

“회사에 연락해 봐.”

친구들의 반응에 고인수가 어딘가로 전화를 하더니 곧장 OK 사인을 보냈다.

순조롭게 VIP석 6개를 구한 것이었다.

그때 진유성이 물었다.

“뮤지컬이란 게 재밌느냐?”

“너 뮤지컬 본 적 없냐?”

“없다.”

“영화랑 비슷해. 음악 영화들.”

“흠…….”

지구의 문화를 즐기는 진유성이지만 여전히 그에게 노래는 낯설었다.

특히 TV에서 아이돌들이 부르는 노래나, 가락 없이 가사만 있는 랩은 소음 공해 수준으로 들렸다.

하지만 영화 음악 중에는 꽤 들어 줄 만한 것들이 많았다.

이는 영화 음악의 상당수가 고전 클래식을 차용하기 때문이었다.

잠깐 고민하던 진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쯤은 경험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몇 시에 시작이야?”

“지금 바로 택시타면 될 듯?”

공연을 기다리며 붕 뜨는 시간도 없었기에 모두들 반색했다.

그렇게 그들은 홍대입구역에서 멀지 않은 뮤지컬 공연장으로 향했다.

* * *

사람은 죽을 때까지 나고 자란 문화를 벗어나지 못한다.

새로운 문화를 접해도 기존 문화를 통해 해석할 뿐이었다.

만약 미국에서 태어나 20년을 살고, 한국에서 40년을 더 산 60대가 있다면 그의 사고방식은 미국적일까 한국적일까?

100%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과학자들은 사람이 가치관이 형성되는 시기의 문화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했다.

즉, 한국에서 더 오랜 시간을 살아왔어도 미국인일 확률이 높았다.

진유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국의 문화를 받아들였고 즐기고 있었지만, 그의 뿌리에는 고려와 명나라의 문화가 섞여 있었다.

그가 한국의 문화를 즐기는 것은 어디까지나 유희와 관찰의 성격이었다.

진실로 그 문화를 가슴 깊이 공감하는 건 아니란 소리였다.

하지만…….

1832년 2월 혁명의 파리를 배경으로 하는 레미제라블은 진유성에게 깊은 감흥을 주었다.

상처받고, 피폐하고, 가난한 이들이 내일을 다짐하며 부르는, 그 유명한 ‘내일로’를 듣는 순간.

진유성은 처음으로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아마 이 장면이 자신의 과거와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일 것이었다.

멸마대에서 도망친 진유성은 생존대를 구성했고, 생존대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내일도 살아남자.

그들은 먼 미래를 볼 만큼 여유가 있지 않았다.

매일을 쫓겨 다니면서 그저 내일을 오늘로 만들어 갈 뿐이었다.

그런 그들이 혁명을 다짐한 것은 화전민 모녀의 죽음을 경험한 뒤였다.

내일을 단지 시간의 개념으로 두어서는 그들을 대신해 죽은 화전민 모녀의 낯을 볼 면목이 없었다.

가치를 두어야 했다.

그렇게 천마신교가 탄생한 것이었다.

문득 상소윤의 말이 떠올랐다.

“야, 소설이 그렇게 좋으면 네가 직접 하나 써라.”

“원래 뭔가를 좋아하면 직접 해 보고 싶어지지 않나?”

상소윤은 CMSG에서 들어오는 원고를 읽는 자신을 보며 이런 말을 했었다.

그리고 진유성은 그 말을 꽤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어차피 더는 볼 소설이 없어서 작가들을 영입한 처지였으니 말이었다.

실제 무림에서 살아온 자신이 쓰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진유성은 실제로 소설을 쓰진 않았다.

영감이 확 와닿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진유성은 자신이 멸마대주와 생존대주를 거쳐 천마신교주가 되었던 이야기를 쓰고 싶어졌다.

생각해보면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자신과 상림 밖에 없다.

진유성은 그렇게 뮤지컬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다.

진유성은 인지하지 못했지만, 이 순간은 그의 중원인이라는 정체성에 지구인이라는 정체성이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이 말은 진유성의 존재가 지구의 아카식 레코드에 한 발을 걸치게 되었다는 이야기기도 했다.

* * *

뮤지컬을 감상한 그들은 저녁을 먹고는 헤어졌다.

같이 택시를 타는 상소윤과 진유성을 보며 지종수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상소윤은 노련했다.

“아, 맞다. 엄마가 반찬 가져가래.”

한마디로 진유성과 같이 택시를 타는 이유를 만든 것이었다.

그렇게 압구정으로 향했는데, 집에 거의 도착할 때부터 택시가 기어가기 시작했다.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도로 위에 차가 너무 많았다.

아무리 압구정에 교통량이 많다고는 해도 좀 지나쳤다.

“차가 왜 이렇게 막혀요?”

“도로 공사 때문인가 본데?”

택시 기사가 말을 이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는 게 더 빠를 것 같아.”

결국 진유성과 상소윤은 택시를 내려서 집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10분 정도만 걸어가면 되는 거리였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

한창 걷던 중 상소윤이 물었다.

그녀의 말처럼 진유성의 표정에는 꽤 부드러운 기운이 있었다.

“뮤지컬이 꽤 재미있었다.”

“그래?”

“음악도 들어 줄 만했고.”

“그럼 이제 일요일에 음악 방송 보냐?”

“그건 안 된다. 서프라이즈는 포기할 수 없다.”

“아, 진짜. 그게 재밌냐?”

“벌떡 일어날 만큼 재밌다.”

“어휴, 초딩.”

상소윤과 진유성은 여전히 일요일마다 TV 채널을 두고 싸우지만, 보통은 진유성이 이겼다.

진유성이 상소윤을 설득하는 대신 상림을 협박하기 때문이었다.

음악 방송을 보는 대머리 고자와 서프라이즈를 보는 강인한 풍성충 중 하나를 고르라고.

“야, 근데 너 그 팔찌는 쭉 하고 다니더라?”

“음? 칠성 말이냐?”

“어. 볼링 칠 때부터 짤그락거리던데.”

진유성이 자신의 손목에 매달린 팔찌를 보았다.

“예전에 나는 이걸 하고 다니지 못했다.”

“왜?”

칠성을 볼 때면 자신이 신처럼 느껴져서였다.

좀 더 정확히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도 홀로 오롯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러나 진유성은 이러한 이야기를 상소윤에게 해 주진 않았다.

해 봤자 이해하지 못할 것이었다.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오늘 여주인공 역의 배우를 보았느냐?”

“판틴?”

“그래.”

“당연히 봤지? 같이 봤잖아, 멍청아.”

“네가 보기엔 그녀의 외모가 어떠했냐?”

“예쁘던데? 배우들은 다 예쁘지.”

“흠, 그렇군.”

“왜?”

“팔찌의 주인과 닮아서.”

엄청나게 닮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목구비가 꽤 비슷했다.

주혜미는 중원에서는 아름답지 못한 외모였다.

지구의 명나라보다 더욱 약육강식을 추구하던 게 진유성이 살던 대명제국이었다.

지나치게 마른 체형에 병약한 느낌을 주는 주혜미는 매력적이지 못한 이였다.

하지만 지금의 지구에서 주혜미는 아름다운 외모다.

만약 중원에서 죽은 이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이 세계로 태어나면 좋겠다.

그리고 그 얼굴 그대로면 좋겠다.

그렇다면 아주 멋진 삶을 살 수 있을 거니까.

“너는 아주 운이 좋다, 상소윤.”

“뭔 소리야?”

“박색하지만 박색하지 않을 수 있는 곳에 태어났으니까. 앞으로는 매일 아침마다 천지사방에 절을 세 번씩 하도록 하여라.”

“……진짜 미친놈인가?”

상소윤이 한숨을 내쉬는데 그들의 집이 보였다.

꽤 즐거웠던 하루의 마무리였다.

* * *

중간고사의 시험 결과가 발표되었다.

대정고는 모든 시험이 태블릿 PC로 진행되기 때문에 하루면 점수와 등수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진유성은…….

모든 과목에서 100점을 맞았다.

“내 옆에 앉지 마라. 무식이 옮을까 두렵다.”

“90점 이하와는 겸상을 허하지 않겠노라. 저리 가라.”

“어허, 그림자를 밟지 말라. 무식하고 무지한 이여.”

덕분에 진유성의 거들먹거림은 끝이질 않았고, 수많은 피해자들이 속출했다.

물론 가장 큰 피해자는 같은 집에서 사는 상소윤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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