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업하기 싫은 천마님 166화>
* * *
두드림(DO DREAM) 픽쳐스는 CF를 전문으로 제작하는 업체로, 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영상 광고 회사다.
이런 두드림 픽쳐스 앞에 난제가 주어진 것은 오늘 아침.
좀 더 정확히는 팀장이 계약한 영상이 회의 안건으로 올라오고, 실무진들이 영상을 확인하면서였다.
-허억! 이토록 정확한 칼놀림이라니!
-당근, 당근이 날아다녀!
-아닛? 이 맛은……!
50분이 조금 넘는 영상을 보면서 실무진들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마침내 영상이 끝나고, 기획팀 부장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딴 걸 편집해 달라고?”
“그렇습니다.”
“야! 영상 퀄리티도 안 보고 덜컥 계약하면 어떡해?”
“…….”
“우리가 무슨 대학생 UCC 편집해 주는 업체야? 우리가 만드는 광고가 다 포트폴리오인 거 몰라?!”
부장의 성난 목소리에 팀장이 아무 말 없이 종이 한 장을 쓱 내밀었다.
“뭐야?”
“읽어 보시죠.”
묘하게 침착한 팀장의 태도에 부장이 화를 가라앉혔다.
그리고는 종이를 받았다.
종이는 광고 계약서의 사본이었는데,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광고 제작 기한이 1주일 이내로 명시된 것 외에는.
“김 팀장, 이거 일주일 뭐야?”
“클라이언트가 일주일 안으로 제작해 주기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왜 수락했냐고? 너 진짜 UCC 만드냐? 우리가 동아리야?!”
“계약금을 보시죠.”
“봤다!”
“자세히 보세요.”
부장이 눈을 가늘게 뜨며 계약서를 다시 검토했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이, 이거 뭐야?”
통상적인 계약금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0이 하나 더 붙어 있었다.
계약금뿐만 아니라 모든 비용 부분에 0이 하나 더 붙어 있었다.
즉, 이 계약서는 보통의 광고 10개를 했을 때 벌어들일 수 있는 수익을 보장하는 계약서였다.
“으음.”
부장은 마침내 팀장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계약이라면 자신이라도 냉큼 진행을 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영상 퀄리티가 너무 똥이다.
못 찍은 영상이더라도 편집점이 있으면 상관없다.
하지만 이 영상은 너무나 못 찍었고, 너무나 정적이고, 너무나 편집점이 없다.
“야, 그래도 영상은 한 번 확인하고 계약해야 하는 거 아니냐?”
“지금 당장 계약하지 않으면 프로핏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프로핏이 안 되면 일루션으로 간다고 했고요.”
“……진짜?”
“네. 거짓말 같지 않았습니다.”
프로핏, 일루션은 두드림과 함께 대한민국 3대 광고 제작사 중 하나였다.
이 정도 금액을 내걸면 셋 중 한 회사는 무조건 계약할 수밖에 없다.
그걸 안 팀장도 다른 회사에 줄 바에는 자신들이 계약을 한 것이었다.
어찌 보면 대기업의 비애였다.
작품보다는 실적을 우선해야 하는 중간 관리자의 비애이기도 했고.
팀장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한 부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화내서 미안하다, 김 팀장.”
“아닙니다, 부장님. 저라도 부하 직원이 이딴 영상을 계약해 왔으면 화냈을 겁니다.”
“근데 이걸 어쩌지?”
팀장과 부장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저 편집만 하는 게 뭐 어렵겠느냐만, 그들은 대한민국의 최고다.
최고는 최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염두에 두어야할 게 많았다.
당장 그들이 편집한 결과물을 두고 ‘이게 얼마짜리 편집본이다.’라는 소문만 돌아도 끔찍하다.
한참 고민하던 부장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만 있는 부하 직원들을 돌아봤다.
“의견 없냐?”
그때 부하 직원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이거 유투브 영상으로 계약된 거 맞습니까?”
“어. 광고 아니고 10분 안팎으로.”
“뭔가 이상한데요?”
“뭐가?”
“광고가 아니라고요?”
“아니라니까? 어떤 돈 많은 부자 놈이 취미로 찍고 우리한테 맡긴 거 같아.”
말을 하고 보니 더 어이없었다.
어떤 미친 부자 놈이 통상 계약의 10배를 걸고는 유투브 편집자로 두드림을 이용하나.
그때 부하 직원이 말했다.
“하지만 저 노인분 있잖습니까? 식사하시는 분.”
“어. 왜? 유명한 사람이야?”
“얼굴은 안 유명하겠지만, 이름은 유명한 분입니다.”
“누군데?”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 정지된 영상 속 노인에게 쏟아졌다.
여든은 되어 보이는 노인이 멋들어진 정장 차림으로 음식을 꽤 맛있게 먹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누군지 모르겠다.
그때 부하직원이 말했다.
“저분, JC 그룹의 김정철 회장님입니다.”
“뭐?!”
“확실해?”
“확실합니다. 옛날에 JC 그룹 홍보 영상 제작할 때 찾아본 적이 있습니다.”
부장과 팀장의 시선이 쏠렸다.
그렇다는 건…….
‘JC 그룹의 홍보 영상? 아냐, 그렇기엔 너무 격조가 없어.’
‘김정철 회장에게 손자가 있나? 손자의 꿈이 유투버?’
뭐가 됐던지 상관없었다.
영상의 편집 포인트를 찾아낸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설령 손자가 개인적으로 찍은 영상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JC 그룹의 상속자라는 걸 티내고 싶어서 김정철 회장을 출연시켰을 거니까.
“오케이. 다들 감 잡았지?”
“네!”
“일주일, 가능하겠지?”
“삼 일이면 됩니다.”
애당초 영상이 50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누가 봐도 돈 들어간 티 팍팍 내야 해. CG를 팍팍 발라 가지고 클라이언트들이 만족하게 만들란 말이야.”
“저 날아가는 당근들 하나하나에 JC 그룹 로고를 새겨 넣겠습니다.”
“좋아. 딱 봐도 요리왕 비룡 따라한 것도 알지?”
“네.”
“유머러스하게 가자. 무겁게 가지 말고.”
그렇게 회의가 끝이 났다.
진유성이 알았다면 분노했을 만한 회의 내용이었다.
그 누구도 가면 요리사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진유성이 자초한 문제기도 했다.
요리사의 얼굴은 꽁꽁 감춰져 있고, 김정철 회장의 얼굴은 드러나 있으니 포커스가 쏠릴 수밖에 없었다.
* * *
1학기 중간고사가 끝이 났다.
진유성은 일단 대학에 가기로 마음 먹은 뒤부터 시험에 있어서 나름 진지한 태도로 임했다.
지난 번 시험에는 공부를 3시간도 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무려 6시간이나 한 것이었다.
그러나 진유성의 6시간은 남들의 600시간만큼의 효율이 있을 것이었다.
진유성이 생사결의 상태에 돌입하면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그 상태에서 태블릿 PC로 교과서를 읽는다면?
남들이 1페이지 볼 시간에 진유성은 16페이지는 볼 수 있다.
게다가 진유성은 마음을 먹으면 다른 짓을 절대 안 했다.
무재(武才 : 무공의 재능)에는 집중력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해석되지 않는 무공 구결을 칠 주야 동안 고민할 수 있어야 하고, 불편함을 느끼는 초식을 몇 만 번이나 반복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과정을 수도 없이 거쳐 온 진유성은 집중하는 법을 알았다.
물론 지금까지는 그 집중력을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데 썼지만 말이었다.
“끝났다!”
“피씨방 갈까?”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대정고 학생들도 정신은 고등학생이었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태블릿 PC를 내팽개친 그들은 무엇을 하며 놀지를 벌써부터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심도훈이 진유성에게 다가왔다.
“야, 진유성.”
“왜 그러느냐?”
“시험 잘 봤냐?”
“내가 못하는 게 있을 리가. 아주 잘 봤다.”
진유성은 진심으로 자신이 모든 문제에 정답을 찾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진유성다운 대답에 심도훈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물었다.
“홍대 가실?”
“홍대? 홍대는 뭐 하러?”
“뭐긴 뭐야, 놀러 가는 거지.”
“흠. 딱히 새로운 놀이는 없지 않느냐?”
“뭐 맨날 새로운 것만 해야 하냐? 하던 거 하는 거지.”
진유성은 살짝 놀랐다.
심도훈의 말이 옳다.
그는 한국에 온 이후로 늘 새로운 문화를 찾아 헤맸지만, 모든 것은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그는 이제 21세기의 문화에 적응을 했고, 더는 새로운 것들이 없었다.
물론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들은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겨있는 문화의 정수는 어느 정도 체화했다고 보는 게 맞았다
“네 말이 옳다. 늘 새로울 수는 없지.”
“뭐라는 거야? 그럼 가는 거다?”
“오냐.”
그렇게 약속을 잡은 진유성, 심도훈, 지종수, 고인수는 담임의 종례를 기다렸다.
이 네 사람은 남들이 보기엔 절친이었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들은 꽤 복잡한 관계였다.
진유성은 지종수의 연적.
진유성과 심도훈은 해커와 해킹 피해자.
고인수는 시도 때도 없이 단추를 벗기는 진유성의 ‘인수 분해’ 피해자.
역시 문제는 진유성이다.
그렇게 네 사람이 종례를 하고 홍대로 향하려는데, 세 사람이 그들의 무리에 합류를 했다.
“우리도 홍대 가는데?”
상소윤, 정새롬이었다.
그들도 마침 홍대로 향하는 길이었다.
상소윤의 합류 소식에 지종수의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
“야, 진유성.”
“왜 그러느냐?”
“시험 잘 봤냐?”
“아주 잘 보았다. 너는 잘 보았느냐?”
“나도 잘 봤어.”
그 순간, 진유성이 엄지를 치켜 올렸다.
“올해 들은 농담 중 가장 재밌었던 농담이었다.”
“야!”
그러나 애석하게도 상소윤은 지종수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늘 그렇듯 말이었다.
두 무리로 나뉘어 택시를 탄 그들은 홍대입구역의 9번 출구에서 만났다.
그리고는 근처 KFC에 가서 햄버거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근데 곧 스승의 날인 거 알지?”
“알지.”
“무슨 장난을 치지?”
보통의 고등학교들도 그렇겠지만, 대정고는 스승의 날 때 담임을 상대로 장난을 많이 쳤다.
문을 열면 위에서 뭔가가 쏟아지게 한다든가, 슬리퍼에 본드를 발라 놓는다든가.
장난이 끝나면 선생님을 위한 선물을 주긴 하지만, 장난의 수위는 결코 낮지 않았다.
학생들은 모르겠지만, 사실 각 반의 담임 선생님들은 일부러 적당히 당해 주는 경향도 있었다.
대정고 학생들이 누군가?
돈 많고 철없는 놈들이다.
억지로 트랩들을 피하다보면 오기가 불타올라서 내년도 담임들이 더욱 피해를 보기 마련이다.
그리고 장난이 끝나고 주는 선물의 값이 어마어마하게 비싸기도 하고.
하지만…….
“방심하지 마. 상대는 연기훈이야.”
“선생이자 선배지.”
“옛날에는 장난의 수위가 장난이 아니었다던데.”
“학교 정문에 가드들 불러서 선생들 출근하는 거 막고 그랬대.”
그들의 담임인 연기훈은 결코 녹록지 않다.
연기훈은 대한민국에서 대정고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학생으로 3년을 보냈고, 선생으로 또 몇 년을 보냈다.
학생들의 패턴은 물론이고, 선생들의 패턴까지 꿰뚫고 있는 사람이다.
지금껏 연기훈에게 스승의 날 장난이 통한 역사가 없었다.
무엇을 준비하든 귀신같이 피해 간다.
심지어 선물 같은 거 필요 없으니까 장난 좀 치지 말라고 학생들을 타박한다.
이런 연기훈의 태도가 대정고 학생들을 불타오르게 만든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우리도 가드들 불러서 정문에서 못 들어오게 막을까?”
“그럼 담임도 가드를 불러서 유혈 사태가 발생하지 않을까?”
“교탁에 페인트 발라 놓을까? 아침 조회할 때마다 교탁에 손을 올리잖아.”
“그거 작년에 선배들이 했는데, 안 통했대.”
그렇게 학생들이 고민하는 사이, 진유성이 피식 웃었다.
“기관진식을 고민하는 게냐?”
“기관…… 뭐?”
“아직 스승의 날까지는 2주가 넘게 남았는데 뭘 벌써부터 고민하고 있느냐?”
“그냥 모인 김에 말하는 거지. 재밌잖아.”
“걱정 마라. 내가 그런 쪽에 있어서 경험이 많으니까.”
상소윤이 화들짝 놀랐다.
방금 진유성은 간접적으로 자신이 간첩이었음을 밝힌 것이기 때문이었다.
부비 트랩, 함정을 설치하는 직업이 간첩 말고 뭐가 있겠는가.
상소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그, 볼링 칠까?”
“볼링?”
“어. 이 앞에 락 볼링장 있잖아.”
“그럴까?”
상소윤의 제안에 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볼링장으로 향했다.